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한진해운 파산 여파, 당시 선복량 회복 못해…해외 선사 의존 높고 단기 계약 중심
[비즈니스 포커스]지난해부터 지속된 ‘수출 대란’이 좀처럼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팬데믹(세계적 유행)으로 주춤했던 해상 물동량이 다시 회복됐지만 선사들이 시행한 감축 운항의 영향을 받아 여전히 배는 모자란다. 이 때문에 컨테이너 운임은 연일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다. 여기에 지난 3월 23일 이집트의 수에즈운하에서 발생한 통항 중단 사태의 여파로 ‘수출 대란’이 더 심해지고 있다.
배편을 구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는 기업들을 위해 국적 선사들이 지난해부터 임시 선박 투입으로 화주들을 지원하고 있다. 긴 불황의 터널을 겪어 왔던 해운업계도 덩달아 바빠졌다. 하지만 ‘수출 대란’의 진짜 원인을 짚지 못한다면 해운업계와 화주 모두 또 어려움에 부닥칠 수 있다. 임시 선박 투입해도 계속된 수출 대란 HMM이 5월 2일 투입한 임시 선박은 무려 21척째다. 부산신항 HPNT에서 출항 예정인 5000TEU급 컨테이너선 ‘HMM 프레스티지호’는 한국 수출 기업의 화물을 싣고 5월 2일 부산을 출발해 5월 13일 미국 로스앤젤레스(LA)항에 도착한다. ‘프레스티지호’는 4200TEU의 화물을 실었고 그중 60%는 한국 중소 화주의 물량으로 채웠다.
‘수출 대란’이 본격화되면서 HMM은 임시 선박을 계속해 투입해 왔다. 지난해 8월부터 현재까지 미주 서안(LA) 12회, 미주 동안(서배너·뉴욕) 3회, 러시아 3회, 유럽 2회, 베트남 1회 등 총 21척의 임시 선박을 투입했다. 4월 15일 청와대에서 열린 확대 경제장관 회의 기업인 초청 자리에서 배재훈 HMM 사장은 “중소기업 수출 화물의 원활한 선적을 위해 앞으로도 임시 선박을 추가 투입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역시 지난해부터 임시 선박을 투입해 온 SM상선도 5월 말 또 선박을 투입할 계획이다. 주력 노선인 미주 노선에 지속적으로 추가 선박을 투입할 예정이다.
선사들이 임시 선박을 투입하고 있지만 ‘수출 대란’의 여파로 운임이 연일 치솟고 있다. 4월 30일 기준 컨테이너 운송 15개 항로의 운임을 종합한 상하이컨테이너운임지수(SCFI)는 3100.74로 지난주(4월 23일) 2979.76보다 120.98포인트 올랐다. SCFI가 집계를 시작한 2009년 10월 이후 3000선을 돌파한 것은 처음이다.
특히 한국 기업들의 주요 수출 경로인 아시아~미주 노선의 운임 상승세가 가파르다. 아시아~미주 서안은 FEU(40피트 컨테이너 1개)당 5023달러를 기록했다. 미주 서안의 운임이 5000달러를 넘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아시아~미주 동안도 FEU당 6419달러를 기록했다.
운임이 가파르게 오르며 선사들의 실적도 큰 폭으로 개선될 것이란 전망이 나오고 있다. ‘운임’은 선사의 실적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요소다. 한국투자증권은 HMM이 1분기 9000억원이 넘는 사상 최대 영업이익을 달성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특히 운임 상승이 일시적 기조가 아니라 장기화 체제에 돌입하면서 향후 실적 개선에 대한 기대가 더욱 높아지고 있다.
최고운 한국투자증권 애널리스트는 “한 달 전만 해도 1분기 운임 강세는 코로나19에 따른 일시적 현상이라고 평가받았는데 3월 잠깐의 조정을 뒤로하고 다시 반등하며 피크아웃에 대한 우려를 뛰어넘었다”고 분석했다. 수에즈운하 사고의 영향으로 해석하기에는 거리가 먼 미주 항로의 운임 상승세가 가팔라 인과 관계가 다소 떨어진다는 분석이다.
