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현황을 귀신같이 외워대는 ‘측근 실세’, 알고 보면 회사를 망치는 ‘역적’ [박찬희의 경영 전략]
입력 2021-07-29 06:30:01
수정 2021-07-29 06:30:02
유능해 보이려고 일하는 사람들 쥐어짜다 정작 자기 일은 못해
[경영 전략]회사 구석구석의 일을 구체적인 숫자까지 훤히 꿰고 있는 관리 담당자. 가뜩이나 바쁘고 심란한 경영자로서는 물어보면 바로 답이 나오니 편하기 그지없다. 얼마나 열심히 회사 일을 챙기기에 저렇게 잘 아는지 신통하다.
그래서 신임을 얻고 이른바 ‘측근 실세’가 되면 눈치 빠른 사람들이 알아서 받들고 정보가 모여 더욱 유능해 보인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시시각각 변하는 상황을 어떻게 실시간으로 파악할 수 있을지, 복잡한 사연들이 있는데 간단하게 숫자로 제시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사실 이런 측근 실세들은 자기가 유능해 보이려고 일하는 사람들을 시도 때도 없이 쥐어짜 상황판을 만들고 있을 뿐이다. 정말로 유능한 관리 담당자라면 회사 구석구석의 현안들을 모아 문제를 찾고 해결책을 마련해야 한다. 숫자 이면에 숨은 사연들을 찾아 억울한 일은 없는지, 다른 시각에서 답을 찾아볼 필요는 없는지 살펴봐야 한다.
경영자와의 관계 때문에 혹은 상황의 함수로 소위 측근 실세가 됐다면 주어진 권한을 제대로 써 문제를 풀고 권한이 권세가 돼 사람들을 못살게 구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정말로 중요한 일은 뒤로 미루고 남들을 쥐어짜 자기가 잘 보이려고 용쓰는 측근 실세는 사실 회사를 망치는 역적이고 이런 짓에 현혹되는 바보 같은 경영자는 회사 돈을 축내는 얼간이에 불과하다.
특히 회사 현황을 손에 쥔 관리 담당자는 이런 역적 측근 실세가 되기 딱 좋은 자리에 있어 더욱 조심해야 한다.국정 현황에 통달한 경호실장경호실장이 대통령의 신변 경호를 넘어 외교·안보 현안에 개입하고 국내 정치에도 간여하던 시절이 있었다. 최고 통치자와의 물리적·심리적 거리에서 나오는 권력에 더해 경호실장의 군·안보 관련 경력도 작용한 결과인데, 때로는 이런 수준을 넘어 경제·사회·문화 등의 분야까지 시시콜콜 챙기며 권세를 더한 경우도 있었다.
대통령이 헬기에서 보니 산에 잘 모르는 나무들이 있어 옆에 있는 경호실장에게 물어본다. 그냥 궁금했을 뿐이지만 완벽한 답을 제시해 점수를 따고 싶은 경호실장은 관련 정부 부처와 연구기관, 관련 기업들까지 총동원해 다음 날 아침 산책길에 보고한다.
혹시 추가 질문이 있을지 몰라 산림 정책 전반에 대한 자료도 준비한다. 대통령이 신문을 보다 자동차 수출 현황을 물어보자 이번에는 관련 정부 부처와 업계에 비상이 걸린다.
나중에는 ‘대통령의 관심’을 내세워 국정 전반에 대한 종합 점검과 현황 파악이 벌어진다. 어떤 질문이 나올지 미리 알고 준비하려고 대통령의 말 한마디, 메모 한 줄을 분석하고 과거의 예와 비교해 정보 조사의 방향을 잡는 ‘첨단 기법’이 등장한다.
경호실이 대통령의 관심을 추론하고 국정 전반에 대한 정보 조사를 하다 보면 본래의 업무인 경호에는 소홀해진다. 경호실장은 대통령의 정치적(혹은 정책적) 관심사에 신경을 쓰고 방대하고 전문적인 국정 현안을 챙기느라 정작 대통령의 신변 안전에 집중하지 못한다.
허겁지겁 외운 국정 현황은 심층 추론이 불가능하므로 아무 쓸모가 없고 정부 부처와 관련 기관들이 힘센 경호실을 섬기느라 쩔쩔매는 사이에 정작 대통령의 정책 참모들은 경호실의 위세에 밀려 겉돌게 된다.
세상 이치를 아는 대통령이라면 국정 현안을 구석구석 아는 경호실장에게 감탄하기보다 “이 친구 도대체 얼마나 관련 부처와 기관들을 다그쳤기에 이렇게 준비했을까. 내가 무슨 현안이 궁금할지는 또 어떻게 알았을까. 경호 일은 제대로 하고 있는 것인가”라고 먼저 생각한다.
