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더 렌즈’ 부상하는 VC업계…주목 받는 여성 리더 4인방

젠더 다양성 갖춘 기업이 수익률도 높아…‘보이 클럽’ VC업계, 여성 심사역 비율 7% 불과

[스페셜]


경쟁력 있는 벤처기업을 발굴해 투자하는 벤처 캐피털(VC 혹은 신기술 금융사 및 창업 투자회사)업계는 흔히 ‘보이 클럽’으로 통한다. 이는 실리콘밸리를 포함한 전 세계 글로벌 VC업계 모두에 해당되는 말이고 물론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최근 VC업계에 ‘젠더 렌즈 투자(GLI : Gender lens investing)’가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젠더 렌즈’라고 하면 자칫 ‘여성에게 투자하라’처럼 들리지만 분명한 차이가 있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한쪽에만 편향된 기업에 투자할 때보다 ‘젠더 다양성’이 갖춰진 스타트업에 투자하는 경우 훨씬 더 높은 수익률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요점이다. 이는 ‘투자를 결정하는’ VC 업체들에도 마찬가지다. 여성 리더의 비율이 높은 VC들의 투자 수익률이 더 높다는 것이다. VC업계가 ‘보이 클럽’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민을 시작한 이유다.

“여성에게 투자하면 수익률 높다”…젠더 렌즈 투자 관심

2018년 글로벌 컨설팅 업체인 보스턴컨설팅그룹(BCG)은 ‘왜 여성 창업가가 운영하는 스타트업에 투자하는 게 더 나은가(Why Women-Owned Startups Are a Better Bet)’란 제목의 보고서를 발간했다. 핵심을 요약하면 이렇다. 실리콘밸리의 350개 스타트업을 분석한 결과 남성 창업가들이 평균 212만 달러의 자금을 유치할 때 여성 창업가들의 평균 유치 자금은 93만5000달러에 그쳤다. 남성 창업자들에 비해 절반에도 못 미치는 금액이다. 스타트업 투자 시장에 너무나 공고한 ‘유리 천장’이 존재하는 것이다. 하지만 수익률은 여성 창업가들이 더 높다. 남성 창업가들이 평균 66만2000달러의 수익을 낼 때 여성 창업가들은 평균 73만 달러의 수익을 창출했다.

자칫 ‘여성 창업가들이 더 높은 수익률’을 낸다는 결론으로 오해하기 쉽다. 하지만 이는 스타트업을 이끄는 리더팀의 ‘젠더 다양성’과 연관이 깊다. 지난해 발표된 보고서인 맥킨지글로벌 연구소의 ‘다양성이 이긴다’는 ‘젠더 다양성’과 ‘수익률’의 관계를 명확하게 짚고 있다. 이 보고서는 전 세계 15개 국가에서 1000개 이상의 업체들을 조사했는데 인종적·성별 다양성이 높은 기업(상위 25%)들이 동종업계의 기업들보다 더 높은 성과를 낼 가능성이 28%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리더 그룹의 다양성이 ‘포용성’이 높은 조직 문화로 연결될 수 있고 이를 통해 편견을 배제하고 보다 다양한 관점에서 사안을 바라보고 과감한 시도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 보고서에 따르면 핵심적인 의사 결정권을 갖고 있는 ‘리더팀’의 10% 이상이 여성으로 구성된 기업의 경우 모든 리더가 남성으로 구성된 기업들보다 수익률이 25% 높고 리더팀에 여성이 30% 이상의 비율을 차지하는 기업은 여성 리더가 없는 기업들보다 수익률이 48%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모건스탠리캐피털인베스트먼트(MSCI)가 2015년 펴낸 보고서의 결과와도 일맥상통한다. 1634개 기업을 조사한 결과 여성 임원 비율이 높은 기업의 자기자본이익률(ROE)이 36.4% 높았다. 무엇보다 젠더 다양성이 높은 기업은 상대적으로 주가 변동성이 낮고 주가 하락이 적었다. 투자자들에게는 보다 ‘안정적인 투자처’가 될 수 있다는 얘기다.

최근 VC업계가 ‘젠더 렌즈 투자’에 관심을 갖는 것 또한 이와 같은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 여성에게 드리워진 ‘유리 천장’을 제거하고 젠더 다양성이 높은 스타트업에 대한 투자야말로 ‘높은 수익률’을 추구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 중 하나인 셈이다. 이처럼 ‘높은 수익률’에도 불구하고 VC 기업들의 여성 창업가가 이끄는 스타트업에 투자를 결정하는 데 보수적인 태도는 여전하다. 실제 중소벤처기업부에 따르면 2019년 기준 한국 여성 법인의 창업 비율은 26.8%에 달한다. 하지만 한국 여성 기업에 대한 투자 건수는 2020년 6.6%에 그친다. 여성 창업가들이 투자 유치에 성공하기가 그만큼 어렵다는 방증이다.

