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들 스티치’ 기법, ‘명품 에르메스’ 탄생 원동력[명품 이야기]
입력 2021-05-02 06:17:01
수정 2021-05-02 06:17:01
마구 용품 제조에서 출발, 나폴레옹 3세 등 왕족 주요 고객…여행용품·패션으로 영역 넓혀
[류서영의 명품 이야기] 에르메스①명품에도 등급이 있다. 에르메스는 명품 중 최고 상위에 올라 있다는 데 이견을 다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에르메스는 루이비통과 샤넬 등 다른 명품들과 같이 19세기에 탄생했다는 점은 비슷하다. 루이비통이나 샤넬과 다른 점은 창업자의 후손들이 오늘날까지 에르메스를 지켜 왔다는 것이다.
에르메스의 창업자는 티에리 에르메스다. 그는 프랑스인 아버지와 독일인 어머니 사이에서 1801년 프로이센 왕국의 크레펠트 지역에서 태어났다. 프로이센은 19세기 후반 독일 통일의 주축이 된다. 하지만 에르메스가 태어날 시기엔 나폴레옹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에르메스의 부모는 숙박업을 했다. 에르메스는 15세 때 전쟁과 병으로 부모를 잃었다는 설과 부모와 함께 프랑스 파리로 갔다는 설이 있다. 파리로 간 이유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고 시점도 21세 때인지, 28세 때인지 의견이 분분하다.
패션 명품 브랜드의 대명사가 된 에르메스는 말 안장 등 마구 용품을 만드는 데서 출발했다. 가죽 용품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섬세하고 튼튼한 박음질이다. 이 박음질이 마구 용품을 만드는 데서 시작된 것이다. 안장을 만드는 데 필요한 전통 수공 박음질 기술을 ‘새들 스티치(saddle stitch)’라고 한다(사진 참조). 또 가죽 제품에선 잘라진 단면을 광택으로 처리하는 기술도 매우 중요한데 이 또한 마구 용품을 만드는 기술에서 비롯됐다.
‘새들 스티치’, 말안장 만드는 전통 수공 박음질 ‘튼튼’
새들 스티치는 밀랍을 입힌 하나의 실로 시작한다. 실 양쪽 끝을 바늘에 꿰어 두 개의 바늘을 이용해 겹쳐진 두 장의 가죽을 손으로 꿰매는 박음질로, 하나의 실이 끊어지더라도 다른 하나의 실이 남아 있는 튼튼한 기법이다. 새들 스티치는 에르메스의 말안장 제품에서 시작해 가방·벨트·장갑·시곗줄 장식 등 제품 전반에 사용해 에르메스를 상징하는 하나가 됐다.
에르메스 백이 고가로 인정받는 이유 중 하나가 이 새들 스티치를 꼼꼼하게 수작업으로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버킨백’은 한 명의 장인이 1주일에 두 개도 채 만들지 못한다. 에르메스 백이 최고가의 명품으로 자리잡은 데는 이 ‘새들 스티치’가 한몫 톡톡히 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대 티에리 에르메스(1801~1878년)가 1837년 파리 마들렌 광장 바스 듀 롬프르 56번가에 낸 마구 용품점은 시작이 괜찮았다. 그는 특유의 성실함과 최고의 품질을 향한 헌신과 청렴함이 몸에 배어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빠른 시간에 유명해질 수 있었다. 그는 주요 교통수단인 마차를 끄는 말에 필요한 도구·안장·장식품을 직접 손으로 만들었다. 그가 만든 말의 어깨에 매는 줄을 보면 말의 목에 줄을 정확하게 맞도록 하기 위해 수없이 노력한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당시 파리엔 근대화의 바람이 불어왔다. 그는 이런 기류에 맞게 가볍고 실용적인 마구 용품을 열망하는 고객들의 바람을 잘 읽고 대비했다. 그의 마구 용품은 섬세하고 정밀했으며 모든 면에서 빈틈 없는 내구성을 갖추고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런 기술력을 바탕으로 1867년 파리에서 열린 만국 박람회에서 티에리 에르메스는 자신이 만든 마구 용품으로 참가해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에르메스 마구 용품의 우수한 품질과 견고함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았고 나폴레옹 3세와 왕족들이 에르메스의 주요 고객이 되는 계기가 됐다.
티에리 에르메스가 세상을 뜨자 아들 샤를 에밀 에르메스가 2대 가업을 승계했다. 부친이 일궈 놓은 전통과 장인 정신을 이어받았다. 그는 우수한 장인 솜씨로 품질을 인정받았고 만국 박람회에서 아버지에 이어 다시 한번 1등상을 받았다. 1880년 엘리제궁 주변에 있는 파리 포부르 생토노레 24번가에 새로운 마구 용품 매장을 여는 것을 신호탄으로 본격적으로 사업 확장에 나섰다.
생토노레 24번가는 마구 용품점뿐만 아니라 고급 양장점 등이 모여 있어 당시 부유한 고객들이 자주 찾는 곳이었다. 에르메스는 프랑스는 물론 유럽을 비롯한 전 세계 왕실과 귀족들에게 마구 용품을 공급했다. 당시 산업혁명으로 산업화·도시화가 진전되면서 마차의 수가 급격하게 늘어났고 에르메스의 사업도 번창했다.
1918년 자동차의 출현은 에르메스의 역사에 또 하나의 분기점이 됐다. 티에리 에르메스의 손자인 에밀 에르메스(3대)는 교통 수단의 변화를 예측하고 여행업이 성장할 것이라고 확신한 것이다. 마구 용품을 만드는 것에서 출발한 에르메스는 여행 용품과 패션 액세서리인 벨트·장갑·가방·의류 사업으로 뻗어 나가는 대대적 변화를 맞게 됐다.
지퍼, 특허 내고 독점권 얻어 에르메스 가방에 사용
에밀 에르메스는 1차 세계대전 중 미국을 방문했을 때 지퍼를 보고 들여와 당시 프랑스 내 지퍼 사용에 대한 특허를 내고 독점권을 행사했다. 또 캐나다 여행 중 군용 차량 후드의 미국식 개폐 장치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1922년 지퍼를 에르메스 백에 폭넓게 사용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부터 현대적 여행 스타일에 걸맞은 소품들을 본격적으로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그는 ‘새들 스티치’ 박음질 기법을 그대로 이용한 최고 품질의 가죽 제품과 여행용 가방을 선보였다. 에밀 에르메스의 관심과 취향은 다양했다. 그는 평생 방대한 양의 예술 작품과 책·오브제·희귀 물품들을 즐겨 모으는 수집가였다. 그의 컬렉션들은 지금까지도 에르메스 제품 제작에 영감을 주고 있다.
에르메스의 로고(사진 참조)는 프랑스의 화가인 알프레드 드 드뢰의 19세기 석판화에서 그 형태를 따 왔다. 그 석판화의 원 그림은 에르메스 3대 회장인 에밀 에르메스가 1923년 소장한 컬렉션의 일부였다. 현재 에르메스 박물관에 전시돼 있는 이 사륜마차는 ‘뒤크’라고 알려져 있는 고급 마차로 탑승자가 직접 두 마리의 말을 몰고 있다.
이는 에르메스와 그 고객과의 관계를 잘 그려내고 있다. 에르메스는 우아한 마차, 새롭게 단장한 말과 빛나는 마구를 제공하지만 마부는 없다. 마부석은 바로 고삐를 쥘 고객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1945년 법률적으로 트레이드 마크가 됨으로써 에르메스를 대표하는 로고가 됐다.
류서영 여주대 패션산업과 교수
사진·자료=herme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