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쓰면 ‘약’ 잘못 쓰면 ‘독’

매출 30% 내외 오르지만 수익성은 뚝 떨어져

평소 노(NO)세일을 고수하던 한 의류업체가 최근 세일을 했다. 소비자들뿐만 아니라 업체 관계자들도 놀랐다. 탄탄한 회사로 알려진데다 그동안 ‘우리의 사전에 할인판매는 없다’고 강조했기 때문이다.할인기간에 이 회사 제품은 매장마다 다르지만 이전보다 약 50% 정도 더 팔렸다. 다른 업체가 세일을 할 경우 보통 30%쯤 더 팔리는 것에 비하면 파격적이다. 자연 회사 전체적으로 큰 매출신장으로 이어졌다. 소비자들 역시 일단은 반기는 분위기였다. 갖고 싶었던 제품을 싼 가격에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하지만 일부 소비자들과 업계에서는 다른 시각으로 이 업체의 할인판매를 바라봤다. 일각에서는 자금사정에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됐다. 불황으로 경기가 얼어붙으면서 현금유동성에 문제가 생겼고, 이를 할인을 통해 해결하려고 한 것으로 여겼다. 일부 소비자들은 이미지 실추를 제기했다.노(NO)세일을 고수하다가 일단 세일을 하기 시작하면 기본적으로 브랜드파워에 흠이 가기 마련이고, 이를 극복하기가 쉽지 않다는 논리다. 결국 이 회사는 이번 세일을 통해 매출은 늘었지만 부정적인 소문의 주인공이 됐고, 브랜드 이미지에도 손상을 입었다는 것이 업계의 공통된 지적이다.할인의 가장 큰 이점은 매출증대다. 경기상황과 업종에 따라 다르지만 세일기간 중 보통 20~30% 정도의 매출신장으로 이어진다는 것이 마케팅전문가들의 설명이다. 재고를 줄이는 데도 매우 효과적이다. 소비재 업체들에 재고는 암적 존재 그 자체로 매일 재고와의 전쟁을 벌일 정도다. 하지만 세일은 이런 재고문제를 크게 덜어준다.의류업계의 한 관계자는 “의류브랜드의 경우 재고를 제대로 처리하지 않을 경우 30%에 육박한다”며 “하지만 세일 등을 통해 이를 10~20% 수준으로 줄이고 있다”고 말했다.기업 입장에서 할인판매 실시여부는 여러 가지 상황을 고려해 결정해야 한다. 누가 뭐래도 불황기의 세일은 분명히 메리트 있는 가격전략이다. 재고를 줄이고 현금유동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할인판매가 필요할 수 있다.다만 몇 가지 주의할 점이 있다. 가격을 내리지 않아도 되는지 꼼꼼한 검토가 이뤄져야 한다. 불황기에는 이익실현이 더욱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아울러 세일기간 이후 가격을 정상화해도 소비자들의 저항이 없는지 살펴봐야 한다. 지나친 세일은 나중에 가격을 정상화하는 데 걸림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가격책정 전문가인 폴 카 보스턴컨설팅 부사장은 “한국기업들의 가격결정은 더욱 세분화할 필요가 있다”며 “상황에 따라 다양한 가격정책을 구사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특히 그는 “한국기업들은 매출증대에만 관심을 기울일 뿐 수익성에는 상대적으로 덜 관심을 갖는 것 같다”며 “고객군과 제품군에 따라 세일여부와 세일폭 등을 달리 책정하고 가격과 수익성, 판매량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해 결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세일을 효과적으로 이용해 위기를 극복한 사례도 적지 않다. 대표적인 사례가 국내 인터넷 서점들이다. 파격적인 가격할인 덕분에 크게 성장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예스24 등 인터넷 서점들은 일반 오프라인 서점들보다 20% 이상 싼 가격에 책을 팔며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고속성장의 기틀을 닦았다. 특히 예스24의 경우 국내 최대서점인 교보문고 광화문점과 매출액 면에서 다툴 정도로 급성장, 업계에 인터넷 서점의 위력을 보여주기도 했다.