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 세탁기·삼성 TV·카카오톡…접근성 강화하는 이유

ESG 시대, ‘선한 영향력’이 생존 전략
음성 매뉴얼·고대비 테마·웹 접근성 강화
나이·장애·국적 상관없이 누구나 쓰기 쉽게
유니버설 디자인 새 화두로

[스페셜 리포트]

삼성전자 직원(오른쪽)이 서울 관악구 실로암 시각장애인 복지관에서 한 시각장애인에게 삼성전자 스마트TV의 접근성 기능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삼성전자


ESG가 산업계에 화두로 떠오르면서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착한 기업’에 투자가 몰리고 있다. ESG는 환경(E)·사회(S)·지배구조(G)의 영문 첫 글자를 조합한 단어로, 기업 경영에서 지속 가능성을 달성하기 위한 3가지 핵심 요소다. 지속 가능성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증대되고 기업의 역할과 책임이 중요해지면서 재무적 성과뿐만 아니라 비재무적 성과가 기업 경영의 중요한 축으로 부상했다.

ESG를 주요 투자 지표로 삼는 투자자들이 빠르게 증가하고 있고 연기금들은 ESG 요소를 중요시하는 형태로 정책을 바꾸고 있다. 과거에는 기업의 영속성과 사회적 책임은 별개라는 관점이 우세했지만 이제는 사회적 가치를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는 기업은 영속하기 힘들어졌다.

한경비즈니스는 장애인의 날(4월 20일)을 맞아 그동안 사회의 여러 요소 중 큰 관심을 받지 못했던 접근성(accessibility)에 주목했다. ESG 지표에서 장애인 접근성은 사회(S) 영역으로 분류된다. ‘가치 소비’를 중시하는 MZ세대(1980년대 초~2000년대 초 출생한 밀레니얼 세대와 1990년대 중반~2000년대 초반 출생한 Z세대) 고객의 ESG 요구 증대로 접근성을 포함한 S 영역은 앞으로 계속 강조될 것으로 보인다. 기업들이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지 살펴봤다.
美 시각장애인 고객 유튜브 보고 점자 스티커 제공한 LG
미국의 접근성 전문가인 루시 그레코(Lucy Greco)는 2021년 1월 자신의 유튜브 채널을 통해 LG전자 신형 드럼세탁기의 접근성을 비평하는 영상을 올렸다. 시각장애인인 루시 그레코는 LG전자의 드럼세탁기가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앱)으로 조작할 수 있고 사용자 평이 좋아 구입했다. 하지만 터치식의 화면과 무한으로 돌아가는 다이얼 때문에 자신과 같은 시각장애인에게는 사실상 사용이 불가능하다고 설명했다.

LG전자는 시각장애인 고객의 비평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루시 그레코에게 직접 연락해 현재 사용 중인 제품의 조작부를 읽을 수 있도록 점자로 만든 스티커를 제작해 설치하고 스티커에 표기된 점자의 의미와 간단한 조작법을 설명하는 안내문을 점자로 제작해 전달했다. LG전자 관계자는 “향후 장애인 접근성을 높인 LG전자 제품에 대해 검토해 보고 의견을 나누는 프로젝트를 루시 그레코와 함께 진행하기로 했다”며 “LG전자는 시각장애인을 위해 특화된 음성 매뉴얼을 제작해 스마트 가전을 관리하는 LG 씽큐(LG ThinQ) 앱에 적용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LG전자는 루시 그레코 비평을 계기로 자사 가전제품을 누구나 쉽게 쓸 수 있도록 고객 접근성 강화에 나섰다. 한국에서도 원보디 세탁건조기 ‘트롬 워시타워’를 이용하는 시각장애인을 위해 음성 매뉴얼을 도입했다. 이 매뉴얼은 사용자가 직접 제품을 만지면서 도어를 여는 방향, 조작부나 버튼 위치를 쉽게 연상할 수 있도록 음성으로 설명한다. 전원 버튼이나 세탁·건조 선택 버튼을 누르면 제품의 작동 상황별 소리도 함께 안내한다. 또 시각장애인이 제품 조작부를 읽을 수 있도록 점자로 만든 스티커도 제공했다.

LG전자는 한국장애인소비자연합과 함께 트롬 워시타워를 시작으로 물걸레 로봇청소기 코드 제로 M9 씽큐, 디오스 식기세척기 스팀 등 제품 전반에 음성 매뉴얼과 점자 스티커 등을 확대하고 있다.