여성 파트너 10% 늘리면 펀드 수익률 1.5% 증가

문제는 VC업계가 ‘보이 클럽’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스타트업 투자를 할 때 ‘젠더 렌즈’를 적용하는 것 또한 쉽지 않다는 점이다. 투자를 받는 스타트업 창업가들뿐만 아니라 ‘투자를 결정하는’ VC업계의 젠더 다양성에 대한 논의가 필요한 이유다. 투자 결정권자의 절대 다수를 남성이 차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여성 창업가들이 이끄는 스타트업은 저평가되기 쉬운 게 사실이다.

특히 최근 들어 ‘젠더 렌즈 투자’가 더욱 강조되고 있는 건 팬데믹(감염병의 세계적 유행)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여러 보고서들과 연구 결과를 통해 ‘젠더 다양성과 수익률의 관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기 시작한 2015년 이후 느리지만 꾸준히 증가 추세를 그리고 있던 ‘젠더 렌즈 투자’ 규모가 팬데믹 기간 동안 오히려 위축된 것으로 나타난 것이다. 2020년 전체 스타트업 투자 금액 중 여성 창업가가 이끄는 스타트업에 대한 투자 금액은 2.2%(약 33억 달러)로 2019년 2.6%보다 줄었다. 한국은 물론 글로벌 VC업계에 ‘여성 리더’들의 역할이 그 어느때보다 중요한 시기인 셈이다.

하버드비즈니스리뷰는 VC업계 여성 심사역들의 진입 장벽이 높은 이유에 대해 “여성은 남성에 비해 위험을 회피하려는 성형이 강할 것”이라는 편견을 지적했다. 모험을 감행해야 ‘혁신’이 가능하고 혁신이 수익률로 돌아오는 VC업계에서 이와 같은 편견은 치명적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오히려 사회적인 환경과 여러 맥락을 고려해 필요하다는 판단이 선다면 여성들이 위험을 감수하는 데 더 적극적이라는 것이 하버드 측의 연구 결과다.

전 세계 여성 벤처캐피털리스트 커뮤니티인 ‘우먼 인 VC’에서 2020년 발간한 보고서에 따르면 여성 심사역이 여성 창업가에게 투자할 확률이 3배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명확히 할 것은 여성 투자자들이 ‘여성 창업가에게 그만큼 관대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알게 모르게 작용하고 있는 남성 창업가와 여성 창업가의 성별에 대한 편견 없이 투자를 진행할 가능성이 높고 그 결과가 높은 수익률도 나타나게 된다는 설명이다.

세계은행(WB) 산하 국제금융공사(IFC)의 2019년 보고서에 따르면 남성과 여성의 성별 균형이 잘 갖춰진 VC 업체들은 남성이나 여성 리더들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VC 업체들보다 20% 정도 높은 투자 수익률을 거둔 것으로 나타났다. 또 하버드비즈니스리뷰는 2018년 여성 파트너 수를 10% 늘린 VC 기업은 매년 펀드 수익률이 1.5% 증가하고 막대한 수익을 남기고 엑시트(투자 회수)에 성공하는 경우가 9.7% 증가한다고 분석한 바 있다. 하지만 이와 같은 결과에도 불구하고 우먼 인 VC에 따르면 2020년 기준 글로벌 VC 중 파트너급 이상의 핵심 결정권자 중 여성의 비율은 4%에 불과하다.

한국 VC업계, 돋보이는 ‘여성 리더’들

한국도 상황은 비슷하다. 현재 한국 VC업계에 종사하는 여성 심사역의 비율은 2020년 기준 7% 수준이다. 그만큼 보수적인 VC업계에 여성들의 진입 장벽이 매우 높다는 얘기다. 그중에서도 여성 대표나 파트너들은 손에 꼽을 정도다. 한국 VC업계에서 ‘다양성의 힘’을 보여주고 있는 여성 리더들의 활약을 살펴봤다.

