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 물’ 된 참모 조직, 권력 게임으로 회사를 망친다[박찬희의 경영전략]
입력 2021-04-08 07:06:01
수정 2021-04-08 07:06:01
다양한 인재들이 정예 스태프와 전사적 경영의 지혜를 함께 키워야
[경영전략]정약용은 유배지에 있으면서 지방관으로 나가는 후학에게 편지를 썼다. “공손히 엎드린 아전들은 물정 모르는 수령을 낮은 소리로 비웃고 있으며 대충 껍데기만 알고 근엄한 척 행세하는 수령의 허실을 귀신같이 헤아리니 늘 자세히 묻고 상세히 배워야 농락당하지 않는다”고 당부한 내용이다.
대를 이어 지역의 일을 다뤄 온 토착 향리들 앞에 나그네처럼 몇 년 머무르다 떠나는 수령들은 꼭두각시처럼 휘둘리기 때문이다.
21세기 기업 조직의 사정도 다르지 않다. 세상 물정 모르는 경영자가 어설프게 배운 경영학 단어들만 둥둥 떠다니는 회의로 세월을 보낸다.
여기에 영합하는 기업 내시들이 궁정 정치로 권세를 키우는 사이 권력 의지는 작지만 눈치와 인내력은 탁월한 회사 공무원들은 납작 엎드려 버티며 실리를 챙긴다. 회사는 사업을 하는 곳이 아니라 권력 게임의 장이 된다. 도전과 혁신을 하는 ‘철없는’ 인재는 설 자리가 없다.
경영자가 전략을 구상하고 실천하려면 비서실과 기획실 같이 전사적 경영을 수행하는 참모 조직이 있어야 한다. 기업 조직이 제대로 작동해 구성원의 힘을 모으려면 인사팀과 관리팀의 역할이 필요하다.
나아가 기업과 경영자의 뜻을 알리고 정당성을 확보하는 홍보와 대외 협력의 중요성도 커지고 있다. 이런 지원 부문들이 전문가 집단으로서 제 역할을 하느냐, 나름의 권력 자원을 만들어 사내 정치의 생존 게임을 벌이느냐는 경영자의 손에 달려 있다.
꽉 짜인 관리 체제, 그들만의 권력
A그룹은 체계적인 관리 체제를 구축한 것으로 유명하다. 한 발 앞서 문제를 파악하고 전방위적으로 대안을 마련하는 꼼꼼한 관리, 교차 검증으로 실수나 왜곡을 차단하는 보고 체계는 세상 사람들의 동경과 두려움의 대상이다.
그런데 이런 관리 체제에 길들여진 경영자는 바보가 된다. 사업의 실제와 일하는 사람들의 사연을 모르기 때문이다.
A그룹의 숙련된 관리자들은 사고와 낭비를 막는다며 수시로 보고와 추가 설명을 요구한다. 실제 돈 버는 사람들은 관리자들에게 불려다니며 숫자 맞춘 보고서를 만드느라 날이 샌다.
이렇게 만들어 최고경영자 앞에 놓이는 깔끔한 보고서에는 관리자들이 가공한 숫자와 사례들만 들어가고 회의 발언까지도 짜맞춘다. 실제 돈 버는 사람들의 사연은 다 숨어버린다.
세상 물정 모르는 얼치기 경영학자들이나 관리 특기자들에 기생하는 사이비 전문가들은 이런 ‘체계적 경영’을 숭상하는데 교과서의 가르침이 실제로 구현되니 대견한지도 모르겠다. 인생 한방으로 갑부가 된 분들의 막무가내 경영이나 그 유사품인 주먹구구식 경영에 질려버린 반작용일 수도 있다.
이 회사의 전략 계획과 관리 통제는 사업 활동이 아니라 실세 관리자들의 권세를 키우는 수단이다. 철저한 사전 조사와 2선, 3선의 백업 마련은 회사 돈을 잔뜩 써 책임을 면하려는 일이다.
투자자·노조·시민사회·언론 등 다양한 집단의 가치와 이해관계가 대중의 정서와 맞물려 정치적 과정으로 전개되는 세상에서 몇몇 권력자와 힘센 기관들에 전방위로 밀착마크하던 방식은 통하지도 않는다.
촘촘한 관리로 현업을 옴짝달싹 못하게 틀어쥐니 특별한 사고는 보이지 않지만 ‘도전과 혁신’은 불가능하다. 가진 것을 지키며 서서히 시들어 갈 수밖에 없다.
물려받은 회사를 맘 편히 지키며 경영권을 누리려는 분들에게 A그룹의 관리 체제는 매우 매력적이다. 힘든 회사 일에서 손을 떼고 조금씩 물려주며 지배력을 유지하려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관리 체제를 이루는 영악한 월급쟁이들도 나름의 권력 자원을 만들어 생존 게임을 벌인다.
