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르티에 등 소유한 세계 2위 종합명품회사

지난해 총매출 36억유로, 영업이익 2억5000만유로 기록… 9·11테러 이후 매출·이익 줄어

세계적 명품 브랜드 카르티에의 화려한 명성 회복을 위해 모기업인 리치몬트그룹 소유주 요한 루퍼트 회장(사진)이 소매를 걷어붙이고 나섰다. 지난 5월 말 제네바 소재 리치몬트그룹 본사에 도착한 남아프리카공화국 대부호 루퍼트 회장은 그룹 차원의 경영효율성 강화를 위한 대대적인 조직개편과 새로운 전략수립에 착수할 것이라고 밝혔다.그는 현재 3개월 예정으로 스위스에 머물며 구조조정작업을 진두지휘하고 있다. 리치몬트의 구조개혁은 이미 예정된 것으로 전혀 새로울 게 없으나 평소 스위스 리치몬트그룹은 전문경영인에게 맡기고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렘브란트그룹 경영에 더 큰 관심과 노력을 기울였던 루퍼트 회장이기에 이번 결정은 관련 업계를 놀라게 하고 있다.특히 그룹의 최고 인기 브랜드 카르티에와 관련, 과거 최고경영자(CEO)에게 경영을 일임했던 것과 달리 앞으로는 경영에 관여하겠다는 뜻을 은근히 암시했다. 지난 3월 요한 루퍼트 회장의 그룹 차원의 대대적인 조직개편작업 발표 직후 알랭 도미니크 페랭 카르티에 최고경영자(CEO)가 사임의사를 밝힌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1998년 카르티에 최고경영권을 부여받은 페랭 회장의 당초 임기가 2008년으로 정해져 있었던 만큼 이번 사임발표는 많은 추측을 낳고 있다. 리치몬트그룹 홍보실은 페랭 회장이 오는 10월10일 60세 생일을 기해 정년퇴임하고 사외이사로 그룹과 계속 관계를 유지할 것이라고 해명했으나 시장전문가들은 그의 사임을 리치몬트그룹 루퍼트 회장의 불신임으로 보고 있다.카르티에와 피아제, 반 클리프 앤 아펠을 비롯해 몽블랑 만년필, 남성 패션잡화 던힐 등 18개의 명품 브랜드를 갖고 있는 스위스 리치몬트그룹은 프랑스 LVMH에 이어 세계 2위의 종합명품업체다. 리치몬트의 대주주는 남아프리카공화국계 렘브란트그룹이다. 렘브란트는 요한 루퍼트 회장의 부친 안톤 루퍼트가 설립한 회사로 현재 담배, 금융, 부동산, 식품업 등 다양한 산업분야에 진출한 대기업이다.31년 전 남아공의 루퍼트가(家)가 명품산업에 진출하며 리치몬트의 본사를 제네바에 정한 것은 스위스의 우수한 시계산업 기술력이 크게 작용했지만, 그 이면에는 정치적 이유도 있다. 당시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인종차별 정책의 실시로 국제사회로부터 완전 고립돼 선진국의 고급소비자를 주 고객으로 하는 명품사업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지난해 리치몬트그룹의 총매출액은 36억유로로 전년도에 비해 5% 줄어들었다. 영업이익은 2억5,000만유로의 흑자를 기록했지만 46% 폭락했다. 전반적으로 명품업계가 2001년 미국 9ㆍ11테러 여파와 세계경기 둔화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을 볼 때 리치몬트그룹의 실적하락은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특히 경영적자를 기록한 타 업체들과 비교하면 나쁜 실적도 아니다.그러나 그룹 창사 이래 매년 20% 수준의 고속 성장을 해오던 리치몬트로서는 최악의 결과다. 더욱이 리치몬트그룹의 간판브랜드 카르티에의 실적저조는 비상등이 켜질 정도로 심각한 수준이다.시계매출에서 가장 큰 수익을 올리는 카르티에의 지난해 시계생산량은 2001년 48만개에서 23만개로 떨어졌다. 최근에는 스위스 빌르레의 시계공장 종업원 200명을 감축키로 결정했다.한때 어려움에 빠졌던 피혁제품 브랜드 랑셀과 남성 잡화 브랜드 던힐의 경영상태가 호전되고 있는 반면, 카르티에는 퇴조하고 있다. 