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할 수 없다면 선제적으로’...이사회 팔 걷고 ESG 강화 경쟁

5대 그룹 모두 ESG위원회 신설하거나 역할 확대...사외이사·임원 등 ‘ESG 인재’ 수요 폭발

[스페셜 리포트]

하언태 현대차 사장은 주총에서 "ESG 강화 활동을 고객 가치 제고의 기회로 적극 활용하겠다”고 강조했다.


“탄소 중립 전략과 연계한 수소 사업 확대 등 현대차만의 환경·사회·지배구조(ESG) 경영 방식을 구축하고 ESG 강화 활동을 고객 가치 제고의 기회로 적극 활용하겠다.”

하언태 현대차 사장은 서울 양재동 사옥에서 3월 24일 개최된 제53기 정기 주주 총회에서 이 같은 포부를 밝혔다. 이날 현대차는 ESG 관련 조직의 출범을 알렸다.

기존에 운영되던 ‘투명경영위원회’를 ‘지속가능경영위원회’로 확대, 개편하기로 결정했다. 지속가능경영위원회는 ESG 정책과 계획, 주요 활동을 심의, 의결하는 역할을 맡는다.

현대차그룹 핵심 계열사인 기아와 현대모비스 역시 지속가능경영위원회를 신설하고 ESG 컨트롤 타워 임무를 부여했다. ESG 경영 이슈에 대한 신속한 의사 결정 기반을 마련하고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다.

올해 주총 시즌을 관통한 키워드 중 하나는 단연 ‘ESG’다. 현대차그룹뿐만 아니라 수많은 기업들이 올해 추총에서 최고 의사 결정 기구인 이사회에 ESG를 담당하는 조직을 앞다퉈 만들었다. ESG 경영은 이제 선택이 아닌 필수라는 말까지 나온다.

ESG 간과하면 투자자 외면받는 시대

ESG를 간과한 채 기존의 방식대로 경영하면 글로벌 시장을 움직이고 있는 투자업계에서 외면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기 때문이다. 한 재계 관계자는 “글로벌 자산 운용사들이 ESG에 기반한 투자 원칙을 잇달아 천명한 만큼 해외 매출 비율이 높은 한국 대기업들을 중심으로 ESG 강화에 속도를 내고 있다”고 분석했다.

우선 삼성그룹을 살펴보면 주요 관계사 중 삼성물산은 3월 19일 열린 주주 총회에서 이사회 거버넌스위원회를 ESG위원회로 개편했다. 삼성의 금융 계열사인 삼성생명과 삼성화재도 주총을 거쳐 이사회 내 ESG위원회를 신설했다.

삼성전자는 따로 ESG위원회를 만들지는 않았다. 그 대신 ESG 경영을 강화하기 위해 경영지원실 산하 지속가능경영사무국을 최고경영자(CEO) 직속의 ‘지속가능경영추진센터’로 격상했다. 또 각각의 사업부에도 지속가능경영사무국을 설치했다.

3월 초 주총을 앞두고 주주들에게 서한을 보내 “지속 가능한 성장을 위해 환경과 사회 가치 제고 등을 포함한 ESG 경영 본격화와 준법 경영 노력을 키우고 있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그간 ‘초일류’와 ‘초격차’ 등을 강조하던 것과 비교하면 이례적이다. 삼성전자 내부에서 ESG 경영에 대한 의지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다.

LG그룹 역시 상장된 주요 계열사 내부에 ESG위원회를 신설하기로 했다. 지주사인 (주)LG를 비롯해 LG화학·LG생활건강·LG전자·LG디스플레이·LG유플러스·LG이노텍·지투알·로보스타·헬로비전 등에 모두 ESG위원회가 생긴다. ESG위원회는 ESG 경영의 최고 심의 기구 역할을 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ESG 경영에 가장 빠르게 대응해 온 SK그룹도 올해 주총에서 지주회사인 SK(주) 산하에 인사위원회와 함께 ESG위원회를 신설했다. 앞으로 회사의 경영 전략이나 중요한 투자 관련 사항은 모두 ESG위원회의 검증을 거치도록 구조를 바꿨다.

포스코도 주총에서 최정우 회장의 연임 확정과 함께 이사회 산하에 ESG위원회를 공식 출범시켰다. 향후 기후 변화 관련 저탄소 정책과 안전·보건 등의 계획을 검토한다

이 밖에 네이버·카카오·엔씨소프트 등 정보기술(IT) 기업을 비롯해 KB·신한·하나·우리금융지주 등 주요 금융사들이 ESG위원회를 만들거나 ESG 강화 방침을 전면에 내거는 등 ESG 경영을 본격화하기 시작했다.

“여성 환경 전문가 몸값 치솟을 것”

ESG 열풍은 법관과 고위 관료 출신들이 주를 이뤘던 기업들의 사외이사 영입 분위기도 단숨에 바꿔 놓았다. 올해 열린 주총에서 주요 기업들은 전문성을 갖춘 여성 사외이사들을 대거 영입하는 모습을 보였다.

