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억 명 아바타 붐비는 ‘제페토 월드’…글로벌 Z세대를 사로잡다
입력 2021-06-14 06:20:04
수정 2021-06-14 10:57:46
‘아시아의 로블록스’로 급성장, 90%가 해외 이용자…케이팝 팬미팅 열리고 명품 브랜드도 입점
[스페셜 리포트]2019년 네이버를 창업한 이해진 글로벌투자책임자(GIO)는 “네이버 안에서 네이버보다 더 큰 기업이 나와 네이버가 잊히길 바란다”고 말했다. 약 2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 네이버의 ‘자식들’은 메신저·콘텐츠·클라우드 등 다양한 영역에 진출해 성장하고 있다.
최근 ‘네이버보다 더 큰 회사’로의 가능성이 높게 점쳐지는 곳으로 제페토를 운영 중인 네이버Z를 꼽는 이들이 많아졌다. 이는 메타버스 플랫폼 제페토가 가진 잠재력 덕분이다. 첫째, 제페토는 한국보다 해외에서 더 영향력이 높다. 둘째, 다양한 산업군과의 제휴가 가능하다. 마지막으로 향후 소비 시장을 이끌어 갈 Z세대(1990년대 중반~2000년대 초반에 태어난 젊은 세대)를 주요 고객으로 확보하고 있다.
아시아의 로블록스 ‘제페토’ 메타버스는 아바타를 통해 가상현실(VR) 세계를 체험하는 서비스다. 가상을 뜻하는 ‘메타(meta)’와 현실 세계를 의미하는 ‘유니버스(universe)’의 합성어다.
2000년대 들어 메타버스는 게임을 위주로 성장하다가 스마트폰의 보급으로 잠시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에 자리를 내줬다. 잊혀 가던 메타버스가 각광받기 시작한 것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유행)으로 인한 비대면 트렌드 덕분이다. 만날 수는 없지만 여전히 남아 있는 대면 욕구를 해결할 수 있는 수단으로 메타버스가 떠올랐다.
비즈니스에 제동이 걸린 기업들도 메타버스를 통해 다양한 마케팅을 시도했다. 공연, 설명회, 신입 사원 환영회 등 대규모 행사가 메타버스로 옮겨 왔다. 주목받고 있는 글로벌 메타버스 플랫폼으로는 ‘로블록스’와 ‘파티로얄’ 등을 꼽을 수 있다. 로블록스는 지난 3월 미국 나스닥에 상장하기도 했다.
‘아시아의 로블록스’라고 불리며 급격히 성장한 것이 네이버의 제페토다. 제페토는 2018년 8월, 전 세계 165개국에 출시한 글로벌 증강현실(AR) 아바타 플랫폼으로 지난해 12월 기준 글로벌 가입자 2억 명을 기록하고 있다. 해외 이용자의 비율이 90%, 10대 이용자의 비율은 80%다.
제페토가 전환점을 맞이한 것은 2020년이다. 그해 5월 제페토를 운영하는 네이버Z가 스노우에서 물적 분할로 분사했다. 그 후 제페토는 하이브(구 빅히트엔터테인먼트)에서 70억원, YG엔터테인먼트와 JYP엔터테인먼트에서 각각 50억원씩을 투자받았다.
해외 메타버스 플랫폼인 로블록스와 파티로얄이 게임에 기반을 뒀다면 제페토는 케이팝과 패션 위주로 성장했다는 차이점이 있다. 지난해 9월 YG엔터테인먼트의 걸그룹 블랙핑크가 제페토에서 팬 사인회를 열었고 올해 2월에는 JYP엔터테인먼트의 걸그룹 있지(ITZY)도 팬미팅을 열었다. 코로나19 상황에서 대면 공연과 팬 사인회 등 팬덤을 집결시킬 이벤트 개최가 어려워지자 엔터테인먼트 회사들이 대안으로 택한 무대가 바로 메타버스 플랫폼이었다.
유통사들도 마케팅 수단으로 제페토 입점을 서두른다. 지난 5월 25일 편의점 CU를 운영하는 BGF리테일과 제페토가 업무 협약을 맺었다. 양 사의 업무 협약식도 제페토를 통해 진행됐는데 이건준 BGF리테일 대표와 김대욱 네이버제트 대표가 각자 모습을 본뜬 아바타로 등장했다. BGF리테일은 오는 8월 제페토 내 맵인 한강공원에 개방형 옥상 형티의 ‘CU제페토한강공원점’을 개점한다. 게임 이용자들은 매장 테라스에 있는 파라솔과 테이블 등을 이용해 실제 점포에서처럼 원두 커피 기기에서 커피를 내리거나 즉석 조리 라면 등을 먹을 수 있다. 아바타가 노래와 춤 등의 공연을 하고 무대를 관람할 수 있는 버스킹 공간도 마련된다.
