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업자 탄생 100주년 맞아 해외 진출 지원 나서…엘켐프, 2016년 이후 119개 스타트업 육성
[스페셜 리포트]고(故) 신격호 롯데그룹 창업자(1921년 11월 3일생)의 탄생 100주년을 맞은 11월 3일. 서울 잠실에 있는 롯데월드타워 꼭대기 층 ‘123스카이라운지’에서는 이를 기념하기 위한 뜻깊은 행사가 열렸다. 롯데는 이날 성장 가능성이 높은 스타트업들의 해외 진출을 적극 지원하는 프로그램인 ‘글로벌 액셀러레이터’에 참여할 스타트업들을 선정해 발표했다. 롯데가 스타트업들의 해외 진출을 돕는 프로그램을 마련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10월 12일부터 27일까지 참여를 원하는 스타트업들의 신청을 받았는데 총 300개 이상이 지원하며 열띤 경쟁을 펼쳤다.
롯데는 그중에서 뛰어난 잠재력을 지녔다고 평가받은 13개 스타트업을 최종 선발했다. 자전거 중고 거래 플랫폼을 운영 중인 ‘라이트브라더스’, 인공지능(AI) 개발자들이 활용할 수 있는 솔루션을 제공하는 ‘베쓸에이아이’ 등이 그 주인공이다. 롯데는 13개 스타트업들에 총 5억원에 달하는 투자금을 지급해 해외 사업 확장에 활용하도록 할 예정이다. 내년 1월에는 함께 미국 실리콘밸리에 갈 계획도 세웠다. 해외 사업의 물꼬를 틀 수 있는 ‘기회의 장’을 열어 주기 위해서다.
롯데가 스타트업 육성에 더욱 팔을 걷어붙인다. 이른바 ‘1세대 글로벌 청년 창업가’라고 할 수 있는 신격호 창업자의 ‘도전 정신’을 계승하자는 취지에서 내린 결정이다.
신격호 창업자의 ‘탄생 100주년’을 계기로 삼고 앞으로 스타트업 성장을 위한 지원을 보다 확대하기로 했다.
이번에 선정한 글로벌 액셀러레이터 프로그램 또한 그 일환으로 마련했다. 롯데그룹 관계자는 “국내로 제한돼 왔던 스타트업 육성 시스템을 해외로 확장한다는 측면에서 글로벌 액셀러레이터가 갖는 의미가 크다”고 밝혔다.
롯데가 스타트업 육성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201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은 당시 ‘스타트업 메카’로 불리는 강남 테헤란로에 사재 50억원을 들여 기업 주도형 벤처캐피털(CVC) 롯데벤처스(구 롯데엑셀러레이터)를 설립했다.
이때부터 뛰어난 잠재력을 가진 스타트업을 찾아 이들의 아이디어나 기술이 사장되지 않고 한국 시장에 뿌리내릴 수 있도록 지원해 왔다.2016년부터 본격적인 스타트업 육성 롯데벤처스가 첫발을 내디뎠을 때 신동빈 회장이 당부했던 말을 돌이켜 보면 롯데의 스타트업 육성을 위한 각오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롯데를 망하게 할 기업과 기술 그리고 아이디어를 찾아라.”
신동빈 회장이 롯데벤처스 임직원들에게 내린 특명이었다. 아버지인 신격호 창업자의 경영 철학이라고 할 수 있는 ‘기업 보국’을 이어 받아 국가 경제 발전에 공헌하겠다는 목적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혁신적인 스타트업과 협업해 새로운 사업 기회를 모색하겠다는 전략도 깔려 있었다.
신동빈 회장의 주문 아래 롯데벤처스는 ‘엘캠프’라는 프로그램을 마련하고 기술력과 아이디어로 똘똘 뭉친 스타트업들을 정기적으로 선별해 다양한 성장 기회를 제공해 나갔다.