자산 2조원 이상 상장회사의 이사회를 특정 성별로만 구성하지 않도록 제한하는 자본시장법이 내년 8월 시행되는 영향도 물론 있지만 여성 사외이사의 영입이 ‘인사 다양성’ 측면에서 ESG 경영에 부합하기 때문에 이 같은 ‘여풍’ 현상이 일어났다는 해석도 나온다.

한 재계 관계자는 “바뀌는 제도에 대한 선제적인 대응 측면도 있지만 글로벌 투자사들의 기준을 충족하기 위한 행보라는 점을 결코 무시할 수 없다”고 말했다.

현대차와 기아는 처음으로 여성 사외이사를 영입했다. 현대차는 이지윤 카이스트 항공우주공학과 부교수를 감사위원이 되는 사외이사로, 기아는 조화순 연세대 정치외교학 교수를 사외이사로 각각 선임했다. 한화그룹 계열사와 LG그룹 계열사도 올해 처음으로 여성 사외이사를 영입했다.

특히 주요 기업들은 여성이면서 환경 전문가로 꼽히는 이들을 사외이사로 영입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포스코와 (주)LG를 예로 들 수 있다.

포스코는 생화학 박사인 출신인 유영숙 한국과학기술원 책임연구원을 사외이사로 영입했다. 한국에서 손꼽히는 환경 분야 전문가인 그는 여성생명과학기술포럼 회장, 과학기술정책연구소 전문위원 등을 역임했고 환경부 장관에까지 올랐다. 전문성과 고위 공직 행정 경험을 두루 갖춘 ESG 전문가로 평가 받는다.

(주)LG는 환경 분야 전문가인 이수영 에코매니지먼트홀딩스 집행임원을 사외이사로 선임했다. 환경 서비스 회사인 코오롱에코원(주)의 대표이사를 역임하기도 했다. 직전까지 임원으로 재직했던 에코매니지먼트코리아홀딩스 또한 자원 순환 관련 사업과 컨설팅을 전문으로 하는 업체다.

향후에도 더 많은 기업들이 ESG 강화에 발맞춰 여성 사외이사의 영입을 늘릴 것으로 예상된다. 이런 맥락에서 앞으로 ESG 분야에 전문성을 갖춘 여성 임원급 인재들의 몸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을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한 재계 관계자는 “여성이면서 환경 전문가인 임원급 인사를 찾기가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라며 이 같은 전망을 제기했다.
▶인터뷰
송재형 전경련 ESG TF 팀장
“ESG 열풍 꺼지지 않을 것…전문가 양성 교육 검토”


환경·사회·지배구조(ESG) 열풍에 발맞춰 주요 대기업들을 회원사로 두고 있는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내부 역시 최근 바빠졌다. 2월부터 ESG 태스크포스(TF)를 만들고 재계의 ESG 대응에 도움을 주기 위한 다양한 사업들을 구상 중이다. 주요 기업 관계자들을 만나 ESG에 대한 의견을 듣는 작업이 찬창 진행 중이다. 송재형 전경련 ESG TF 팀장을 만나 ESG 열풍에 대한 현장의 목소리와 향후 계획 등을 물었다.현재 TF는 어떤 업무를 하고 있나.
“출범 초기여서 아직은 사업 구상 단계다. ESG와 관련한 조사 연구 사업을 준비하고 있고 회원사들이 어떻게 ESG에 대응하고 있는지 실태도 파악하고 있다. ESG 관련 설문 조사를 진행하거나 관계자들을 계속 만나 목소리를 듣고 있다. 실제로 기업들이 필요로 하는 서비스가 무엇인지 발굴해 ESG 관련 사업을 추진할 예정이다.”현장의 목소리는 어떤가.
“ESG와 관련해 문제가 발생하면 평판에 큰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를 고려해 리스크 관리 차원에서 ESG에 대응하는 기업들이 많다. 한편으로는 ESG 경영을 발판 삼아 글로벌 투자자들의 투자를 늘리고 기업 가치를 제고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는 기업들도 여럿 있다. 물론 일부 부담을 느끼는 기업들도 있다. ESG를 큰 틀에서 보면 산업 안전과 환경 등 각종 분야에서 규제가 생겨나는 것이기 때문에 걱정하는 기업들도 많다. 이런 측면에서 ESG라는 기치를 내걸고 정부가 규제적으로 기업들에 지나친 부담을 주는 것은 지양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ESG 열풍이 언제까지 이어질 것으로 보나.
“글로벌 투자자들도 투자 원칙으로 ESG를 강조하고 나섰다. 그래서 자꾸 대응의 필요성이 커지는 것이다. 즉 ESG는 경영 철학이 아니라 기업이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 됐다. 또 전 세계적으로 상당히 많은 ESG 생태계가 조성되고 있다. ESG 관련 기관이나 협의체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상당히 오랜 기간 ESG 열풍이 이어질 것으로 본다.”한국에 ESG 전문가가 부족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ESG 전문가 양성에 대한 기업들의 니즈가 급격히 커졌다. 내부에서도 이를 파악하고 유관 기관인 전경련 국제경영원을 통해 ESG 관련 과정을 개설하는 방안을 현재 검토 중이다.”
김정우 기자 enyou@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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