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노하우 까다로운 강남 입맛 사로잡아

국내 ‘기능장’획득·대한제과협회 책임까지… 후진양성 위한 전문대학 설립이 꿈

“와, 김영모다.”유명연예인들이 가끔 TV토크쇼에 나와 연예인으로서 견디기 힘든 경험을 이야기할 때가 있다. 그중 흔한 것이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어린아이들의 손가락질과 반말을 감수해야 한다는 점이다.하지만 같은 일을 겪어도 그 일이 마냥 즐겁기만 한 사람도 있다. 자신의 이름을 건 ‘김영모과자점’을 운영하고 있는 김영모 사장(50)이 그렇다. 잦은 방송출연으로 연예인 못지않게 유명세를 치르고 있는 그도 이런 일을 겪기는 부지기수다.그리고 그에게 이런 아이들의 소란이나 등을 두드려주며 “좋은 제품 만들어줘 고맙소” 하고 칭찬하는 노신사의 평이나 모두 보람을 느끼게 해주는 순간들일 뿐이다.김영모과자점은 외국 브랜드 제과점이 즐비한 서울 강남지역에서 까다로운 지역주민들의 입맛을 사로잡으며 ‘명품빵’으로 자리를 잡았다. 20여년 전 도곡동에 작은 빵집을 연 것을 시작으로 현재는 강남지역 3곳을 비롯해 총 4개의 매장을 가진 브랜드 제과점으로 일궈냈다. 현재 수원여자대학 제과제빵과에 출강하고 있기도 하다.이처럼 화려한 경력의 김사장보다 더 유명한 것은 사실 그가 만든 ‘김영모 빵’이다. 김영모과자점은 올해 초 한국브랜드협회에서 선정한 고객감동브랜드 제과제빵부문 1위에 올랐다. 또 인터넷에는 ‘김영모 빵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커뮤니티가 생겨날 정도로 인기가 높다.특히 맨 처음 점포를 열었던 자리인 도곡현대비전점은 타워팰리스와 대림아크로빌의 중간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그야말로 대한민국 부유층의 입맛을 파고들고 있는 셈이다.이곳에서 유명한 유산균발효빵은 화학첨가제를 넣지 않고 천연발효를 시켜 만든다. 또 12시간 동안 모차르트 음악을 들려주면서 발효시킨 ‘모차르트 식빵’도 이 제과점의 유명세를 더하는 제품이다.그가 제빵 기능인의 길에 들어선 것은 ‘가출’에서부터 시작된다. 어려서부터 동네 빵집을 놀이터삼아 드나들었던 김사장은 고등학교 때 부친의 사업이 어려움을 겪으면서 집을 나와 빵 공장에 취직하게 된다. 유년시절의 대부분을 대구에서 보낸 김사장은 당시 대구에서 유명한 빵집에 들어가 어깨너머로 기술을 배웠다.매일 연탄가스를 맡아가며 일하다 보니 결핵이라는 중병을 얻어 좌절을 경험한 시기도 있었다. 또 결핵이 완치된 후에도 소문 때문인지 재취업에 번번이 실패하는 어려움을 겪었다.군제대 후 서울에서 다시 제과점에 취직한 김사장은 사업가보다 기술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에 밤잠을 설쳐가며 연습을 거듭했다. 그리고 막 서른을 넘긴 82년에 자신의 이름을 건 김영모과자점을 열었고, 지난 97년에는 제과제빵부문 기능장시험을 통과한 그야말로 ‘기능인’이 됐다.기능장이란 일반 기능사와 달리 최상급 숙련기능을 갖고 작업관리와 기술지도ㆍ감독, 현장훈련 등의 업무를 수행하는 사람을 뜻하는 것으로 한국산업인력공단이 주관한다.그는 또 지난 2월 대한제과협회장으로 취임했다. 업계를 대표하는 사람으로서 흔히 고급제과점 하면 호텔제과점을 떠올리는 일부 의견에 대해 한마디로 정리해주었다.“호텔베이커리 이외에 일반 제과점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뉩니다. 저처럼 즉석판매제로 운영하는 ‘윈도베이커리’와 자생적으로 프랜차이즈점을 형성한 ‘준프랜차이즈베이커리’, 그리고 대기업에서 운영하는 그야말로 ‘프랜차이즈베이커리’가 있죠.”70~80년대에는 농산물 수입에 제한이 있었기 때문에 아무래도 고급 재료를 자유로이 수입해 활용하는 일은 호텔제과업계 쪽이 유리했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요즘은 김사장처럼 이름을 걸고 빵을 만드는 윈도베이커리들이 점차 명품빵으로써 인정을 받고 있다고 자신했다.