자체적인 스타트업 인큐베이팅 시스템을 구축하면서 단순한 투자가 아닌 스타트업 ‘육성’이라는 키워드에 초점을 맞추고 잠재력이 큰 스타트업들을 하나둘 품에 안았다
엘캠프에 참여를 허가 받은 스타트업이 인큐베이팅을 받는 기간은 약 6개월(서울 엘캠프 기준)이다. 이 기간 동안 사무실을 내주고 투자금을 지원해 주는 것은 물론 선배 창업가의 노하우를 전수받을 수 있는 행사도 수시로 마련하며 스타트업들이 무럭무럭 자라날 수 있는 여러 지원책들을 선보였다.
이렇게 맺은 인연은 인큐베이팅이 끝나도 종종 계속 이어졌다. 롯데의 여러 계열사들이 엘캠프 출신 스타트업들에 먼저 손을 내밀어 협업을 제안해 매출이 발생할 수 있는 기회를 줬다.
이를테면 마감 할인 식음료 커머스 플랫폼 ‘라스트오더’를 운영하는 미로는 엘켐프를 졸업한 뒤 6개 롯데 계열사의 러브콜을 받아 서비스를 진행 중이다. 롯데마트나 백화점 등에서 유통 기한이 임박한 상품을 소비자에게 할인된 값에 구매할 수 있는 서비스를 제공하며 빠르게 사세를 확장해 나가고 있다.
샐러드 전문 배송 기업 프레시코드로 엘캠프 출신이다. 계속해 롯데와 협업하며 빠른 성장을 이어 가고 있다. 프레시코드는 현재 롯데가 운영하는 편의점 세븐일레븐에 거점 배송 구역를 설치했다.
이를 활용해 편의점 인근에 있는 고객들에게 보다 빠른 배송을 진행할 수있게 됐다. 또 롯데푸드와도 제품 개발을 위해 머리를 맞대고 있다.
올해 중소벤처기업부의 예비 유니콘 기업(기업 가치 1조원 이상인 스타트업)에 이름을 올린 스타트업 링크플로우도 빼놓을 수 없다. 세계에서 처음으로 360도 넥밴드 카메라 ‘핏(FITT) 360’을 개발할 수 있었던 것도 롯데의 도움이 결정적이었다. 링크플로우는 2016년 창업과 동시에 엘캠프에 입주했다. 롯데벤처스는 링크플로우가 개발 중인 기술만 보고 투자와 창업에 필요한 지원을 결정했다.
또 카메라가 상용화된 후 롯데월드타워 보안 담당자들이 이를 활용해 업무를 보게 하며 직접 제품을 구매했다. 김용국 링크플로우 대표는 “사업 초반에 롯데가 정말 큰 도움이 됐다”면서 “총 3번에 걸쳐 25억원에 달하는 투자를 받은 것 외에도 법률 자문이나 네트워킹, 사업 방향 등에 대해 들으며 성장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렇듯 롯데벤처스를 앞세운 롯데의 스타트업 육성이 성공적으로 진행 중이라는 사실은 수치로도 확인할 수 있다. 롯데벤처스에 따르면 지난해까지 엘캠프를 거친 스타트업 수는 119개로 집계됐다.
현재 이들의 기업 가치는 1조원을 돌파했다. 해당 스타트업들이 엘캠프에 처음 입주했을 시점(추산 3070억원)과 비교하면 3배 이상 증가했다.
일자리 창출 효과도 내고 있다. 119개 스타트업의 직원 수는 5년 동안 768명에서 1382명으로 약 2배 정도 늘었다. 수많은 엘캠프 출신 스타트업들이 성공가도를 달리면서 롯데벤처스는 스타트업 창업자들이라면 누구나 입주를 꿈꾸는 공간으로 단숨에 떠올랐다.내년부터 본격적인 프로그램 가동한국에서 성공적으로 스타트업 육성 경험을 쌓은 롯데는 창업자의 탄생 100주년을 계기로 향후 스타트업의 해외 진출까지 지원하기로 했다.