명품 브랜드들도 제페토를 찾고 있다. 구찌와 크리스찬 루부탱과 같은 글로벌 패션 브랜드들이 제페토 내에서 신상품을 홍보하는 것은 상당히 고무적이다. 제페토는 지난 2월부터 구찌와 손잡고 60여 종의 구찌 의상·신발·가방 등을 공개했다. 현실에서 구찌 가방을 사려면 최소 300만~400만원이 필요하지만 제페토 내에서는 1만원만 지불하면 머리부터 발 끝까지 구찌의 아이템으로 꾸밀 수 있다.
명품 브랜드의 제페토 입점은 제페토가 구매 의사가 높은 이용자 층인 10대 후반 여성 이용자 층을 확보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네이버 관계자는 “제페토는 글로벌 Z세대들이 모여 있는 대표적인 메타버스 플랫폼으로 럭셔리 명품 브랜드는 제페토와의 협업을 통해 힙한 라이프스타일을 추구하는 1020 글로벌 유저들과의 스킨십을 확대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특히 최근 명품 브랜드를 구매하는 연령대가 점차 낮아진다는 점에서 Z세대를 향한 효과적인 마케팅 방법으로 제페토가 쓰인다는 분석이다.
제페토에 집결한 글로벌 힙스터들 제페토는 어떻게 글로벌 틴에이저를 사로잡았을까. 누구보다 또래 집단 형성에 목말라 있지만 아바타라는 ‘부캐’를 통해 교류할 수 있는 방식이 Z세대에게 통한 것으로 보인다.
제페토는 얼굴 인식, AR 3D 기술이 활용돼 직접 커스터마이징한 자신만의 아바타로 가상 공간에서 타 이용자들과 함께 게임과 액티비티 요소를 즐길 수 있다. 3D 월드 맵에서 전 세계 친구를 만나고 다양한 포즈와 콘셉트의 포토 부스, 케이팝 댄스나 각종 제스처를 즐길 수 있는 비디오 부스를 이용한다. 또 이러한 콘텐츠를 자신의 피드에 업로드하고 친구들과 소통하는 ‘소셜 활동’도 가능하다. 자신의 자아를 표현하는 기존 SNS와 달리 현실의 자신과는 전혀 동떨어진 캐릭터로 타인과 소통할 수 있다.
제페토는 인스타그램·페이스북과 겨룰 수 있는 SNS의 요건을 갖췄다. 제페토 내에서 만들어진 콘텐츠는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처럼 내 아바타의 페이지에 업로드할 수 있다. 오프라인에서 알고 지내던 친구나 제페토 월드에서 사귄 친구들에게 이를 공유하기도 한다. 다른 아바타의 페이지를 방문해 그의 직업과 국적 등 프로필을 읽고 그가 올린 콘텐츠에 ‘좋아요’를 남길 수도 있다.
이는 로블록스·파티로얄과 가장 구별되는 점이다. 네이버는 제페토의 가장 차별화되는 포인트로 ‘소셜’과 ‘사용자 창작 콘텐츠(UGC)’를 꼽았다. 네이버 관계자는 “소셜 요소와 창작의 요소가 조화를 이뤄 자신이 만든 것을 타인에게 보여줄 수 있고 판매할 수 있는 선순환 구조가 제페토의 큰 차별화 포인트”라고 설명했다.
이 덕분에 제페토는 10대 이용자를 중심으로 새로운 SNS의 한 장르로 자리매김했다. 제페토 내부에서 UGC 창작물은 10억 회 이상 생산됐고 유튜브와 틱톡처럼 제페토를 주 무대로 활동하는 인플루언서들도 생겨나는 추세다. ‘유튜버’라는 새로운 직업을 탄생시킨 유튜브처럼 머지않아 제페토 내에서 활동하는 ‘아이템 제작자’라는 직업이 생겨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현실 세계가 경제 활동을 기반으로 이뤄지는 것처럼 제페토 내에서도 수많은 경제 활동이 일어난다. 제페토는 제페토 내에서 사용할 수 있는 ‘젬’과 ‘코인’이라는 디지털 화폐를 발행하고 있다. 이 디지털 화폐를 경제 활동에 접목할 수 있는 곳이 ‘제페토 스튜디오’다.
제페토 스튜디오는 제페토 계정을 가진 사용자라면 누구나 스튜디오를 통해 아이템을 제작하고 판매할 수 있다. 지난해 4월 문을 열였고 크리에이터 누적 가입자 수만 70만 명, 제출된 아이템만 약 200만 개다. 판매된 크리에이터 아이템만 약 2500만 개에 이른다. 퓨마, Mr. & Mrs. Italy, DKNY, 마린세르(Marine Serre) 등의 브랜드와 수십만 명의 개인 크리에이터도 함께 입점해 있다.