정신아 카카오벤처스 대표
글로벌 빅테크 기업 구글은 구글벤처스를 통해 우버·에어비앤비·블루보틀 등에 투자해 동반 성장하며 벤처 생태계를 키웠다. 이를 통해 쏠쏠한 투자 수익을 낸 것은 기본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플랫폼 기업인 카카오 역시 ‘카카오벤처스’를 중심으로 한국 벤처 생태계를 키우는 데 집중하고 있다. 현재까지 3400억원 이상의 자금을 운용하며 200개 이상의 기업에 투자해 왔다.

정신아 카카오벤처스 대표/ 사진=카카오벤처스

정신아 대표는 2018년 이후 카카오벤처스의 수장을 맡아 투자를 이끌고 있다. 정 대표는 보스턴컨설팅그룹·이베이·네이버를 거쳐 2013년 카카오벤처스의 전신인 케이큐브벤처스에 합류했다. 대기업에서 경력을 쌓아 왔지만 정 대표는 주로 이들 기업에서 신사업 론칭을 주도하는 역할을 맡으며 전문성을 인정받았다. 정 대표는 VC를 스타트업의 ‘조력자’라고 묘사한다. 그만큼 투자하고 있는 스타트업 대표들과 자주 만나며 깊은 유대감을 쌓아 나가는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스타트업과 VC의 돈독한 관계를 기본 바탕으로 하는 카카오벤처스는 실제로 투자한 곳들 중 소위 ‘대박’을 터뜨린 스타트업들이 상당하다. 왓챠·당근마켓·두나무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 중 중고 거래 플랫폼 당근마켓만 하더라도 지난 8월 3조원 정도의 기업 가치를 인정받으며 유니콘 기업(기업 가치가 1조원 이상인 스타트업)에 등극하기도 했다. 카카오벤처스가 투자한 스타트업 가운데는 여성 창업가들이 이끄는 스타트업에 초기 투자하며 ‘투자 물꼬’를 터준 사례 또한 적지 않다. 특히 카카오벤처스로부터 10억원의 투자를 받아 본격적인 첫 발을 내디뎠던 생활연구소는 매년 200%의 매출 신장을 이뤄 내며 무섭게 성장하는 중이다.

제현주 인비저닝파트너스 대표
임팩트 투자 전문 VC인 인비저닝파트너스는 지난 8월 ‘옐로우독’에서 새롭게 이름을 바꾸고 독립된 임팩트 투자사로 새로운 출발선에 섰다. 옐로우독은 2016년 이재웅 다음 창업자가 자본금 200억원으로 창업한 한국의 1세대 임팩트 전문 VC다. 제현주 옐로우독 대표가 인비저닝파트너스의 대표를 맡고 있고 지난 10월 19일 김용현 전 한화자산운용 대표를 공동 대표로 영입했다.

제현주 인비저닝파트너스 공동대표 / 사진=한국경제신문

제 대표는 한국 임팩트 투자업계를 선도하는 대표적인 리더다. 카이스트 산업디자인학과를 졸업하고 글로벌 컨설팅 기업 맥킨지, 투자은행 크레디트스위스, 사모펀드 운용사 칼라일 등에서 기업 재무·투자 전문가로 10여 년간 일하며 경력을 쌓아 왔다. 2010년 투자업계를 떠난 이후 10권이 넘는 투자 관련 서적을 번역하며 자본 시장과 투자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혔다. 협동조합을 창업하며 새로운 일의 방식을 경험하기도 했다. 2017년 옐로우독의 대표로 합류했다. 최근에는 임팩트 투자와 환경·사회·지배구조(ESG)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돈이 먼저 움직인다’를 출간하기도 했다.

2017년 첫 투자 이후 2021년 3월을 기준으로 인비저닝파트너스는 총 1200억원의 자금을 운용하며 29개 기업에 투자해 왔다. 2018년부터 ‘젠더 렌즈 투자’에 높은 관심을 보이며 한국 처음으로 여성 창업가 투자 전용 펀드 ‘힘을싣다 투자조합’을 결성하며 주목을 끌었다. 초기 여성 창업 기업을 발굴하고 집중적으로 투자하기 위한 펀드로, 정부 기관의 출자없이 순수 민간 자본 100%로 구성됐다. 이 ‘힘을싣다 투자조합’을 통해 첫 투자를 받은 스타트업이 유통되지 못하는 못생긴 농산물을 건강 가공식품과 대체 고기로 개발하는 푸드테크 스타트업 ‘지구인컴퍼니’다. 최근에는 거대한 시장이 만들어지고 있는 ‘기후 위기’ 등과 관련한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는 기업들에 대한 투자에 많은 관심을 두고 있다. 지난 9월 한국 첫 민간 자금 ‘기후 테크 특화 펀드’를 결성, 600억원이 넘는 투자 자금을 모으며 화제를 모은 바 있다.