워시타워 곳곳에서 LG전자의 접근성 향상 노력을 엿볼 수 있다. 워시타워는 별도의 받침대를 사용하지 않아도 누구나 손쉽게 세탁물을 넣고 빼거나 손쉽게 관리할 수 있도록 제품 높이를 약 87mm 낮췄다. 키와 상관없이 누구나 도어를 쉽게 열도록 상단부 건조기에 듀얼 포켓 도어 손잡이를 설치했고 도어 아래쪽에도 손잡이를 설치한 것이 특징이다. 유니버설 디자인(universal design) 적용에도 적극적이다.

유니버설 디자인은 성별·연령·국적·문화적 배경·장애 유무와 상관없이 누구나 손쉽게 쓸 수 있는 제품과 사용 환경을 설계하는 것을 뜻한다. 과거에는 장애인과 노인을 고려하는 디자인이라는 인식이 강했지만 최근에는 모두를 위한 디자인, 보편적 디자인으로 통용되고 있다. 세탁기와 건조기를 하나로 합쳐 조작하기 쉽게 만든 워시타워, 냉장고 문이 자동으로 열리는 시그니처 냉장고 등에 유니버설 디자인이 적용됐다.

LG전자는 시각장애인을 위한 전용 휴대전화를 꾸준히 출시해 왔다. 2006년부터는 LG상남도서관과 함께 문자 내용이나 메뉴 기능을 음성으로 읽어 주는 기능을 탑재한 시각장애인 전용 휴대전화 보급 사업을 펼쳐 왔다.


미국의 접근성 전문가인 루시 그레코가 LG전자 드럼세탁기에 대해 비평하고 있다. /루시 그레코 유튜브

삼성전자도 접근성 분야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삼성전자는 장애인과 비장애인, 젊은 세대부터 노약자까지 누구나 스마트 기기와 관련한 서비스를 공평하게 누릴 수 있도록 접근성을 높여 나가고 있다. 대표적으로 갤럭시 스마트폰에 제공하는 ‘고대비 테마’는 시력이 낮은 사용자가 스마트폰의 정보를 더 정확하게 알 수 있게 해준다.

갤럭시 노트에 탑재된 S펜은 비장애인에게도 유용하지만 청각장애인이 화면에 글씨를 써서 필담으로 상대방과 대화를 나눌 때도 편리하다. 인공지능(AI) 기술을 접목한 빅스비는 스마트 기기의 다양한 기능을 실행할 수 있게 해준다. 특히 원(One) 사용자 인터페이스(UI)는 사용자가 여러 번 조작하지 않고 스마트폰을 쉽게 사용할 수 있어 누구에게나 직관적인 사용 경험을 제공한다.

삼성전자는 2016년부터 삼성 서포터즈를 운영하며 장애인 사용자들과 긴밀한 소통을 이어 가고 있다. 다양한 피드백을 제품에 반영해 갤럭시 스마트폰의 접근성을 높여 가고 있는 것이다. 스페인 장애인 지원 단체인 원스 재단은 2017년 삼성전자의 스마트폰 갤럭시 S8을 ‘장애인이 사용하기 좋은 스마트폰’으로 선정하기도 했다. TV에서도 2014년부터 꾸준히 접근성 기술을 개발해 선보이고 있다. 모든 사람이 동일하게 삼성 TV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사람 중심 기술을 강조한 ‘스크린 포 올(screens for all)’ 비전에 따른 것이다.

삼성전자는 TV 생산 과정에서 탄소 저감뿐만 아니라 제품 수명 주기 전반에 걸쳐 자원 순환이 이뤄질 수 있도록 하는 친환경 정책과 청각이 불편한 소비자들을 위한 자동 수어 확대 기능, 시각이 불편한 색각 이상자들을 위한 색 보정 앱 등 다양한 접근성 기능을 제품에 대거 적용했다. 접근성 기능을 강화한 삼성전자의 스마트 TV는 2020년 영국 왕립 시각장애인협회로부터 최초로 시각장애인 접근성 인증을 받았다.


카카오톡 화면 /한국경제신문



정보기술(IT) 기업들도 접근성 향상을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카카오는 국민 메신저 ‘카카오톡’에 저시력 장애인을 위한 고대비 테마를 제공하고 있다. 최대 21 대 1의 명도 대비를 적용해 저시력 장애인이 글자에 더 집중할 수 있도록 편의성을 높였다. 또한 저시력 장애인이 색상만으로 사물을 구분하기 어려운 점을 감안해 채팅 말풍선을 명확하게 하는 등 콘텐츠의 가독성을 높인 것이 특징이다.