그룹 총매출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카르티에의 경영이 호전되지 않으면 리치몬트그룹의 경영악화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조심스러운 우려마저 나오고 있다.요한 루퍼트 회장은 카르티에의 실적 감소와 관련, “상류층의 최고급품이라는 화려한 명성에 도취해 새로운 경쟁자들의 시장진입을 감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며 “문제의 원인은 불안정한 국제정세와 경기변동이 아니라 바로 기업 내부에 있다”고 진단했다.즉 새로운 성장모델을 제때 제시하지 못했다는 설명이다. 이와 함께 사내에서는 페랭 회장의 우유부단함과 급격한 전략방향 수정도 문제의 원인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한 예로 카르티에는 중저가 브랜드 마스트(Must)의 유지와 퇴출여부를 놓고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소모했다.마스트는 오랫동안 카르티에의 베스트셀러로 매출증대에 크게 기여를 했지만 동시에 중저가 브랜드의 인기는 ‘유럽 왕실과 귀족들이 선호하는 브랜드’라는 화려한 명성을 퇴색시켰다.지난해 기 레마리 카르티에 인터내셔널 사장은 최고급품 이미지 강화전략을 수립하고 마스트 브랜드를 시장에서 퇴출시켰다. 그러나 그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죽였다는 비난 속에 새로운 전략을 제대로 추진하지도 못하고 지난해 10월 카르티에를 그만둬야 했다.그의 후임자인 베르나르 포르나스 사장은 전임자가 퇴출시킨 마스트 브랜드의 시장 재진입 계획을 준비하고 있다. 퇴출과 재출시라는 전략변경은 결국 중저가와 최고급 고객층 모두로부터 외면당하는 결과만 초래했다.리치몬트그룹 최고경영자가 되기 위해 꼭 거쳐야 하는 로열코스로 알려진 카르티에 계열사 경영진의 권력다툼 또한 경영악화의 원인이다. 몇 년 전 조지프 카누이 전 회장과 페랭 회장의 갈등은 아직도 직원들 사이에 화제가 될 정도로 골이 깊었다.최고경영진간의 갈등과 불화는 생산성 저하라는 역기능을 유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뿐만 아니다. 카르티에의 비우호적 사내분위기는 그룹의 계열사에까지도 영향을 미쳤다.인력전문컨설팅업체 러셀 레이놀즈의 베아트리스 발리니는 “프랑스 카르티에와 랑셀, 독일의 몽블랑, 스위스 피아제, 영국 던힐 등 다양한 국적의 계열사로 구성된 리치몬트그룹의 유일한 공통점은 명품 소비재업체라는 것뿐”이라며 “브랜드간의 시너지 효과는 접어두고 일관성 있는 정책수립과 전략실행도 어렵다”고 지적했다.그동안 남아공에서 원격관리경영에 만족해 왔던 요한 루퍼트 회장이 마침내 스위스 본사로 직접 날아와 그룹 경영혁신을 시도하고 있다. 과거의 명성에 취해 깊은 잠에 빠진 카르티에를 흔들어 깨우는 그는 카르티에가 머지않아 과거보다 더욱 화려한 자태로 나타날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한다.루퍼트 회장의 카르티에에 대한 기대와 믿음은 그 혼자만의 확신이 아니다. 얼마전 이탈리아 종합명품업체 프라다는 자사 브랜드 시계와 액세서리 생산을 리치몬트그룹에 맡겼다. 카르티에의 역사와 전통을 볼 때 프라다 제품을 성공작으로 만들 능력이 충분하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창조성이 결여된 고급품은 비싼 소비재에 불과할 뿐 명품이 아니다”고 강조하는 루퍼트 회장은 조만간 이탈리아 패션의 메카 밀라노에 리치몬트그룹 디자인연구소를 개설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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