제페토 스튜디오는 전문적인 디자인 지식이 없어도 누구나 손쉽게 작업할 수 있게 아이템 템플릿을 제공한다. 템플릿을 이용하면 전문적인 모델링과 3D 디자인 작업에 대한 이해 없이도 간단한 2D 그래픽 이미지를 수정해 제페토 아이템을 제작할 수 있다. 네이버 관계자는 “제페토 스튜디오는 전 세계에서 가장 큰 버추얼 패션 마켓으로, 개인과 기업을 가리지 않고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플랫폼이고 별도의 입점료도 들지 않는다”고 말했다.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협업처 지닌 메타버스”메타버스의 성장 가능성이 높게 점쳐지지만 기업으로서는 수익원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다. 지난 3월 상장한 로블록스는 아직까지 흑자 전환되지 못했다는 고민거리를 안고 있다. 로블록스가 상장 후 처음으로 공개한 1분기 실적 보고서에 따르면 매출액은 3억8700만 달러, 순손실은 1억3420만 달러로 나타났다. 로블록스는 지난해에도 2억5700만 달러의 적자를 낸 바 있다. CNBC는 “로블록스 플랫폼 내 콘텐츠의 상당 부분이 무료이기 때문에 투자자들은 로블록스의 수익화 모델에 대해 신경 쓰고 있다”고 지적했다.
네이버Z가 추구하는 것도 ‘제페토 내에서 수익을 내는 것’이다. ‘젬’과 ‘코인’을 통해 제페토 이용자들이 생산한 콘텐츠의 거래를 유도함으로써 아바타를 가지고 노는 게임 수준을 벗어나 생태계와 플랫폼을 구축한다. 구매력이 증명된 사례도 있다. 나이키 브랜드의 굿즈는 제페토 내에서 약 500만 개가 판매돼 오프라인 판매량을 추월했다. 네이버 관계자는 “제페토는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협업처를 갖고 있는 메타버스로, 로블럭스가 10년간 달성한 성과를 불과 2년 만에 달성했다”고 말했다.
제페토의 기업 가치를 정확히 가늠할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급격히 성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2019년 엔터테인먼트 3사의 투자를 받았을 때만 해도 1500억원으로 평가받던 가치는 현재 2조원에 육박하는 것으로 예상된다. 이는 지난 3월 로블록스의 상장을 통해 추정한 것이다. 현대차증권은 “월간 활성 사용자 수(MAU) 2억 명인 로블록스의 현재 기업 가치가 40조원을 육박하는 상황에서 로블록스 MAU의 5~6%를 마크한 제페토가 조 단위를 인정받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분석했다.
제페토는 스노우(카메라), 위버스(팬 플랫폼), 크림(스니커즈 중고 거래) 등 네이버의 다양한 ‘Z세대’ 겨냥 사업 중에서 단연 ‘히든카드’라고 할 수 있다. 코로나19를 계기로 메타버스가 분기점을 맞이했고 성장 가능성도 높기 때문이다. 엔터테인멑트 회사부터 유통 기업은 물론 지자체, 정치권까지 메타버스에 올라타면서 ‘진짜보다 더 진짜’같은 메타버스가 눈앞에 다가왔다.
◆학생 창업자 출신 김대욱 대표…제페토 플랫폼 구축 도맡아
제페토는 본래 사진 보정 기능을 선보였던 카메라 애플리케이션(앱) ‘스노우’의 서비스 중 하나였다. 현재 제페토를 이끄는 김대욱 공동 대표는 네이버Z의 분사와 함께 대표로 내정됐다. 함께 네이버Z를 이끄는 김창욱 대표가 서비스 방향과 사업을, 김대욱 대표는 기술을 중심으로 플랫폼을 구축하는 작업을 맡고 있다.
1988년생 김대욱 대표는 대학 시절 디자이너 툴 회사인 위트스튜디오를 직접 창업했다. 위트스튜디오가 라인플러스와 합병하면서 김 대표는 네이버에 합류하게 됐다. 이후 2017년 라인플러스의 카메라 서비스 부문이 스노우에 합병되면서 김 대표는 카메라 엔진 선행 개발 업무를 맡게 됐다.
2018년 신규 콘텐츠 연구·개발과 앞선 기술력을 기반으로 제페토가 출시됐다. 서비스 이름인 제페토는 피노키오를 만든 제페토 할아버지의 이름에서 따왔다. 김대욱 네이버Z 대표는 “피노키오가 사람처럼 말하고 행동하고 생각한다는 데서 영감을 받았다”며 “제페토 할아버지처럼 자신을 닮은 아바타 캐릭터를 창조하고 생기를 불어넣어 온라인에서 살아 숨 쉬는 또 다른 나를 만들어 낸다는 상상 속의 일을 누구나 경험하도록 만들겠다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이명지 기자 mj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