회장님과 가족들이 마음 편히 누린 흔적들은 실세 관리자들의 자리를 지켜 주는 소중한 비밀이 되고 어수룩한 아드님이 그들의 체제에 기대는 순간 대를 이은 궁정 정치가 시작된다. 정약용의 편지에 나오는 근엄한 척 행세하며 농락당하는 한심한 수령과 다를 바 없다.
바꿔 생각하면 참모 조직의 스태프들도 심란하다. 돈 벌려고 만든 회사에서 오히려 돈을 쓰기만 하는 데다 경영자 주변의 양지에만 있으니 늘 따가운 시선을 받는다. 모두가 평생 힘있는 스태프로 남아 있을 수도 없다. 그러다 보면 갖고 있는 권력 자원에 기대 생존을 위한 사내 정치를 하게 된다.
B그룹의 2세 회장님은 회사 속사정을 잘 모른다. 선대 회장님부터 일해 온 비서실장은 주요 현안을 모아 간결하게 보고한다. 물어보면 모르는 것이 없다.
사실은 현업 부서를 쥐어짜 편집한 요약본에 불과하다. 경영자가 직접 알아듣기도 어려운 현장의 둔탁한 얘기들을 묻고 답해야 일하는 사람들과 교감이 살아나고 솔직한 사정을 전략에 반영할 수 있다.
참모 조직은 핵심만 남기고 개방해야
회사 권력을 손에 쥔 참모들, 숨길 것 많은 사장들이 즐비한 어전 회의에서 적나라한 속사정을 얘기하는 사람은 없다.
창업해 직접 사람들을 키운 선대 회장과 달리 B그룹의 경영자는 사장단과 주요 임원들밖에 잘 모르니 인사 부문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전문가의 손길을 거친 체계적인 평가와 보상, 사장들의 독단과 전횡을 견제하는 후임자 육성 프로그램과 직무 감찰까지 B그룹의 인사 체제는 훌륭해 보인다.
그런데 뒤집어 보면 2세 회장님은 이 체제에 얹혀 붕 떠있는 꼴이다. 정교한 인사 체제는 그것을 만들고 운영하는 인사 부문의 권력이 된다. 심지어 각 계열사의 주요 보직들은 인사 부문의 몫으로 운영되기도 한다.
단순히 보수 책정하고 인원 배치하는 실무적인 인사 작업도 권력이 되는데 이런 막강한 체제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까. 힘없는 회사원들은 10년에 한 번도 볼일이 없는 회장님이나 힘센 참모 조직에 맥없이 불려다니다 잘리는 상사보다 실세 관리자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직접 일하는 사람들과 부대끼며 그 속사정을 알지 못하는 경영자는 허공에 뜬 존재가 되고 만다.
대주주 일가의 상속과 재산의 비밀을 쥐고 있는 재무 부문이나 사회 전반의 힘있는 사람들과 관계를 쌓아 온 홍보 및 대외 협력 부문은 더 큰 권력 자원을 갖고 있다.
C그룹은 경영권 승계 작업을 맡은 재무와 관재 부문이 아드님이 자기 힘으로 시작한 벤처 투자를 자기들 품으로 끌어들여 싹을 잘라버리더니 홍보 부문과 힘을 합해 국내외 유명 인사들과 교류하는 ‘명망가’로 띄웠다. 걱정과 허영이 많은 모친을 ‘사업의 흙탕물이 튀면 안 된다’고 설득했다고 한다.
필자는 유학 시절 학교 옆의 유명 바이오 기업을 방문하고 충격을 받았다. 지금 화폐 가치로 치면 수십조원의 매출을 올리는 회사의 재무팀에 불과 4명이 근무하고 있었다.
기획이나 마케팅도 사정은 비슷했다. 인사팀은 노무를 겸하는 변호사 1명과 비서만 있었다. 지금처럼 정보기술(IT)이 본격적으로 쓰이기도 전의 일이다. 숨길 것이 없으니 일상적 재무 업무는 은행과 회계법인이 대신하고 기획·마케팅·인사의 실무는 전문 서비스를 쓰는 편이 더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참모 조직이 소수 정예일수록 책임이 커지고 자리를 지키려는 사내 정치를 할 필요가 없다. 진짜 전문가가 되기 때문에 다른 기회들도 많아진다.
‘고인 물 참모 조직’의 폐해를 절감한 K그룹의 경영자는 사업 현장, 특히 생산-기술 분야의 인재들을 참모 조직에 참여시켜 전사적 경영의 지혜를 키우고 현업에 복귀하게 해 성과를 거둔 바 있다.
우수 인재를 지방관으로 보내 현장을 익히고 궁정에서 국가 대계를 다루게 한 것도 같은 맥락이었을 것이다. 정약용의 편지가 중앙의 권세 다툼에만 몰두해 현장에선 바보가 된 지방관을 경계한 것이라니 쉬운 일은 아닌 듯하다.
박찬희 중앙대 경영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