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 시장 급변에 긴장하는 일본車 업계[글로벌 현장]

엔진에서 자율주행 및 공유 서비스로 변화…일본차 업계엔 위기

[글로벌 현장]

지난 4월 상하이 국제모터쇼에서 관람객들이 도요타 자동차의 부스를 살펴보고 있다.(/연합뉴스)


자동차 시장의 지각변동이 본격화하면서 일본 자동차업계가 긴장하고 있다. 지난 20년 동안 자동차 시장의 주력 차종이 바뀐 데 이어 내연 기관 자동차 시대가 저물면서 일본 주력 산업의 미래가 불투명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자동차 산업은 제조 강국 일본을 대표하는 산업이다. 일본자동차공업회에 따르면 2018년 기준 자동차 관련 시장에서 일하는 일본인은 542만 명이다. 전체 취업 인구의 8.2%를 차지한다. 제조 부문에서만 약 91만 명이 종사한다.

일본 최대 제조업체 도요타자동차에서만 7만 명, 그룹 전체로는 37만 명을 고용하고 있다. 연결 자회사는 600곳 이상이다. 직간접적으로 거래 관계가 있는 협력사가 일본에만 4만 곳에 달한다.

일본 자동차업계의 총생산 규모는 18조1000억 엔(약 191조원)으로 일본 국내총생산(GDP)의 3.3%다. 제조 업종 가운데 최대 규모다. 수출 총액은 16조7000억 엔으로 일본 전체 수출의 20.5%를 담당한다. 역시 단일 수출 품목으로는 가장 큰 규모다.

일본 경제의 미래가 자동차 산업에 달려 있다는 일본 재계의 평가가 과장으로 느껴지지 않는 이유다. 지난해 도요타자동차가 폭스바겐을 제치고 세계 최대 자동차 기업에 복귀하는 등 일본 자동차업계 역시 변함없는 경쟁력을 과시하고 있다.

문제는 미래다. 지난 100여 년간 세계 자동차 시장의 주력 차종이었던 세단이 올해 처음으로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에 자리를 내 줄 것으로 전망된다.

시장 조사 업체 IHS마킷은 올해 세계 신차 판매에서 SUV의 비율이 40%로 세단을 처음 근소하게 앞설 것이라고 예상했다. 집계를 시작한 2000년만 해도 세단의 비율은 60%로 SUV의 6배에 달했다.
자동차의 기준, 과시에서 실용성으로
니혼게이자이신문은 고급 세단을 출세의 상징으로 여기던 소비자들의 가치관이 실용성을 중시하는 쪽으로 바뀌면서 세단의 시대가 저물었다고 분석했다. 일본의 1인당 자동차 보급 대수는 2006년 1.112대를 정점으로 줄곧 하락하고 있다.

2019년 직장인의 평균 연간 수입이 436만 엔(약 4631만원)으로 20년 새 5% 감소한 때문이다. 소득이 줄자 신분 상승 욕구가 구매의 주요 동기 가운데 하나였던 세단의 인기도 시들해질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일본은 주요 시장 가운데 ‘세단의 몰락’이 가장 극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1960~1970년대 고도 성장기부터 1980년대 버블(거품) 경제 시대에 걸쳐 시대를 풍미한 세단이 하나둘 사라지고 있다. 닛산자동차는 대표 세단인 스카이라인의 개량 모델을 7년째 내놓지 않고 있다. 도요타 역시 크라운의 생산 종료를 검토하고 있다. 중국에서는 이미 크라운 SUV를 발표했다.

미국 제너럴모터스(GM)도 2019년 쉐보레 크루즈 등 6개 브랜드의 세단을 생산 중단했다. 예외적으로 세단의 인기가 높은 시장은 중국이다. 중국은 여전히 세단의 비율이 미국·일본·유럽에 비해 높다. 일본 자동차 업체의 중국 담당자는 “포멀한 인상의 세단은 출세의 상징이어서 중국 같은 권위주의 국가에서는 인기”라고 말했다.

하지만 중국도 장기적으로는 세단의 인기가 시들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자동차 소유욕이 없는 소비자층이 늘고 있기 때문이다.

세단은 전방의 엔진 공간과 중앙의 승차 공간, 후방의 트렁크가 각각 독립 설계된 것이 대부분이다. 중심이 낮아 고속 주행에 적합하다. 자동차 메이커들은 세단의 서열을 보급형부터 고급형으로 확실하게 나누는 마케팅 전략을 써 왔다.

