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대란설’이 도무지 잦아들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무엇이 대란일까? ‘카드사들이 발행한 채권거래가 마비되고, 이에 따라 카드사가 부도나고, 투신사에는 고객들의 환매 요구가 한꺼번에 밀려들고, 이로 인해 금융시장 전체가 연쇄적으로 요동을 치고…’ 예상되는 최악의 시나리오다.사실 ‘대란’까지는 아니더라도, 현재 상황도 정상과는 거리가 멀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을 시장 한구석에 고스란히 놓아두고 살금살금 그 옆을 지나다니는 셈이다. 5월 들어 셋째주까지 카드채의 일 평균 거래량은 658억원밖에 되지 않았으며, 그나마도 향후 카드채값이 상승할 때 큰 차익을 노리는 일부 투기적 물량을 제외하면 기관간의 거래는 중단상태다.금융당국은 지난 4월3일 소위 ‘4ㆍ3대책’을 내놓은 이후로는 표면적으로 더 이상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어떤 시장 관계자도 재경부나 금감원, 또는 청와대 경제정책자들이 그저 손놓고 있다고 믿지는 않는다. 오히려 어떻게 방향을 잡고 있는지가 초미의 관심사다.카드채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현재 진행되고 있는 것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카드사들의 자본확충 노력과 자체적인 구조조정을 독려하기, 둘째는 단기 카드채를 장기로 전환하기. 전자는 카드사들의 몫이다.국민은행의 국민카드 합병, 삼성 LG 등 그룹 계열사들의 증자를 통한 자금마련, 자산규모를 줄이는 구조조정 등이 그 방법이다. 후자는 시장에서 할 일이며, 그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서는 아직도 각자 처한 상황과 이해관계에 따라 갑론을박이 계속되고 있다.우연의 일치일까. 카드채 문제를 풀 해법에 대해 힌트를 얻으려 만난 전문가들은 한결같이 IMF 외환위기 당시 이야기를 꺼냈다. 많은 사람들이 그때만큼이나 심한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는 방증이다. 하지만 금감위와 재경부는 “민간에서 알아서 살길을 찾아라”고 거듭 강조한다.재경부 금융정책국 변양호 국장은 “그냥 놔둔다. 정부 대책이 없으면 큰일이라도 날 것 같은 위기감을 조성하는 세력들은 정부의 개입을 통해 수혜를 입을 것으로 예상하는 특정 이익집단이다”는 입장을 견지하면서 원칙론을 반복했다.그에게 “무슨 다른 조처를 마련 중인 것 아닌가” 하고 거듭 추궁하자 “뭔가 한다고 해도 우리(재경부)는 안한다. 그 말은 신용보증기금이나 산업은행을 통해서 무엇인가를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고 못박았다.작은 노력들은 계속되고 있다. 최근 LG카드는 캠코(자산관리공사)에 부실자산을 팔아서 약간의 돈(1조원)을 마련해 주머니에 넣어뒀다. 국민은행은 5월이 다 가기 전에 국민카드의 자본확충을 어떤 방법을 통해 할 것인지 입장을 정리한다는 방침이다(물론 국민카드 노조는 파업을 불사하며 국민은행에 흡수되는 것에 반대하고 있다).정부가 입을 다물자 시장에서도 다양한 해결책들이 제시되고 있다. 최근 LG증권 IB본부는 현재의 금융시장혼란을 ‘카드채사태를 풀면서 수수료도 벌 수 있는 기회’로 인식, 아이디어를 들고 업계의 반응을 타진하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이 구상의 골자는 업계 공동으로 AMC(자산관리회사)를 설립해 카드사들의 부실채권을 인수함으로써 시간을 벌고, 이를 분류해 다시 시장에서 매각한다는 것이다. 카드사에는 유동성이 공급되고, 부실채권을 AMC에 넘기면 은행연합회 신용불량자에서 지워지기 때문에 신용불량자 숫자가 줄어드는 짭짤한 부수입이 있는 방안 이어서 주목을 받고 있다.시나리오 ‘하나’서로 책임을 떠넘긴다‘실패한 정책’이라는 단정적 표현이 사용될 정도로 원성이 높았던 ‘4ㆍ3대책’의 골자는 대형 투신사와 카드사들을 주요 수혜자로 만들었던 글자 그대로의 ‘지원’이었던 것으로 평가된다. 카드채와 CP를 일괄 만기연장하고 은행, 보험, 투신사들이 브릿지론이라는 이름으로 5조 6,000억원을 만들어 가만 놔두면 시장에서 소화가 되지 않는 카드채와 기업어음(CP)을 사주었다.이에 대해 참여연대 김상조 경제개혁센터 소장(한성대 교수)은 소리 높여 비판하며, 이를 반복하면 시장이 정상화되는 길은 요원하다고 말한다. 4ㆍ3 조치는 건전한 카드사와 그렇지 않은 카드사를 구분하지 않은 채 모든 금융사를 구제하려 했다는 것이다.정운찬 서울대 총장은 보다 근본적으로 정책실패에 대해 거론했다. 오늘날 카드채사태의 근본원인은 정책적으로 경기부양의 방편으로 신용카드 사용을 장려하고, 이에 따라 신용카드를 쓴 많은 사람들이 돈을 갚지 않고(연체율 상승), 그래서 카드사들이 부실해지고, 부실한 회사에서 발행한 채권을 시장에서 사주지 않음으로써 조달방법이 묘연해지는 위기에 처하고, 결국 금융시장 전체가 출렁이게 되는 일종의 악순환이었다.정총장은 “IMF 위기 이후 구조조정이 다 끝났다고 착각하고 경기를 부양할 방법으로 신용카드 사용을 유인한 정책당국자들도 사태의 원인 제공자 중 하나다”고 말했다. 