세계 시장에서 통할 법한 기술과 아이디어를 가진 스타트업들이 해외 시장에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는 ‘디딤돌’ 역할을 하겠다는 새로운 목표를 갖고 글로벌 액셀러레이터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한국에는 뛰어난 역량과 기술력을 보유한 스타트업들이 많다. 하지만 해외로까지 진출하는 곳은 극히 드물다.” 롯데벤처스 관계자는 이번에 글로벌 액셀러레이터 프로그램을 계획한 배경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실제로 스타트업업계 관계자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여기에는 다양한 원인들이 있는데 가장 큰 걸림돌은 단연 네트워크 부족이다.
현지에서 어떤 방식으로 판로를 뚫고 사업을 이어 갈지에 대한 정보를 획득하기가 쉽지 않다. 롯데벤처스 관계자는 “이런 장벽 때문에 좋은 사업 기회를 놓치는 곳이 많다”고 말했다. 이런 걸림돌을 해소하기 위해 롯데는 현지에서 성공한 창업과들과 한국 스타트업을 직접 연결하는 ‘가교’ 역할을 자처하고 나섰다.
11월 중순부터 본격적으로 실리콘밸리에 있는 한인 창업가 모임인 ‘82스타트업(startup)’과 화상 회의 등을 통해 직접 소통할 수 있도록 할 예정이다.
화상 회의에는 올해 초 유니콘 기업으로 인정받은 채팅 서비스 스타트업 센드버드의 김동신 대표, AI 광고 솔루션 스타트업 몰로코의 안익진 대표 등 12명이 직접 참가해 미국 현지 투자 및 회사 운영 노하우를 전수하기로 했다. 내년 1월에는 13개 스타트업 대표들이 미국 실리콘밸리로 날아가 82스타트업 멤버들과 얼굴을 맞대고 직접 미팅을 갖기로 했다.
롯데벤처스 관계자는 “최근 미국 내 한인 창업자들이 증가하고 있고 글로벌 진출을 통해 유니콘 기업이 된 사례도 꾸준히 나타나고 있다. 해외에서 성공한 선배 창업자들의 멘토링이 글로벌 비즈니스를 계획하는 한국 스타트업들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이번에 처음으로 글로벌 액셀러레이터가 된 13개 스타트업들은 약 23 대 1이라는 경쟁률을 뚫고 선발될 정도로 뛰어난 잠재력을 인정받은 만큼 이번 기회를 통해 가파른 성장을 이뤄 낼 것으로 롯데는 기대하고 있다.
롯데는 롯데벤처스를 통해 추후에도 계속해 스타트업의 해외 진출을 돕는 프로그램을 마련할 방침이다. 우선 내년에는 글로벌 액셀러레이터 2기를 뽑은 뒤 다시 한 번 실리콘밸리의 한인 창업가들과의 만남을 주선할 계획이다.
미국을 넘어 동남아 진출을 위한 교두보도 마련한다. 스타트업들이 베트남처럼 빠르게 성장 중인 많은 국가들로 나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글로벌 액셀러레이터 프로그램도 준비 중이다.
전영민 롯데벤처스 대표는 “스스로 기회를 찾아 도전하고 우리 사회를 더욱 발전시키려는 기업가 정신이 바로 ‘신격호 정신’”이라고 밝히며 글로벌 액셀러레이터 프로그램을 안착시켜 세계적인 스타트업을 키워 내겠다는 각오를 밝혔다.
▶인터뷰: 김희수 라이트브라더스 대표
“자전거 시장의 글로벌 ‘넘버원’이 목표”
“왜 중고 자전거를 믿고 구매할 수 있는 플랫폼은 없는 것일까.”
브랜드 컨설팅 전문가였던 김희수 대표가 2017년 자전거 중고 거래 플랫폼인 ‘라이트브라더스’를 창업하게 된 이유다. 라이트브라더스는 이번에 롯데의 글로벌 액셀러레이터 대상에 선발돼 1억원의 투자금을 받게 됐다. 또 내년 초 실리콘밸리 현지에서 성공한 한인 창업가들과도 만날 계획이다. 김 대표는 한경비즈니스와의 인터뷰에서 “이번 기회를 잘 살려 ‘자전거’ 분야의 글로벌 ‘톱’ 스타트업으로 발돋움하겠다”고 말했다.
