싱가미싱에 얽힌 추억

부모님이 작고하신 지 여러 해 됐지만 아직도 어버이날을 맞이하면 돌아가신 부모님에 대한 아련하고 애틋한 추억이 되살아나곤 한다.나에게는 특별한 어머니(金千蕙) 유품이 있다. 어머니 보듯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싱가(Singer)미싱’이 그것이다. 어머니가 시집올 때 혼수로 가져오신 재봉틀이다. 1916년생이시고, 당시로서는 좀 늦은 1941년 4월에 결혼했으니 재봉틀 나이가 이미 60해를 훨씬 넘은 셈이지만 아직도 씽씽 돌아가고 있다.어머니는 이화전문을 다니다가 도쿄 유학을 하여 동경양재전문학교에서 의상을 전공했다. 옛날 서울 돈암동에 살 때는 선반에 모자를 만들기 위한 나무로 만든 갖가지 형틀이 수십개 쌓여 있기도 했다.6ㆍ25 동란 중에도 재산목록 1호로 싱가 상표의 재봉틀을 부산까지 싸들고 피난했다. 부산 초량동에서 외과병원을 개업하셨던 할아버지 병원 한구석에서 피난살이를 약 3~4년 했다.그당시 부산은 왜 그렇게 추웠던지 지금 기억은 매서운 바닷바람과 미군 천막으로 세운 임시천막학교가 부산 피난살이 기억의 대표적인 것이었다.또 하나 있다면 어머니의 싱가미싱이다. 어머니는 그 어려운 피난살이, 시집살이 중에도 병원건물 한 귀퉁이에 간이양장점을 차렸다. 동네 부인들의 옷을 재단하고 싱가미싱을 돌려 옷을 만들어 어려운 생활에 조금은 보탬이 됐을 것이다.지금 생각하면 정말 초인적인 헌신을 하셨다.원래 어머니는 결혼 전에 화신백화점 부인복부에서 디자이너로 일했으며 결혼 직후에는 종로 종각 근처에서 양장점을 개업해 번창했으나 아버지의 반대로 결국 뜻을 접고 말았다고 한다.어머니 인생의 동반자인 재봉틀 싱가미싱은 또 한 번 일을 했다.내가 중학교에 입학 후이고, 돈암동에서 문화촌으로 이사하기 전이었으니 아마도 1956년쯤이라고 생각한다.우리 돈암동 집은 한때 봉재공장이 됐다. 그당시 겨울에 유행하였던 코르덴 잠바를 집에서 만들었다. 어느 회사로부터 주문을 받은 것도 아니고 그저 가내공장에서 싱가미싱을 돌려 코르덴 잠바를 만들어 몇몇 점포에 위탁판매를 한 것으로 생각된다. 얼마만큼 성공적이었는가는 알 수 없지만 문화촌으로 이사 간 것을 계기로 접으신 것을 보면 사업적으로는 그리 재미를 못 보신 것 같다.어머니는 개화기에 첨단을 걷는 신여성으로 요샛말로 캐리어우먼의 꿈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한 꿈을 가난한 연극인과의 결혼으로 모두 포기하게 된 것이다. 일생을 내조와 5남매의 교육ㆍ혼사 등 모든 가정사에 중심이 돼 정말로 영일 없는 날을 보내셨다.이것이 어찌 우리집만의 경우이겠는가?지난 40년간 세계가 놀란 경이로운 한국경제 발전의 뒤에는 그 어려운 시집살이, 가난한 살림살이, 입시지옥에서 자녀교육 등 상당 부분에서 어머니의 노력과 헌신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이 땅의 모든 어머니들은 정말로 위대하다.어버이날을 맞이해 조촐한 선물이나 식사라도 대접해 드릴 수 있는 기회가 없다는 점이 매우 아쉽고 슬프다. 그래도 어머니의 싱가미싱을 소중히 갖고 있는 것만으로도 나에게 조금은 위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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