이 때문에 일본인들 사이에서는 ‘젊어서는 카롤라(도요타의 중소형 세단), 출세해서는 코로나(중형 세단), 언젠가는 크라운(고급 세단)’이라는 ‘마이카 인생 계획표’가 유행이던 시절이 있었다. 1980년대는 흰색 4도어 세단이 ‘하이소카(하이 소사이어티 카 : high society car)’로 불티나게 팔렸다.

버블이 최고조에 달한 1988년에는 닛산이 대당 500만 엔이 넘는 최고급 세단 ‘시마’를 내놓았다. ‘택시를 잡을 때는 1만 엔(약 10만원)짜리 지폐를 흔든다’고 할 정도로 흥청망청하던 당시 일본 사회의 분위기를 지금도 ‘시마 현상’이라고 부른다.

세단이 몰락하고 SUV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시기도 일본의 버블 붕괴와 겹친다. 대기업이 대규모 구조 조정에 나서면서 ‘취업 빙하기’가 불어닥친 1990년대 중반 도요타의 대표 SUV ‘RAV4’와 혼다의 미니밴 ‘오딧세이’가 잇따라 등장했다.

한 자동차 딜러는 “어딘가 상용차 같았던 SUV와 미니밴의 내장이 점점 세련되지고 있다”며 “젊은 고객일수록 세단에 관심이 없다”고 말했다. 세단에서 SUV로 교체하려는 한 고객은 “짐 싣는 공간이 넓고 아이들도 차 안에서 서서 걸어다닐 수 있는 차고가 장점”이라고 말했다.
막 올린 CASE 시대, 日 경쟁력 먹구름
과시보다 실용성이 자동차를 고르는 기준이 되면서 공유차와 정액 요금제도 인기를 끌고 있다. 시장 조사 업체 후지경제는 2030년 일본의 공유차 시장 규모가 4300억 엔으로 2019년의 9배에 달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자동차를 소유하던 시대에서 이용하는 시대로 변하는데 따른 시장의 변화라고 후지경제는 설명했다.

렌터카 시장에서는 메르세데스-벤츠 등 고급차가 늘고 있다. 도요타가 새로 내놓은 정액 요금 서비스 ‘킨토’에는 지난 한 해 동안에만 신규 회원이 1만 명을 넘었다. 자동차의 수요 자체가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CASE(연결성·자율주행·공유서비스·전동화)로 대표되는 미래차 개발 경쟁도 세단을 시대의 뒤편으로 몰아내고 있다. 자동차의 궁극적인 지향점이 주행 성능에서 ‘달리는 거실’로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파나소닉이 2019년 도쿄 모터쇼에 선보인 콘셉트카 스페이스L은 아예 핸들과 운전석이 없다. 탑승자는 거실 같은 차내에서 대형 디스플레이 화면을 통해 쇼핑을 즐길 수 있다.

자동차의 핵심 경쟁력이 엔진에서 CASE로 넘어가는 시대 변화는 일본 자동차업계에 위기다. 일본 자동차 업체들은 엔진 경쟁력을 무기로 세계 시장을 주도해 왔기 때문이다. 혼다는 1972년 세계 최초로 미국의 엄격한 배출가스 규제를 통과한 CVCC 엔진을 개발했다. 1980년대에는 모터스포츠 F1을 연이어 제패했다.

도요타는 1997년 세계 최초의 하이브리드차 프리우스를 출시했다. 프리우스는 ‘21세기에 도착했습니다’라는 광고 문구대로 시대를 선도했지만 현재 유럽과 미국은 친환경 차량에서 하이브리드차를 제외하고 있다.

CASE 가운데 세계 최고의 모터 기술력을 가진 일본전산을 제외하면 일본 기업이 주도하는 시장은 없다. 자율주행과 관련 소프트웨어는 미국 구글과 애플 등이 과점하고 있다. 위탁 생산은 대만 혼하이정밀, 배터리는 중국 CATL 등이 주도권을 쥐고 있다.

최근 조사에서 도요타의 전기차 특허 경쟁력과 전고체 배터리 경쟁력은 세계 최고로 평가됐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기술 경쟁력을 판매 실적으로 연결하는 것이 일본 자동차업계의 과제”라고 진단했다.

도쿄(일본)=정영효 한국경제 특파원 hug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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