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G형 사업 재편으로 살아나는 히타치, 디지털 외면한 미쓰비시

사업 재편에 적극적인 일본 기업들…ESG 대비는 물론 신규 성장 동력 확보도 노려

[글로벌 현장]



히타치는 일본 기업으로서는 드물게 탈석탄 사회에 대비한 사업 재편을 거의 완성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히타치카세이·히타치금속 등 소재 관련 자회사가 많은 히타치는 전자 기업 가운데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특히 많은 그룹이었다. 이 때문에 독일 지멘스와 비슷한 매출 규모에도 불구하고 시가 총액은 3분의 1에 불과했다. 글로벌 금융 시장의 주류로 떠오른 환경·사회·지배구조(ESG) 투자 자금으로부터 외면받았기 때문이다.

히타치가 사업 재편에 착수한 것은 글로벌 금융 위기 여파로 2008년 7873억 엔(약 8조3318억원)의 적자를 내면서다. 모기업과 자회사의 경영 전략이 따로 노는 것이 많다는 시장의 지적을 받아들여 22개에 달했던 상장 자회사를 정리했다. 이산화탄소 배출하는 회사 위주로 정리 11년 동안 사업 재편을 지속한 결과 히타치그룹의 상장 자회사는 현재 히타치건설기계와 히타치금속 등 2개만 남았다. 히타치금속은 매각 작업에 착수했고 히타치건설기계도 보유 지분(51%)의 절반을 팔아 자회사에서 제외할 예정이다.

히타치의 사업 재편이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은 그룹의 방향과 맞지 않는다고 판단한 모태 기업까지 모조리 정리한 과감성이다. 1906년 광산 회사로 출발한 히타치는 히타치금속·히타치카세이·히타치전선을 중심으로 성장했다.히타치카세이는 작년 4월 쇼와전공에 매각했다. 히타치전선은 히타치금속에 합병했다. 히타치금속의 매각 작업이 완료되면 ‘고산케(御三家 : 3대 핵심 기업과 인물을 가리키는 일본식 표현. 에도시대 오와리, 기슈, 미토 등 3가문이 특별 대접을 받은 역사에서 비롯됨)’로 불리던 모태 기업을 모두 정리하게 된다.

히타치의 사업 재편은 탈석탄 시대를 맞아 더 큰 주목을 받고 있다. 이산화탄소를 많이 배출하는 자회사를 집중적으로 정리했기 때문이다. 석탄 화력 발전 사업을 지난해 미쓰비시중공업에 양도한 데 이어 히타치건설기계까지 그룹에서 떼어내면 히타치의 이산화탄소 배출량은 4분의 1로 줄어든다. 미국 제너럴일렉트릭(GE)보다 적고 지멘스나 도시바와 비슷한 수준이다. 2011년 2000엔을 밑돌았던 주가는 5000엔 수준까지 회복됐다.

반면 지난해 창업 150주년을 맞은 미쓰비시그룹은 사업 재편에 소극적이었던 후유증을 앓고 있다. 미쓰비시중공업·미쓰비시상사·미쓰비시UFJ파이낸셜그룹 등 주력 상장사 21곳의 시가 총액을 모두 합해도 25조 엔 규모로 2004년 창업한 구글(알파벳)의 6분의 1에 불과하다. 삼성전자에 비해서는 절반 수준이다. 삼성전자 주가가 2004년 이후 6배 증가하는 동안 미쓰비시그룹 주력 상장사들은 제자리걸음이었다.

3대 상장사인 미쓰비시중공업·미쓰비시상사·미쓰비시UFJ파이낸셜그룹 모두 주가순자산배율(PBR)이 1배를 밑돈다. 그룹의 가치가 계열사 가치의 합에 못미치는 기업 집단 할인(conglomerate discount)에 빠지면서 주가가 만성적인 저평가 상태라는 분석이다. 컨설팅 회사인 롤랜드 베르가의 가이세 히토시 파트너는 니혼게이자이신문에 “데이터와 소프트웨어 등 무형 자산의 가치가 높아지는 시대에 미쓰비시그룹은 국방과 인프라 등 유형 자산을 중시하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분석했다.사업 재편으로 ‘탈석탄화’ 대비하는 일본제철대규모 해외 기업 인수·합병(M&A)의 후유증으로 심각한 재무 위기에 빠졌던 도시바도 사업 재편을 통해 부활을 꿈꾸고 있다. 도시바는 지난해 11월 ‘2025년까지 매출 4조 엔, 영업이익률 10%를 달성한다’는 회사 재건 계획을 발표했다. 2018년 제시한 ‘2023년 매출 4조 엔 이상, 영업이익률 8~10%’에 비해 매출 목표를 느슨하게 바꾼 대신 이익을 극대화하는 데 주력하겠다는 의도다.