-사업 아이디어가 기발하다.
“중고 자전거를 구매하려고 했는데 자칫하다가는 상태가 나쁜 자전거를 비싼 가격에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믿고 구매할 수 있는 판매처가 단 한 곳도 없었다. 자전거 인구가 계속 늘어나는 만큼 기업들이 중고차를 자체적으로 ‘인증’해 판매하는 것처럼 ‘믿고 살 수 있는 중고 자전거 거래 플랫폼을 만들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하게 됐고 비파괴 검사를 적용해 이런 문제를 해소할 수 있는 서비스를 론칭했다.”
-비파괴 검사 방식이란 무엇인가.
“자전거 역시 겉은 멀쩡해 보여도 내부는 전혀 다른 상황인 경우가 많다. 사람의 갈비뼈를 엑스선을 활용해 들여다보는 것처럼 라이트브라더스는 비파괴 검사를 활용해 중고 매물로 나온 자전거 프레임에 잔금이 없는지 등등을 직접 확인한다. 이같은 인증 시스템을 거쳐 자전거의 상태가 어떤지 정확하게 기재해 플랫폼에서 판매한다. 유명 브랜드를 카피한 가짜 상품들도 종종 매물로 등장하는데 비파괴 검사로 이런 불량품들을 걸러낼 수도 있다. 이렇게 소비자들이 믿고 구매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또 비싸게 중고 매물을 구매하는 것을 막기 위해 그동안 판매된 중고 자전거 데이터를 활용해 대략적인 시세 서비스도 제공하고 있다.”
-어떻게 이런 기술을 갖추게 됐나.
“원래 브랜드 컨설턴트로 일했다. 자전거와는 전혀 무관한 분야에서 일했기 때문에 고객들에게 신뢰를 주기 위해선 글로벌 넘버원 회사의 힘을 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비파괴 검사기 분야에서 최고로 평가받는 독일의 한 회사에서 약 3억원에 기계를 수입한 뒤 자전거에 맞게 개조해 서비스를 제공했다. 이와 함께 기술쪽 인재들을 채용하고 연구·개발(R&D)에도 매달렸는데 그 결과 현재는 자체적으로 비파괴 검사 기계를 만들 수준까지 R&D가 진행된 상태다.”
-스타트업을 이끌면서 어려움은 없었나.
“창업 초기만 해도 우리 회사를 작은 자전거 가게 정도로 보는 사람들이 많았다. 따라서 투자 유치에 어려움을 겪었다. 이런 와중에 롯데벤처스 엘캠프에 지원했는데 입주 기업에 선정되면서 반등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일단 엘캠프 소속 스타트업이 되니 라이트브라더스를 보는 시선들이 달라졌다. 사업 방향 등에 대해서도 롯데벤처스 직원들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고 함께 입주한 네이버와 같은 정보기술(IT) 기업 출신 창업가들과 자연히 교류하게 되면서 좋은 인맥도 쌓았다. 또한 롯데벤처스 측에서 롯데마트·롯데렌탈 등 계열사들과 협업의 기회를 제공해 성장할 수 있는 발판도 마련할 수 있었다.”
-이번에 롯데 글로벌 액셀러레이터에 뽑혔다.
“둘도 없는 좋은 기회다. 미국은 세계 최대의 자전거 시장이다. 그런데 아직까지 비파괴 검사를 활용해 안전성을 꼼꼼하게 따져 중고 거래를 하는 기업이 없다. 직접 시장을 들여다봤는데 전부 사람이 검수하고 있었다. 실리콘밸리 방문을 계기로 현지 판로 확대 벙법과 전략 등에 대한 조언을 전해 듣고 서비스를 선보일 계획이다. 동남아와 일본 등에도 진출해 자전거 분야의 일등 기업이 될 것이다.”
김정우 기자 enyou@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