장기 운송 계약 비율 높여야 안정적 운영 가능 해운업계는 이러한 상황이 ‘격세지감’처럼 여겨진다. 2008년 리먼브라더스 사태 이후 촉발된 글로벌 경기 침체 이후 해운업계는 줄곧 불황에 시달려 왔다. 2010년대 들어 글로벌 대형 선사들이 초대형급 선박을 투입해 공급을 늘리면서 운임이 하락했다. 한국 해운업은 이러한 불황의 직격탄을 맞았다. 급기야 2016년 한진해운이 파산했고 HMM(구 현대상선)은 2011년부터 9년간 적자를 지속해 왔다.
불황이 깊어지면서 해운업계는 같은 얼라이언스에 속한 선사들끼리 같은 노선을 운항하고 서로 선박을 공유하며 화물을 채웠다. 노선을 차별화하기가 어려워지면서 한국 선사들은 외국 선사들과의 경쟁에 어려움을 겪었다. 당시만 해도 한국 선사들이 초대형선 발주에 뒤처졌기 때문에 경쟁은 더욱 힘겨웠다. 더구나 한진해운의 파산으로 인해 한국 해운 산업이 글로벌 시장에서 신뢰를 잃자 얼라이언스에 참여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불황이 해운산업을 덮치며 선사들이 매달리는 것은 타사보다 저렴한 운임이었다. 해운업계 관계자는 “컨테이너 운송 서비스는 상대적으로 회사 간 서비스의 차별성이 크지 않아 운임이 큰 영향을 미친다”며 운송 기간, 고객 지원 서비스, 전산 편의성 등의 요소도 고려하지만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하는 것은 ‘운임’이라고 말했다. 운임을 더 지불하면 화물을 우선적으로 선적해 줌으로써 선복을 보장하는 서비스 등을 시행하는 선사들도 있었다. 하지만 저운임 경쟁은 선사들에겐 손해로 돌아오기 마련이다.
최근 발생한 ‘수출 대란’도 한국 해운이 그간 겪어 온 부침과 무관하지 않다. 이번 수출 대란은 한진해운 파산의 여파라는 것이다. 김인현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HMM이 초대형 선박을 발주했지만 아직까지 한진해운이 보유하던 선복량을 회복하지는 못 했다”며 “한진해운의 파산에 따른 60만TEU의 선복 감소가 전 세계적으로 선복 부족을 낳았을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물론 해운 산업은 전 세계 국가를 연결하기 때문에 한국 선사가 외국을 기항하고 외국 선사들도 한국에서 활동하는 것은 당연하다. 실제로 한국 선사들의 연간 매출 35조원 중 절반은 3국 간 운송에서 발생한다. 시장의 논리에 따라 선사가 자국 화주들의 화물을 최우선으로 실어나를 필요는 없다.
하지만 이번처럼 ‘수출 대란’이 발생하면 운송 주권을 고려해야 한다. 김인현 교수는 “자국의 수출입 화물을 안정적으로 실어날라야 경쟁력이 생긴다”며 “컨테이너 박스를 한국은 만들지 못하고 중국에 100% 의존하는 것은 결국 운송 주권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또 지금은 미주 노선의 20%만을 우리 선사가 실어나르는데 50% 수준으로 끌어올려야만 운송 주권을 가진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수출 대란’은 언제까지 지속될까. 시장에서는 일시적인 V자 반등으로 그리 오래가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대책은 필요하다. 핵심은 장기 운송 계약을 늘리는 것이다.
김인현 교수는 “한국 해운 시장에서 장기 운송 계약보다 스폿(단기 계약) 물량이 많다는 것이 문제”라며 “장기 운송 계약이 더 많이 체결된다면 정기 선사는 더 많은 선복과 컨테이너 박스를 확보할 수 있고 스폿 계약을 하던 화주들도 더 낮은 운임에 안정적 운송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현재 한국 선사들은 장기 운송 계약의 비율이 50%를 차지하는데 일본과 같은 80% 수준으로 끌어올려야 한다는 것이다. 또 물량이 많지 않은 화주들도 연합체를 구성해 장기 운송 계약을 해야 한다.
해운업계 관계자는 “국적 선사들은 10년 가까이 장기 불황을 지나왔고 그 과정에 한진해운이 파산하는 등 많은 시련을 겪었다”며 “국적 선사에 책임만 요구할 것이 아니라 향후 시장 상황이 바뀌어 선사가 어려울 때는 화주가 선사를 도울 수 있는 제도 또는 상생의 모델 확립이 선행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명지 기자 mj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