도시바는 2006년 미국 원자력 발전 회사인 웨스팅하우스를 54억 달러(약 6조2000억원)에 인수했지만 대규모 손실이 발생하면서 채무 초과 상태에 빠졌다. 이 때문에 2017년 8월 주식이 도쿄 증시 1부 시장에서 2부 시장으로 강등되는 굴욕도 맛봤다.

도시바는 이후 도시바메모리를 미국 사모펀드(PEF) 운용사인 베인캐피털-SK하이닉스 연합에 매각하고 해외 원전과 건설 사업부 등 채산성이 떨어지는 사업부를 발빠르게 정리했다. 재생에너지 사업을 그룹의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선정한 것은 휘청거렸던 회사를 추스르는 데 크게 기여한 결정으로 분석된다. 일본의 재생에너지 관련 투자 규모는 앞으로 10년간 50조~80조 엔으로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일본 정부가 2050년까지 온실가스 실질 배출 양을 ‘제로(0)’로 줄여 탈석탄 사회를 실현하겠다고 밝힌 데 따른 영향이다.

시장이 급성장함에 따라 도시바의 재생에너지 사업 매출도 2019년 1900억 엔에서 2025년 3500억 엔으로 1.8배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2030년에는 6500억 엔으로 3.4배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를 위해 도시바는 2020~2022년 3년간 1600억 엔을 집중 투자할 계획이다. 2017~2019년 3년 동안 투자 규모의 5배다. 시장에서 재건 계획의 성과를 인정받은 덕분에 지난 1월 말 도시바 주식은 3년 만에 1부로 승격됐다.

일본 최대 철강 회사인 일본제철도 사업 재편을 통해 탈석탄화 물결에 대비하고 있다. 해외 생산 거점을 재편해 온실가스를 적게 배출하는 전기로 중심으로 생산 설비를 전환하는 것이 핵심이다. 일본제철은 지난해 가동 연수가 30년이 넘은 미국 인디애나 주 자동차용 강재 공장 두 곳을 미국 철강 회사인 클리블랜드클립스에 매각했다. 그 대신 미국 앨라배마 주에 아르셀로미탈과 50 대 50의 지분율로 설립한 합작 회사에 수백억 엔을 들여 새 전기로를 건설하기로 했다.

전기를 이용해 철 스크랩을 녹여 강재의 원료를 만드는 전기로는 석탄과 같은 화석 연료를 태워 철광석을 가열하는 고로보다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훨씬 적다. 전기료가 많이 드는 단점이 있지만 수요의 변동에 따라 증산과 감산을 조절하기 쉽다는 장점도 있다.

새로 전기로를 짓는 미국은 원료인 철 스크랩의 확보가 쉽고 전력 공급이 안정적이어서 최적의 입지로 평가된다. 환경 규제가 엄격한 유럽에도 유효한 선택지라는 설명이다. 일본제철은 앞으로 아르셀로미탈 합작 회사의 전기로에서 생산한 ‘친환경 철강’으로 미국의 수요에 대응할 계획이다. 미국은 도요타와 혼다가 현지 생산을 강화하는 추세여서 철강 수요가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가동 연수가 50년이 넘은 일본 내 생산 거점도 쇄신하기로 했다. 최대 고객인 일본 자동차 업체들이 생산 거점을 해외로 옮김에 따라 수요가 줄어든 일본 내 생산 시설을 축소할 계획이다. 그 대신 일본 자동차 업체들이 진출한 인도와 동남아 등 신흥국에 생산 거점을 늘리기로 했다. 최신 설비와 저렴한 가격으로 무장한 중국 철강 회사에 대응하기 위한 전략이기도 하다.

일본 철강업계는 생산 설비 노후화와 중국 경쟁사들의 약진으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이전부터 고전을 면치 못했다. 2019년 일본의 조강 생산량은 10년 만에 1억 톤을 밑돌았다. 하시모토 에이지 일본제철 사장은 “일본의 조강 생산량이 다시 1억 톤을 회복하는 것은 어렵다”며 일본 내 생산 거점을 추가 통폐합할 계획을 시사했다.

도쿄(일본)=정영효 한국경제 특파원 hugh@hankyung.com
상단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