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개 드는 ‘회색 코뿔소’와 ‘퍼펙트 스톰’ 위기론 [한상춘의 국제경제 심층 분석]

대내외 경제 악재 산적, 정책적 연착륙 방향성 마련해야 할 시점

[한상춘의 국제경제 심층 분석]

10월 5일 코스피지수, 3000선이 붕괴된 것은 지난 3월 26일 이후 6개월 만이다. 출처: 한국경제신문


국가 부도와 가계 부채 위기, 중진국 함정, 일본형 복합 불황. 문재인 정부 들어 거론된 각종 위기론이다. 이 가운데 최근 들어 경제 각료들의 경고로 급부상하고 있는 것이 ‘회색 코뿔소’와 ‘퍼펙트 스톰’이다. 회색 코뿔소는 위기가 발생할 수 있는 잠재 후보군을, 퍼펙트 스톰은 회색 코뿔소를 방치할 경우 한꺼번에 위기가 닥치는 총체적 난국을 뜻한다.

좀처럼 살아날 기미 보이지 않는 한국 경제

대외적으로 세계 경제를 주도하고 있는 미국과 중국 간 마찰이 전방위적으로 확대되고 있다. 경제 패권을 겨냥한 3차 대전이 발발할 것이란 경고가 잇따르고 있다. 우리처럼 중간자인 국가는 국제 정세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면 샌드위치 위기에 직면할 공산이 크다.

미‧중 마찰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가 겹친 악조건이 계속됨에 따라 세계 가치 사슬(GVC)이 약화되고 공급망이 무너지고 있다. GVC는 ‘기업 간 무역’과 ‘기업 내 무역’을 말한다. GVC가 약화되면 세계 교역이 위축돼 한국과 같은 수출 지향적 국가는 더욱 큰 타격을 입는다.

대내적으로는 잠재 성장 기반과 관련한 저출산·고령화가 빠르게 진행되는 점이 가장 크게 우려된다. 인력 수요와 공급 간 ‘병목’과 ‘불일치’가 심해지면서 고비용‧저효율 구조가 정착되고 있다. 노동력에 이어 생산에 필요한 자본도 저축률 하락 등으로 성장률을 제약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거시(성장률·고용)와 미시적(상장 기업 실적) 차원에서 대기업 쏠림과 착시 현상도 좀처럼 해소되지 않고 있다. 오히려 빅테크 기업이 가세돼 더욱 심화되는 양상이다. 기업의 ‘원중친미(遠中親美)’와 현 정부의 ‘안미경중(安美經中 : 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 중시)’ 간 오류에 따른 혼란도 심각하다. 남북 관계는 언제나 리스크가 나타날 수 있다.

대장동 사태에서 나타난 것처럼 부패와 뇌물 사건도 줄지 않고 있다. 한 나라의 뇌물과 부패 정도는 정치적 영향력과 인허가와 같은 행정 규제에 비례한다. 독점적 이윤인 경제적 지대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사회 구성원은 치열한 로비 활동을 전개하고 이 과정에서 뇌물과 부패가 만연하는 ‘지대 추구형 사회’가 정착된다.

정책 당국이나 정책에 대한 국민의 신뢰도도 예전만 못하다. 특히 정치권이 그렇다. 당리당략에만 혈안이 돼 국민과 경제의 앞날은 뒷전이다. 신뢰 회복의 골든타임까지 놓쳐 이제는 한국 경제도 1990년대 이후의 일본 경제처럼 아무리 좋은 신호를 주더라도 정책 수용층이 반응하지 않는 좀비 국면에 빠져들고 있다.

각종 경제 활력 지표가 눈에 띄게 회복되지 못하고 있는 점이 그 증거다. ‘한번 해 보자’하는 심리가 좀처럼 살아나지 않는 상황에서 경기 부양 대책을 추진하더라도 경기 회복에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1990년대 이후의 일본 사례가 여실히 보여준다.

