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MGM과 동업, 할리우드 배우들에 샤넬 입혀

당시 거금 年 100만 달러 받아…美 여배우들, 극도로 절제된 샤넬 스타일 안 받아들여 동업 실패

[류서영의 명품 이야기] 샤넬⑥

트위드 자켓과 선풍을 일으킨 샤넬의 투톤 컬러 펌프스


샤넬은 모나코 북부에 있는 몬테카를로에서 옛 연인 드미트리 파블로비치 러시아 대공을 다시 만났다. ‘샤넬④’에서 소개한 바 있듯 파블로비치 대공은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의 조카로, 러시아 혁명 이후 프랑스로 망명했다. 전횡을 일삼던 그리고리 라스푸틴 암살에 가담하기도 한 그는 프랑스 망명 이후 향수 제조 전문가인 에르네스트 보를 샤넬에게 소개해 줬고 ‘샤넬 넘버 파이브(N˚5)’ 탄생의 계기가 됐다.

수줍음이 많던 그가 수년 만에 다시 샤넬 앞에 나타났을 때는 전형적인 미국인이 돼 있었다. 그는 이번에도 또 한 번 샤넬에게 중요한 한 사람을 소개해 줬다. 미국의 유명 영화 제작자이자 연출가인 새뮤얼 골드윈이다. 폴란드 태생인 그는 14세 때인 1896년 미국에 건너가 영화 산업에 뛰어들었다. 1918년 골드윈을 설립했는데, 이후 인수·합병을 통해 ‘메트로-골드윈-메이어영화사(MGM)’가 됐다. 그는 게리 쿠퍼, 루돌프 발렌티노 등 스타 배우들을 길러냈고 ‘폭풍의 언덕’, ‘공작부인’, ‘우리 생애 최고의 해’ 등 작품을 남겼다.

샤넬은 1931년 골드윈과 ‘MGM 소속 모든 배우들이 영화에 출연할 때뿐만 아니라 평소에도 샤넬 의상만 입힌다’는 내용의 계약을 했다. 계약서엔 ‘샤넬은 MGM 스튜디오 공식 패션 디자이너로서 1년에 두 번 할리우드에 체류하고 보수는 연간 100만 달러를 받는다’는 내용도 있었다. 연간 100만 달러는 당시 천문학적이라고 표현해도 될 만큼 거금이었다.

골드윈이 샤넬에게 거금을 투자하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녀는 여성 관객들을 동원하게 될 것이다. 여성 관객들은 영화뿐만 아니라 파리에서 유행하는 패션을 구경하러 극장에 몰려들 것이다.” 계약서에 사인한 뒤 샤넬은 미국 대서양 횡단에 나서 광활한 미국의 대지와 각 지역의 복식 문화를 경험하기도 했다.
1962년 샤넬


“나 자신을 팔지도 임대하지도 않는다”…샤넬 스타일 고수

두 사람의 동업은 불행하게도 실패로 끝났다. 당시만 해도 미국 여배우들은 극도로 절제된 샤넬 스타일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할리우드의 전성기를 이끈 두 톱스타인 마들렌 디트리히와 그레타 가르보를 제외한 대부분의 여배우들은 여전히 야한 색상의 화려한 깃털 목도리와 핑크빛 밍크 외투를 선호했다. 샤넬 스타일은 미국 상류층에게 다가가기엔 아직 때가 일렀다. 샤넬은 “나는 자신을 팔지도 임대하지도 않는다”고 말했다. 미국의 그런 풍토와 타협하지 않고 자신의 스타일을 고수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샤넬은 프랑스에서도 어려움을 겪었다. 그는 1935년 오트 쿠튀르 컬렉션에 출품할 많은 의상을 준비했고 그 당시 직원은 4000명에 달했다. 프랑스에서 좌익 진영의 반파시스트 데모가 한창이던 때다. 파리의 패션 1번가인 캉퐁가에서 파업이 일어났다. 반파시즘 인민전선 내각의 총리 겸 외무장관 등을 지낸 레옹 블룸이 좌익 진영을 이끌었다. 이들은 주 40시간 근로제와 실업수당 도입, 대기업 국영화, 극우파적인 연맹의 해체, 노조 권익 강화 등을 부르짖었다. 1936년 4월 26일 실시된 선거에서 좌익 진영 ‘프롱 포퓌레르’가 승리를 거뒀다. 이에 따라 “부르주아들이 공포에 덜덜 떨고 있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샤넬은 이런 사회 분위기에 대해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파업은 남자들이 하는 것이고 여직원들이 많은 캉봉가에까지 그 여파가 미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데모를 주동하는 직원들이 샤넬 양장점 쇼윈도에 ‘점거됐다’는 푯말을 붙였다. 샤넬은 경리 직원에게 이런 사정을 전해 듣고 캉봉가에 갈 수 없었다. 샤넬은 낯선 슬로건들을 들어야 했다. “지금까지의 계약 조건으로는 안 된다”, “주당 40시간에 해당하는 유급 휴가를 달라”, “노조를 인정하라”, “사회 복지 국가를 수립하자” 등등. 상당한 충격을 받은 샤넬은 발길을 돌려 리츠 호텔로 돌아왔다. 그녀가 이뤄 놓은 모든 과업이 일순간에 짓밟혀지고 있다는 생각에서다.