하루 날 잡아 숫자까지 줄줄 외워 대는 경호실장에게 어떻게 그런 정보들을 파악했는지, 경호 업무는 제대로 하고 있는지 꼬치꼬치 물어봐 혼쭐을 낸다. 그래야 경호실장도 정신 차리고 자기 일에 집중하게 된다.
불행스럽게도 권력자의 일상을 접하는 ‘문고리 권력’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주요 현안을 잘 알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남들보다 상황을 먼저 알고 현안에 대한 지시와 보고에서 메신저 역할을 맡다 보면 자신이 문제 해결 능력이 있다고 여긴다.
회사 현황을 모아 숫자로 (사실은 돈으로) 관리하는 역할이 더해지면 착각은 더욱 커질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문제를 찾고 풀어 내려면 훨씬 많은 능력이 필요하다.문고리 권력과 실세 관리자, 다 쓰기 나름권력자의 생각과 배경, 정황 정보는 현안 관리와 문제 해결에 중요한 부분이고 뛰어난 문고리 권력이 문제 해결에 참여할 수도 있다.
관리 담당자가 전문적 현황 파악과 분석을 바탕으로 문제 해결을 주도할 수도 있다. 조정 대신들보다 유능하게 정국을 관리한 환관이 있고 냉철한 분석과 대응으로 경영 위기를 이겨낸 관리 담당자도 있다. 문제는 능력이 안 되면서 실세 권력을 휘두르고 자기가 유능해 보이려고 일하는 사람들을 쥐어짜며 괴롭히는 경우다.
A대학은 최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방역을 위해 전면적으로 온라인 수업을 시행하고 있다. 녹화 영상, 실시간 화상 강의, 대면 지도 등 여러 방식들이 있어 그 현황을 이사회와 감독 당국에 보고하는데, 대학에서 ‘수업 방식’을 관리하는 일은(교권과 학문 자유 때문에) 매우 이례적이지만 어느새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런데 시도 때도 없이 반복적으로 현황을 보고하라는 지시가 날아드니 심란하다.
배경은 이러했다. 이 대학의 교무 행정 책임자가 이사장 앞에서 유능한 관리자로 보이기 위해 독촉한 것이다.
숫자가 더해져야 더욱 정확하고 유능해 보이는데 행여 게으르다는 소리를 들을까봐 자주 집계하다 보니 집계하는 실무자나 보고하는 교강사들은 합해 수천 시간의 노력을 허비해야 한다(집계한다고 수업의 질이 달라지지 않고 사실 이사장은 그런 숫자에 관심도 없으니 허탈한 일이다).
학교 경영진이 서버 증설, 시스템 구축 등 ‘사업 이권’에 관심이 있다면 더욱 심란한 일들이 더해지는데, 교무 행정 책임자는 충성을 위해 독촉에 박차를 가한다.
조르고 다그쳐 봐야 특별히 무서울 것도 없고 유능해 보여 팔자를 고칠 일도 없는 대학의 현황 관리에 비해 기업의 관리 통제 권력은 차원이 다르다.
경영 현황을 숫자로 정리하고 해석하는 과정은 그 자체로 정보 흐름의 길목을 장악해 우월한 지위를 갖게 된다.
여기에 사람의 판단이 들어가고 재량이 더해지면 권력이 된다. 해석과 판단이 구성원에 대한 평가 보상과 인사로 연결되면 권력은 더욱 커진다. 이런 권력은 경영자가 조금만 방심하면 관련자들의 집단적 이해가 얽혀 단단한 권력 기구로 진화한다.
별것 아닌 문고리 권력도 나라를 쥐고 흔들 수 있는데 경영의 핵심인 판단과 해석이 더해지면 관리 담당자는 일하는 사람들을 쥐어짜며 휘두르기 시작하고 경영자는 여기 얹혀 붕 떠 있는 신세가 된다. 궁정의 환관에게 인사권과 감찰권을 주고 군대까지 붙여준 바보 황제와 다를 바 없다.
문고리 권력이든, 실세 관리자든 사람은 쓰기 나름이다. 훌륭한 최고경영자는 자기가 유능해 보이려고 일하는 사람들 쥐어짜며 못살게 구는 관리자들을 엄하게 대한다.
현실의 심란한 사연들을 숫자로 가린 깔끔한 보고에 홀려 그들의 해결 능력 밖인 문제를 맡기고 권력까지 얹어 주는 아둔한 짓은 없는지 스스로 경계한다.
회사 구석구석을 들쑤시며 숫자를 짜 맞출 시간에 풀어야 할 문제가 무엇이고 어떤 답이 있는지 제대로 찾아보게 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일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드러나고 부문들 사이에 상호 교차 검증되는 체제를 만든다. 그래야 문고리를 잡거나 관리 통제를 맡아도 분수를 넘지 않는다.
박찬희 중앙대 경영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