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립자 장남 알도, 아들의 새 상표권 등록에 해고
권력 분할 한 동생이 죽자 조카는 세심하게 챙겨
구찌 창립자의 둘째 아들 로돌프는 아들 마우리치오에게 생 모리츠의 부동산, 밀라노와 뉴욕의 고급 아파트, 스위스은행에 예치된 2000만 달러, 막대한 수익을 내는 구찌 제국의 지분 50%를 포함한 수천만 달러를 유산으로 남겼다. 아버지의 죽음은 서른다섯 살의 마우리치오에게 절망을 안겨 줬지만 해방을 뜻하기도 했다.
로돌프는 마우리치오에게 집요하게 사랑을 쏟아부으면서도 엄격했다. 마우리치오는 아버지에게 무언가를 부탁할 때는 로돌프의 운전사나 비서에게 도움을 청하곤 했다. 로돌프의 비서 카솔의 회고다. “로돌프는 마우리치오에게 성채를 주었지만 그 성채를 관리할 돈은 주지 않았습니다. 마우리치오는 아버지에게 부탁할 용기가 없어 저에게 용돈을 빌리곤 했어요.”
마우리치오는 성인이 돼서도 아버지가 방에 들어오면 벌떡 일어났다. 그의 유일한 반항은 파트리치아와 결혼한 것이었다. 로돌프는 마지못해 받아들인 며느리와 결코 가까워지지 못했지만 화해는 했다. 파트리치아가 마우리치오를 사랑하고 자녀들을 사랑이 넘치는 환경에서 잘 키우고 있는 것이 로돌프의 눈에도 보였기 때문이다.
아버지 죽음으로 독자 결정할 자유 얻었으나 ‘주눅’
아버지의 죽음으로 마우리치오는 난생처음 독자적인 결정을 내릴 자유를 얻었다. 재정을 책임지려면 의사 결정을 해야 했지만 그때까지 모든 일을 아버지가 챙겨 줬기 때문에 경험이 부족했다. 뉴욕에 있을 때 창립자의 장남이자 큰아버지 알도에게 얻은 교훈도 시대가 바뀌면서 통하지 않게 됐다.
명품업계의 경쟁이 더욱 치열해졌고 구찌 가족 간의 갈등은 한층 더 심화되고 첨예해졌다. 마우리치오의 고문 지안 비토리오 필로네는 죽기 직전인 1995년 5월 밀라노에서 언론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로돌프의 가장 큰 실수는 마우리치오를 더 빨리 신임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는 돈주머니를 꽉 틀어쥐고 있으면서 아들에게 자립할 기회를 주지 않았습니다.” 마우리치오의 비서로 일했던 릴리아나도 마찬가지 말을 했다.. “마우리치오는 자신이 막중한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사실에 주눅이 들곤 했어요. 그래서 로돌프가 항상 아들의 일을 도맡아 처리했습니다.”
로돌프는 형 알도와 달리 사업 감각이 부족했지만 생 모리츠의 부동산과 스위스은행의 비밀 계좌를 비롯한 막대한 재산을 모았다. 예치만 하고 출금은 하지 않은 사실을 자랑스러워하면서도 아들에게도 그런 근성이 있을지 확신하지 못했다. 로돌프는 마우리치오가 한 번에 수백만 달러를 쓸 정도로 절약 정신이 부족하고 성공보다 과시에 치중한다고 생각했다. 그뿐만 아니라 가족 간의 격렬한 다툼에 휘말리다가 파멸에 이를까 걱정했다.
로돌프가 죽고 난 뒤 몇 달 동안은 알도가 조카 마우리치오를 세심하게 챙겼다. 그는 아들 파올로와의 전쟁을 겪으면서 동생과 함께 겨우 지켜 온 지금의 상황이 동생의 죽음으로 흔들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두 사람은 몇 가지 간단한 원칙에 따라 회사를 둘로 분할했다. 첫째, 회사는 가족 소유로 남아 있어야 하고 성장 속도와 사업할 장소, 판매할 제품을 가족들만 결정할 수 있다는 원칙이었다.