신용사회의 틀이 갖춰져 있지 않은 상황에서 신용카드를 마구 쓰게 함으로써 거꾸로 신용사회를 붕괴시키는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그는 “책임지라는 수준까지는 아니라 해도 ‘누가 무엇을 했는가’만은 정확하게 구분해야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면서 ‘정책실명제’를 거론했다.김경록 미래에셋투신운용 대표는 “투신사들도 이번 위기에 책임이 있고 이로 인해 이미 많은 손해를 봤다”며 “저지른 사람이 페널티를 받는 것, 이게 시장의 원리다”고 말했다.일차적인 책임이 방만하게 경영한 카드회사들에 있는 만큼,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지게 하지 않고 불만 꺼주는 방법은 또 다른 악순환을 부른다는 것이다.시나리오 ‘둘’단기 처방에 의존한다카드사들은 채권거래가 중단될 위기에 처하기 직전까지, 연체율을 낮게 보이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했다. 대표적인 것이 연체자가 갚을 돈을 대출로 돌리는 대환대출이었다.이 같은 눈속임식 땜질처방은 모든 카드사에 대한 시장의 불신을 초래했고, 현재와 같은 위급한 사태를 낳았다. 연체율은 물론, 실제로 카드사들의 경영실태에 대한 정보는 별로 공개돼 있지 않다.한 시중은행의 임원은 “지난 4월 카드채 대책을 논의하기 위해 당국과 은행 임원들이 모였을 때 이들이 거래 카드사에 대해 공시자료 외에는 별 정보를 갖고 있지 않아 놀랐다”고 전했다.참여연대 김상조 소장 역시 같은 지적을 했다. 김소장은 “금융당국이 개별 카드사의 경영실태 관련 정보를 은폐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실태를 알지 못하거나 혹은 숨기면 근본적인 수술보다 단기처방으로 연결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현재 시장 주변에서는 확인되지 않은 여러 가지 시나리오들이 흘러나오고 있다. 금감원이 6월에 만기도래하는 CP를 3년짜리 회사채로 바꿔주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는 것, 국민연금의 자금으로 카드채 또는 카드사들이 발행한 ABS를 매입한다는 것 등이다.그러나 기금조성이나 공적자금 투입, 기타 창구를 동원한 간접 공자금 지원 등은 모두 단기 처방에 그칠 수밖에 없다. 이런 시나리오들 중의 일부는 카드사나 투신사 쪽에서 만들어 흘려보낸다는 추측도 무성하다. 썩어가는 팔과 다리를 자를 생각은 않고 “다 죽게 됐으니 살려달라”고 요청하고 있다는 해석이다.이와 관련, 김일구 굿모닝신한증권 연구위원은 재경부가 “외채협상 방식으로 푼다”고 발언한 데 대해 주목하며, 여기에 강조점을 더 두어야 한다고 말했다. 외채협상방식이란 97년 외환위기 당시 우리나라가 외자를 유치했던 방법을 지칭한다.당시 외환보유고가 부족해진 유동성 위기 국면에서 돈을 꿔주던 외국 자본은 “이런저런 조건 아래서만 돈을 꿔줄 수 있다”고 단서를 붙였고, 그에 따라 우리나라는 혹독한 구조조정의 시기를 겪어야만 했다.카드사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논리가 적용돼야 하고, 이는 자본확충, 자산축소, 구조조정과 같은 방만한 경영을 바로잡기 위한 장기간에 걸친 시련기를 보내야 함을 뜻한다.삼성카드는 5월27일 이사회를 열어 8,000억원 규모의 후순위 전환사채 발행을 결의했다. LG카드도 같은날 하반기까지 총 7조2,000억원의 유동성을 확보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이 자구계획을 들여다보면 후순위채와 ABS발행 등 단기처방들이 주요내용을 이루는 것을 알 수 있다.시나리오 ‘셋’정부가 티내며 개입한다아무리 시장의 힘을 믿는 사람들이라 해도, 시장이 제 기능을 못할 경우 국가의 개입이 없을 수 없다는 데 대해서는 인정한다. 다만 ‘시장주의자들’은 개입에도 방법과 기술이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정부가 지급보증을 하는 프라이머리 CBO(채권담보부증권)와 같은 ‘친히 나서기’ 방식을 보이지 말고 “뼈를 깎는 자구노력을 하지 않을 수 없게끔 주변환경을 조성하는 식으로 개입하라”는 주문이다.아무리 당국이 ‘더 이상의 대책은 없다’는 원칙을 천명한다고 해도, 만일 7월 대란설이 현실이 돼 나타나고 금융시장이 패닉 상태에 빠지기라도 한다면 정부의 개입은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최후의 경우에는 기금을 만들지 않을 수 없을 것으로 예상된다. 김일구 연구원은 “기금 만든다는 얘기부터 꺼내면 카드사들이 다시 방만한 자세로 나오면서 자구노력을 게을리 할 가능성이 있다”고 당국의 입장을 해석했다.또한 이와 관련, 카드채 금리를 더 올려서 카드사들이 높은 조달비용을 감수하는 것을 해법으로 제시했다. “카드채 금리가 계속 올라가고 있기는 하지만 시장금리를 반영하려면 아직도 낮은 수준”이라면서 김연구원은 “카드사들이 이 같은 조달비용을 부담하려면 자산규모를 줄일 수밖에 없고, 이에 따라 자연스러운 구조조정이 이뤄지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또 그는 “현재 많은 증권사 애널리스트들이 하반기에는 카드사들이 이익을 낼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고 있다”면서 “이는 오히려 카드사들의 자구노력 의지를 약화시킬 뿐”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