그가 점포이름을 굳이 부담을 느껴가며 김영모과자점이라고 붙인 것에서 나타나듯 새로운 임무에 대한 책임감이 이들을 더욱 분발하게 하는 요인이 된다는 것이다. 제과협회장으로서의 사명감도 드러나는 대목이다.아버지 대를 잇는 아들 ‘뿌듯’요즘 김사장은 가는 곳마다 축하인사를 톡톡히 듣고 있다. 아들 영훈씨(22) 덕분이다. 영훈씨는 지난 6월 말 스위스 상갈렌에서 37개국 70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열린 국제기능올림픽에서 제과제빵부문 동메달을 획득했다.기능장인 아버지의 뒤를 잇겠다며 13살 때 유학길에 올라 프랑스 제빵분야 명문인 리옹전문제과기술학교를 졸업했다.김영모 사장은 아들의 이번 수상을 브랜드 재정비 작업의 계기로 삼았다. 김영모과자점에서 KIMYOUNGMO&fils(피스ㆍ아들이라는 뜻의 프랑스어)로 브랜드명을 바꾸고 아들과 함께 기능인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평소 “기능인은 변화에 대한 적응이 빨라야 한다”고 이야기했던 그의 소신과 아들의 수상이 시기적으로 잘 맞아떨어졌다.“간단히 샌드위치와 음료로 식사를 대신할 수 있는 카페테리아식 공간을 새로 연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기능인들은 다소간의 ‘아집’이 있는 편이죠. 이걸 깨야 승산이 있습니다.”결국 변화가 필요하다는 공감대 형성과 함께 곧장 실천에 옮길 수 있는 실행력도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다만 변화적응에 있어 스스로 순발력이 있다고 자부하는 김사장이지만 대신 돈을 좇아서는 훌륭한 기능인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항상 돈이 모일 때마다 더 좋은 품질의 빵을 위한 새 기계 구입에 투자한다”며 “돈은 벌리는 것이지 버는 것이 아니다”고 말하는 그다. 백화점 입점 등에 눈 돌리지 않고 직영점으로만 승부를 건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백화점에 입점해 보라는 제의도 많았지만 매장수수료에 연연하다 보면 지금처럼 좋은 재료로 양질의 빵을 만드는 일에만 충실할 수는 없으리라는 계산 때문이다.앞으로 그가 가장 하고 싶어 하는 일은 ‘후진양성’이다. 우리나라는 기능인을 크게 예우해 주지 않는 편이어서 제대로 기술을 배울 만한 학교가 턱없이 부족한 게 현실이다.“전문대학을 세우는 게 꿈입니다.철저히 실습 위주 교육으로 제대로 후배를 키워보고 싶어요. 보통 프랑스에서는 15살 이전부터 배워야 최고기술자가 될 수 있다고 하는데 우리나라는 어떻게 된 일인지 대학을 졸업하고 다시 학원으로 가는 경우도 수없이 많습니다.”작은 빵집 하나를 130여명의 직원을 거느린 회사로, 그것도 서울 강남 한복판의 명소로 키워놓은 그지만 여전히 앞치마를 두르고 직원들의 움직임에 일일이 신경을 쓰며 바삐 움직이고 있다.“프랑스의 유명한 제빵인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좋은 빵과 좋은 과자를 만들려면 충분한 인생경험이 있어야 한다.”말의 의도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나도 이제부터가 시작”이라고 대답하는 김사장의 주름진 눈가 사이로 자신감 넘치는 묘한 미소가 번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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