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뇨리지

앨런 그린스펀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의 말은 언제나 세계의 주목을 끈다. 금리를 조정하는 단 하나의 수단을 갖고 있을 뿐이지만 그 수단은 너무도 강력하고 그 영향은 미국 국경을 넘어 세계 금융시장으로 파문을 그리며 번져간다.그의 생각을 읽어내기 위해 그의 연설문을 분석하고 습관이나 행동패턴까지 관찰하는, 소위 페드워처(fed watcher)라는 직업까지 있을 정도라니 영향력은 짐작할 만하다.세계 각국의 수천만 혹은 수억명을 넘어설 주식투자자들은 물론이고 초대형 기금 운용자들이나 주요 금융기관과 각국의 정부 당국자들, 나아가 수만에서 수백만의 수출업자들이 모두 그린스펀의 한마디 한마디에 귀를 기울이고 그의 말에 환호와 비명을 지르게 된다.최근 그린스펀의 미국 상하원 발언도 마찬가지였다. 한국, 중국, 일본의 정부 당국이 외환시장에 과도하게 개입하고 있다는 지적이나 국채 매입 조작을 하지 않을 방침이라는 말 한마디에 세계의 주식시장, 채권시장, 외환시장은 일대 요동을 쳤다.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던 채권가격은 급락세로 돌변했고 각국의 통화를 매매하는 외환딜러들은 순간순간의 발언에 귀를 기울이며 컴퓨터 키보드를 두드리고 시세는 날카로운 그래프를 만들어간다.그의 말이 아니더라도 아시아 각국의 외환시장 개입은 올 들어 과도할 정도임이 분명하다. 일본이 엔화가치를 낮게 가져가기 위해 수백억달러를 사들였고 한국도 아마 50억달러 이상은 시장에서 매입했을 것으로 추정된다.쏟아져 들어오는 외화로 비명을 지르고 있는 중국은 아예 크로울링 페그제라고 부르는 고정환율제를 운용하고 있으니 시장개입이며 가격조작이라는 말을 쓸 정도조차 아닌 수준이다. 미국경제의 형편을 고려하면 달러가 적당한 수준까지 떨어져야 하는데 아시아 각국이 인위적으로 달러를 사들이면서 떨어지지 않고 있다는 불만들이 구체화되고 있다.돈이야 물건과 반대방향으로 흐르는 것이고 달러가치는 물건의 방향을 거슬러 결정되는 것이지만 아시아 국가들이 계속 미국으로 상품을 실어내기 위해 의도적으로 자국의 화폐가치, 다시 말해 상품가치를 저평가 상태로 끌고 가고 있다는 말이다.실제로 달러화는 아시아로 과도하게 흐르고 있다. 일본이 5,000억달러 이상을 보유하고 있으며, 중국이 3,400억달러, 대만이 1,900억달러, 한국이 1,400억달러의 외환을 보유하고 있다.그다음이 홍콩, 싱가포르, 인도로 대부분 1,000억달러 내외의 달러를 쌓아두고 있다. 지난 1년 6개월 동안의 증가율을 보면 더욱 놀랄 만하다. 중국이 60%나 증가했고 대만이 45%, 일본이 36%, 한국이 28%나 달러보유액이 늘어났다. 상품교역에서 쌓은 것과 떨어지는 달러값을 부추기는 과정에서 시장에서 사들인 것도 무시할 수 없다.아시아 통화가치의 상승압력이 이미 뚜껑이 열릴 정도로 높아져 있는 상황이다. 그러니 그린스펀이 한마디 내놓을 만하다. 그린스펀은 특히 중국 위안화에 대해 현재의 고정환율제를 변동으로 바꾸지 않으면 결국 통화정책 자체가 한계에 봉착할 것이라는 말로 평가절상 조치를 취하도록 강력하게 요구하기도 했다.그러고 보니 최근 미국 투자자금이 그다지도 아시아시장에 물밀듯 쏟아져 들어온 것이 이해될 만도 하다. 원/달러 환율이 1,100원까지만 떨어져도 엄청난 환차익을 올릴 터이고 여기에 주가가 따라 올라주면 20~30%의 시세차익을 올리는 것은 그다지 무리도 아니라는 계산이 선다.한때(아시아 외환위기 당시)는 달러의 씨를 말리면서 이익을 내고 지금은 현지 통화의 가치를 밀어올리는 것으로 이익을 내려는 집요한 시도들이 이어지고 있다는 말도 되겠다. 이래저래 기축통화의 발권이익(seigniorage)이 이런 형태로도 나타나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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