미국 뉴욕 9ㆍ11테러 직후 미국 항공회사들도 거론할 수 있다. 당시 미국 항공사들은 40% 이상의 파격적인 할인을 펼치며 고객들을 끌어모아 피해의 상당부분을 줄였다. 어차피 손님이 없을 경우 빈 좌석으로 운행해야 하는데 가격을 대폭 내림으로써 다른 교통수단을 이용하는 사람들을 고객으로 끌어들였던 것.하지만 큰 폭의 할인은 곳곳에 많은 후유증을 남기기도 한다. 대표적인 것이 수익률의 저하다. 예컨대 1만원에 팔던 것을 20% 할인해 8,000원에 팔면 수익성 면에서 개당 2,000원씩 떨어진다. 특히 할인율을 높일수록 수익성은 떨어진다. 심지어 원가수준에 파는 상황이 생기고, 이는 회사의 부실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할인을 자주 할 경우 브랜드 이미지에도 부정적이다. 소비자들에게 ‘싼 게 비지떡’이라는 이미지를 심어줄 수 있다. 특히 국내 소비자들의 경우 가격으로 상품의 질까지 판단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런 점에서 외국의 유명 브랜드들이 자사에서 정한 가격을 고수해 명품대열에 오른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소비자 가운데 제품에 대해 완벽한 정보를 가진 사람은 거의 없다. 단서에 의존해 힌트를 얻을 뿐이다. 대부분 잘 모르면 가격을 따져보고 제품을 평가한다. 비싸면 명품 운운하며 신뢰하고, 싸면 그렇고 그런 제품 정도로 여긴다. 국내 제조업체들이 나중에 세일을 하더라도 일단은 가격을 높게 매기는 경향이 강한 것도 소비자들의 이런 마인드와 무관치 않다는 분석이다.세일의 반대편에 노세일이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염두에 둬야 할 것은 세일은 좋지 않고, 노세일은 좋다는 등식은 성립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경영환경이나 기업의 사정에 따라 적절히 판단해야 할 문제다. 다만 국내 기업들의 경우 가격결정 시스템이 완전치 않은 경우가 많은데다 세일여부를 이분법적으로 판단하는 사례가 많아 문제가 큰 것으로 지적된다.거듭된 할인판매 영향으로 무너진 회사가 있는 반면, 노세일을 고수하다가 실패한 사례도 적지 않다. 90년대 중반 국내에서 캐주얼의류를 만들어 팔던 N사는 한동안 최고가를 유지했다. 수입품보다 더 높은 가격대에 제품을 팔았다. 처음에는 신세대들을 중심으로 큰 인기를 끌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오래가지 못했다.제품의 질이나 디자인에 비해 턱없이 비싸다는 인식이 퍼지면서 급격한 하향세를 보였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명품의 조건을 전혀 갖추지 않은 상태에서 고가에 노세일 전략을 구사하다 실패한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고 말했다.1910년 설립돼 한때 미국 카드시장을 석권했던 홀마크 역시 너무 높은 가격과 할인점에 제품을 공급하지 않은 점이 발목을 잡은 케이스로 분류된다. 94년에는 매출이 38억달러에 이르기도 했지만 경쟁이 치열해지고 미국 내에서 할인점이 주목을 받으면서 이를 외면했던 홀마크의 시장점유율은 하락세를 보였고, 이 회사의 가격전략은 결국 실패했다는 평가를 받기에 이르렀다.노세일을 넘어 불황기에 오히려 가격을 올려 성공하는 사례도 있다. 최근 국내에서 명품이라는 딱지가 붙은 채 팔리는 외국산 의류나 액세서리, 자동차 등은 지난해보다 가격이 오히려 올랐다.그런데도 브랜드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상당수 제품은 지난해보다 오히려 매출이 늘었다. 불황이지만 일부 고소득층의 소비는 여전하고, 이들은 가격을 크게 따지지 않는 소비행태를 고수하고 있다. 업체 입장에서는 소비의 양극화 현상을 적절히 할용하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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