둘째, 형제는 회사를 명확한 두 개 분야로 나눈 뒤 알도는 구찌 아메리카 법인과 소매 유통망을, 로돌프는 구찌오구찌와 이탈리아의 생산을 관리하기로 했다. 이러한 권력 분할은 성공적이었다. 로돌프가 세상을 떠났을 때 구찌는 엄청난 매출을 올리고 있었다. 구찌는 전 세계 주요 도시에 20개 직영 매장을 뒀고 일본과 미국에서 45개 프랜차이즈 매장을 운영하는 한편 면세품 사업과 GAC(Gucci Accessories Collection) 도매 사업으로도 짭짤한 수익을 올렸다.
알도의 아들 파올로는 창의적인 괴짜였고 아버지에게서 3.3%의 지분을 증여받아 가족 이사회에서 디자인·생산·마케팅에 대한 아이디어를 제안하기 위해 주주로서의 지위를 이용하기 시작했다. 파올로는 피렌체에서 삼촌인 로돌프와의 잦은 다툼으로 뉴욕으로 자리를 옮겼다. 뉴욕에서는 아버지 알도만이 뉴욕 사교계에서 자리 잡았다. 언론이 ‘구찌의 리더’로 칭한 알도만이 연이은 구찌의 패션 자선 행사에서 존재감을 보였다.
하지만 파올로는 아버지의 독재를 참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피렌체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뉴욕에서 많은 친구를 사귀면서 인맥을 쌓은 그는 자기 이름을 걸고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나섰다. 가족들이 그의 계획을 알아차리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알도는 파올로가 PG(파올로 구찌) 컬렉션이라는 독자적인 제품 라인을 상의하기 위해 현지 공급 업체 몇 곳과 접촉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아버지 해고 통보에 아들, 모회사에 소송 제기
그리고 파올로의 이야기가 허무맹랑한 말에 그치지 않는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스타일·가격·납품 일정까지 정해졌고 특히 유통 계획이 거창했다. 어떤 소식통에 따르면 파올로는 판매처로 슈퍼마켓까지 고려하고 있었다. 알도는 잔뜩 열을 받았고 파올로의 행동이 구찌의 명성은 물론 가족들이 지금까지 이룬 업적에 위협이 된다고 생각했다. 알도는 많은 것을 베풀었음에도 아들이 이런 식으로 보답했다는 사실에 분노했다.
그는 곧바로 파올로에게 전화해 “넌 해고야. 바보처럼 나와 경쟁하려 들다니 정신이 나갔구나. 이제 널 보호해 주지 않을거야”라고 혼을 냈다. 파올로가 되받아쳤다. “사람들이 저를 못살게 굴도록 내버려 두시는 이유가 뭐예요. 저는 회사가 잘되기만을 바랐어요. 해를 끼칠 생각은 없었다고요. 저를 해고하면 제 회사를 차릴 테니 그리 아세요. 나중에 누가 옳은지 알게 되겠죠.”
파올로는 법률 대리인 스튜어트 스파이저를 찾아갔고 며칠 후 PG라는 새로운 상표권을 등록했다. 얼마 후 파올로는 아버지의 해고 통보 편지를 받았다. 파올로는 26년 동안 근무했는데 퇴직금 한 푼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탈리아의 모회사에 소송을 제기했다.
구찌 일가는 파올로 없이 피렌체에서 이사회를 열었고 그의 사업을 무산시키기 위해 800만 달러를 들이기로 결정했다. 가족 분쟁은 본격적인 무역 전쟁으로 비화됐고 모조품 업체와의 싸움은 새발의 피였다. 그 후 10년 동안 가족 분쟁이 이어지면서 동맹이 바뀌거나 갑작스러운 배신이 난무하는 구찌 일가의 실상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자료=사라 게이 포든 ‘하우스 오브 구찌(다니비앤비)’ 등 참조
류서영 여주대 패션산업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