특히 샤넬 패션의 상징처럼 여겨지고 그가 온 힘을 다해 이뤄 놓은, 마음의 고향과 같은 캉봉가 출입이 거부된 것에 대해 견디기 힘들었다. 샤넬은 주동자 300명을 해고했고 데모는 강제 진압됐다. 이후 샤넬은 몇 가지 타협안을 제시했다. 연간 400명의 직원들이 휴가를 보낼 수 있는 방갈로를 짓고 직원들의 여행 경비와 항공료를 지급하며 연간 14일인 유급 휴가 기간을 한 달로 늘리는 등의 내용이었다. 직원들이 이를 받아들여 사태는 진정됐다.

그러나 샤넬의 암흑기는 끝나지 않았다. 독일의 프랑스 침공으로 샤넬이 머무르던 리츠 호텔은 1940년 6월 14일 나치가 접수했다. 독일인들이 모든 스위트룸을 차지하면서 샤넬은 거처를 허름한 뒷방으로 옮겨야 했다. 샤넬과 함께 리츠 호텔에 묵었던 어니스트 헤밍웨이, 스콧 피츠 제럴드, 영국의 에드워드 윈저와 그가 왕관을 버리고 선택한 윌리스 심슨 부인 등은 바하마 군도로 떠났다.

1961년 샤넬 슈트.


독일인 사귀어…레지스탕스에게 체포, 처칠이 풀어줘

샤넬에겐 새 연인이 생겼다. 당시 샤넬은 쉰아홉이었고 연인 한스 퀸터 폰 딩클라게는 열세 살 적은 마흔 여섯의 독일인이었다. 그는 파리 사교계에서 유명한 카사노바였다. 샤넬은 연인 딩클라게를 통해 비밀을 알게 됐다.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가 1943년 11월 비밀리에 스페인 마드리드로 간다는 사실이었다. 두 사람은 ‘모자 견본’이라는 작전명을 세웠다. 샤넬이 안면이 있던 처칠 총리를 만나 독일과 대화로 종전 문제를 풀어 나가자는 제안을 한다는 계획이었다. 당시 독일은 패색이 짙어 가고 있었고 처칠과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은 이미 독일에 대해 무조건 항복하라고 요구한 상황이었다.

독일 수뇌부도 이 작전에 관심을 나타냈다. 패전으로 기울어지는 상황을 평화 협상으로 돌파구를 찾을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샤넬은 마드리드로 갔지만 처칠을 만나는 데는 실패했다. 샤넬은 이미 영국 정보국의 요주의 인물로 올라 있었기 때문이다. 1944년 6월 노르망디 상륙작전 성공 뒤 연합군은 파죽지세로 파리를 해방시켰다. 레지스탕스는 독일에 협력한 사람들의 색출, 체포에 나섰고 샤넬도 이를 피하지 못했다. 레지스탕스는 샤넬을 구금했다. 하지만 처칠의 입김으로 석방됐다. 샤넬은 1944년 9월 딩클라게와 함께 스위스로 떠났다.


류서영 여주대 패션산업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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