이 밖에 이미지 또는 동영상 발송 시 저장된 파일의 날짜와 시간을 음성으로 읽어주 고 ‘사진이 선택됨’, ‘즐겨찾기가 해제됨’ 등 사용자의 행동에 대해 음성으로 안내하는 기능도 제공한다. PC 버전 카카오톡에는 접근성 스크린리더(화면 낭독)를 지원한다. 현재 시각장애인이 PC에서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메신저는 카카오톡과 네이트온 구버전밖에 없다.

카카오톡의 접근성 기능 도입으로 서로 다른 장애를 가진 사람들끼리 소통이 어려웠던 과거에 비해 현재는 카카오톡을 이용한 시각장애인과 청각장애인 간의 일상적인 소통이 가능해졌다. 카카오 관계자는 “카카오톡의 주요 기능을 업데이트할 때 접근성 QA(Quality Assurance)와 모니터링 과정을 거쳐 시각장애인들이 문제없이 사용할 수 있는지 검수하는 절차를 두고 있다”고 설명했다.

카카오의 인터넷 전문은행인 카카오뱅크도 접근성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다. 앱에서 음성 지원으로 예금 조회와 이체 등 기본적인 금융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는데 서비스 기획 단계에서부터 장애인과 고령자 등을 고려해 디자인하고 개발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설명이다.


네이버 사옥에서 한 직원이 전맹 시각 장애인의 웹 접근성을 체험하는 모습. /네이버


네이버는 QR 코드 기반의 전자 출입 명부 시스템인 ‘QR 체크인’을 네이버 모바일 첫 화면에 배치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식당이나 특정 시설 이용과 방문 시 QR 코드 인증을 받고 있는데 시각장애인들도 편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웹 접근성 표준에 맞춰 해당 기능을 개선한 것이다.

네이버는 어떤 장애에도 구애받지 않고 손쉽게 정보를 공유할 수 있어야 한다는 웹의 기본 정신을 지키기 위해 ‘널리(NULI)’라는 접근성 체험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다. 웹 접근성 관점에서 시각장애인, 전맹 시각 장애, 손 운동장애 , 중증 운동 장애인이 어떻게 하면 웹을 조금 더 편하게 사용할 수 있을지 고민하며 네이버 본사인 그린팩토리 도서관 2층에 웹 접근성 체험 부스를 설치해 놓았다. 네이버는 접근성을 지속적으로 높이기 위해 전맹·저시력 시각장애인 전문 테스트 엔지니어와 함께 접근성 세미나도 매년 열고 있다.


그래픽=전어진 기자
접근성 놓치면 리스크 부메랑 된다
그동안 기업의 장애인 관련 활동은 사회 공헌(CSR) 측면에서 많이 다뤄졌지만 ESG 시대가 본격화하면서 접근성에 공을 들이는 등 적극적으로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방향으로 변화하는 추세다. 기업들의 접근성 노력이 필요한 이유는 장애인도 제품과 서비스를 구매하는 고객이기 때문이다. 또한 삼성전자·LG전자·네이버·카카오 등 세계인 대상으로 하는 글로벌 기업들에는 제품이나 서비스에 유니버설 디자인과 접근성을 반영하는 것이 기업의 이미지를 높이고 더 많은 고객을 확보하기 위한 필수 전략으로 부각되고 있다.

접근성을 연구해 온 이성일 성균관대 시스템경영공학과 교수는 장애인 접근성을 제품이나 서비스에 구현하지 못하는 기업들은 향후 고객 확보에 어려움을 겪는 등 리스크로 작용할 수 있다고 봤다. 이 교수는 “고령화 때문에 장애를 갖게 되는 인구가 많아질 것이므로 기업의 고객 확보에 한계가 생길 것”이라며 “장애인차별금지법 등으로 인해 기업이 접근성을 제대로 반영하지 않으면 장애인 단체 등으로부터 소송을 당할 수도 있고 기업이나 브랜드 평판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장애인에 대한 선입견을 없애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기업이 시각장애인을 위한다고 제품에 점자를 붙이는 경우가 많은데 점자를 읽을 수 있는 시각장애인은 전체에서 10%가 채 되지 않는다. 또 청각장애인은 수어를 메인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한글로 된 정보를 주면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한글로 된 제품 사용 설명서를 만든다면 수어를 사용하는 청각장애인에게 한글이 제2외국어나 다름없을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모든 시각장애인은 점자를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청각장애인이 귀만 안 들리고 눈으로 보고 읽는 것은 비장애인과 똑같을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선입견”이라며 “장애인들에 대해 가지고 있는 스테레오타입을 극복해야 더 많은 장애인을 고객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안옥희 기자 ahnoh05@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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