황유선 HB인베스트먼트 대표
유망 중소 벤처기업에 투자하는 HB인베스트먼트는 두 명의 여성 리더가 공동 대표를 맡고 있다. 박하진·황유선 공동 대표다. 2020년부터 HB인베스트먼트 대표를 맡아 온 박하진 대표는 카이스트 경영정책학 학사, 경영공학 석사 출신으로 VC업계 입문 전 10년간 회계법인과 컨설팅 업체에서 컨설턴트로 일한 경력이 있다. 베넥스인베스트먼트·킨앤파트너스 등에서 경력을 쌓아 2018년 HB인베스트먼트에 합류했다.

황유선 HB인베스트먼트 공동대표 / 사진=HB인베스트먼트

벤처 투자업계의 ‘대모’로 불리는 황유선 대표는 컴퍼니케이파트너스 부사장직을 내려놓고 지난 8월 HB인베스트먼트의 새로운 대표로 영입됐다. 2000년대 여성 심사역의 불모지나 다름없던 VC업계에 발을 들인 뒤 삼성벤처투자·NHN인베스트먼트 등을 거쳤다. 한국전자통신연구원의 연구원 출신으로 정보통신기술(ICT)·테크 등의 분야에서 전문성을 바탕으로 소위 ‘대박 투자’ 실적을 거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디지털 엑스레이 디텍터 제조 기업 ‘뷰웍스’가 대표적이다. 2006년 20억원을 투자해 상장 후 2010년 5.8배의 수익률을 기록하며 회수하는 데 성공했다.

송인애 본엔젤스 벤처파트너스 대표
본엔젤스 벤처파트너스는 2007년 설립된 한국 첫 초기기업 전문 투자(엔젤 투자) VC다. 한국 1세대 벤처 창업가들이 뭉쳐 초기 스타트업에 대한 엔젤 투자와 액셀러레이터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며 한국 VC 문화를 바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큰 영향을 미쳤다. ‘네오위즈’와 ‘첫눈’ 등을 성공시키며 인터넷업계 ‘미다스의 손’으로 명성을 떨친 장병규 크래프톤 의장이 대표를 맡아 오다 2015년 강석흔·송인애 각자 대표 체제에 돌입해 현재까지 이어 오고 있다. 현재까지 총 200개 이상의 스타트업에 투자를 진행했는데 그중 유니콘 기업으로 성장한 기업만 ‘배달의민족’을 포함해 네 곳이다. 특히 배달의민족은 2011년 3억원을 투자한 지 8년 만인 2019년 딜리버리히어로에 지분을 매각하며 3000억원을 회수하는 데 성공했다. 8년 만에 원금 대비 약 1000배가 넘는 투자 수익을 기록한 셈이다. 그만큼 한국 VC업계에서 ‘남다른 존재감’을 자랑하는 VC다.

송인애 본엔젤스 벤처파트너스 각자대표 / 사진=본엔젤스 벤처파트너스

본엔젤스는 출범 당시부터 3인의 파트너(장병규·강석흔·송인애)들의 회의를 통해 만장일치가 이뤄져야만 투자를 진행하는 원칙으로 잘 알려져 있다. 투자처에 대한 각기 다른 시각이 제시되니 입체적인 분석이 가능하고 결과적으로 성공 확률이 높아지는 것이다. ‘네오위즈’와 ‘첫눈’ 등으로 창업 성공 경험이 있는 장 고문, 우주커넥션스 등의 창업 성공 경험이 있는 강 대표와 달리 미래에셋증권 애널리스트 출신의 송 대표는 본엔젤스 합류 전 유일하게 창업 경험이 없다. 하지만 오히려 송 대표의 이처럼 ‘다른 경력’이 투자 논의를 더욱 균형 잡히게 만들어 주고 성공적인 초기 스타트업 투자를 이끌어 내는 데 큰 역할을 한 것이다. 현재 본엔젤스의 파트너는 총 7명으로, 파트너가 많아지며 만장일치제는 불가능해졌지만 여전히 파트너들 간의 치열한 회의를 거쳐 ‘3인 이상’ 파트너의 찬성이 있어야 투자를 진행하는 방식을 고수하고 있다. 본엔젤스는 송 대표 외에도 컴투스 창업자인 박지영 전 대표가 2015년부터 파트너로 활약하고 있다.

이정흔 기자 vivaj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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