최근 경제 지표가 마치 합창하는 것처럼 회색 꼬뿔소와 퍼펙트 스톰을 경고한 직접적인 배경은 가계 부채다. 급작스럽게 대출이 줄거나 금리를 올리면 이 충격이 경제적 약자인 소상공인과 젊은층에 집중돼 풍선 효과가 발생한다. 지난 8월 금리 인상 이후 가계 부채가 오히려 늘어나면서 질적으로 악화되고 있다. 연착륙 방안을 반드시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제롬 파월 미국 중앙은행(Fed) 의장. 출처: 한국경제신문


금리 인상보다 외화 보유 확충이 더 중요

외자 이탈 방지의 최선책도 금리를 올리는 것보다 외화를 충분히 쌓는 것이 더 중요하다. 외화 보유 확충은 1990년대 이후 중남미 외채 위기, 아시아 외환 위기 등을 거치면서 신흥국들이 외부 충격에 의한 각종 위기를 방지하기 위한 내부적인 안전장치로 가장 중시돼 왔다.

한국은 통화 스와프 등과 같은 제2선 자금까지 포함하면 적정 수준보다 보유 외화가 많다. 오히려 미국보다 앞서 금리 인상을 단행하면 ‘금리 인상→경기 침체→외자 이탈’ 간의 악순환 고리를 촉발할 가능성이 높다. 2018년 11월 집값을 잡기 위해 금리를 올렸다가 경기를 더 침체시킨 사례가 있다

금리 인상 후 가계 부채를 잡는 과정에서 경기가 둔화된다면 이를 살릴 수 있는 정책 수단이 있는지 고민해야 한다. 통화 정책은 정책 충돌로 금리 인하와 유동성 공급이 쉽지 않다. 재정 수지가 너무 빨리 악화돼 재정 정책도 예전처럼 여유로운 여건이 아니다. 외환 정책은 외화 거래 내역을 공개해야 하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개입하기가 어려워졌다.

더 큰 우려는 지난 9월 미국 중앙은행(Fed) 회의에서 테이퍼링(양적 완화 축소)이 공식화됐다는 점이다. 델타 변이 확산 등의 변수가 있지만 앞으로 Fed는 테이퍼링 추진 시기와 실행 기간, 금리 인상 등에 초점을 맞출 가능성이 높다. 전체적으로 일정이 앞당겨지는 추세를 감안하면 추진 시기는 11월 Fed 회의에서 확정될 것으로 예상된다.

추진 방법에서는 순차적 테이퍼링이 재차 주목받을 가능성이 높다. 제롬 파월 Fed 의장이 부인했지만 미국도 집값이 ‘미쳤다’라는 표현이 나올 만큼 급등하고 이에 편승한 주택 담보 대출로 가계 부채가 경고 수준에 도달했다. 순차적 테이퍼링은 주택저당증권(MBS)부터 줄이고 다음으로 국채를 가져 가는 방안을 말한다.

순차적 테이퍼링이 안고 있는 문제는 국채와 MBS 간 금리 스프레드가 흐트러져 시중 유동성이 과도하게 국채로 몰릴 가능성이다. 그러면 집값 하락에 따른 역자산 효과와 장·단기 금리 간 역전 현상으로 경기 침체 우려가 높아져 Fed가 가장 경계하는 ‘제2 에클스 실수’를 저지를 확률이 높아질 것으로 관측된다.

이에 따라 파월 의장의 주장대로 매달 국채 800억 달러, MBS 400달러를 매입해 줄 때와 같은 비율로 줄이는 방안이 검토될 수 있다. 이 방안은 국채와 MBS 간 스프레드를 유지할 수 있어 시장에 미치는 충격을 흡수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코로나19 사태 이후 급등한 집값을 안정시키고 가계 부채를 줄이는 정책 목적은 달성할 수 없는 약점이 있다.

모두가 쉽지 않은 과제다. 코로나19 사태로 국민이 어려울 때 정치권과 정책 당국은 극단적인 위기론을 제시하기보다 ‘마라도나 효과’와 같은 모범을 보여줘야 한다. 이를 바탕으로 정책 수용층이 ‘공공선’ 정신을 발휘한다면 최근 들어 고개를 들고 있는 회색 꼬뿔소와 퍼펙트 스톰 가능성을 낮출 수 있을 것이다.

한상춘 국제금융 대기자 겸 한국경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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