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제 혁신 없는 ‘진두지휘’…회사는 무너진다[박찬희의 경영 전략]

잘못된 체제는 혼란의 원인…치열한 현안 대응으로 개편 실마리 마련해야

[경영 전략]


전략 경영에는 ‘전략과 구조(strategy vs structure)’에 대한 고전적 논의가 있다. 기업의 조직은 전략을 수행하는 수단이라는 현안 중심의 접근과 조직의 체제와 거기에서 파생되는 구성원의 행동이 전략을 만든다는 구조 중심의 접근이 대립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사업 방향의 설정과 사업 아이템 개발과 같이 ‘무엇을 할 것이냐(what to do)’를 중시하는 경우가 전자에 해당된다. 기업 고유의 자원과 역량, 의사 결정과 집행의 절차(process)와 같이 ‘어떻게 할 것이냐(how to do)’에 초점을 두는 경우는 후자다.

물론 이런 논점의 대립은 그리 절박하지 않은 학자들의 일이고 현실의 경영자는 어떤 사업을 할지 고민하면서 회사의 자원과 역량을 살피고 동시에 답을 찾아 간다.

경영학 원론에도 나오는 강약점과 기회 위협을 대비한다는 ‘SWOT 기법’도 사실은 사업 전략을 구조와 역량과 함께 따져보는 생각의 틀이다. 물론 훌륭한 학자는 이런 경영자의 동시적 문제 해결을 다루는데, 미국의 산업화를 이끈 주요 대기업들의 성장을 현안들 속에서 전략을 만들고 동시에 조직을 설계하고 진화시킨 경영자들의 실제 활동들로 설명한 챈들러(Chandler)의 연구가 대표적이다.
체제가 잘못되면 되는 일이 없다세계적 대기업으로 성장한 M그룹의 대표적인 전문 경영인(CEO)이었던 L 사장은 최근 외국계 사모펀드와 한국 기업들의 투자를 받아 도시 기반 시설 개발을 전문으로 하는 중대형 건설사를 경영하게 됐다.

빠른 사업 판단과 추진력으로 직접 사업 개발과 영업에 나선 L 사장은 이른 시일에 수주 실적을 올렸지만 회사 내부의 혼선으로 금융 조달에 문제가 발생하더니 시공 현장에서 자재 수급에 차질이 생기고 안전사고가 이어지는 등 문제가 끊이지 않아 고민이다.

한때 L 사장과 함께 ‘드림 팀’이라고 불리며 같이 일하던 중역들을 영입했지만 이들도 속출하는 문제들 앞에서 무력하기 그지없다.

L 사장과 그의 ‘드림 팀’은 과거 대기업의 체제 속에서 늘 함께하던 사람들과 눈치껏 일하는데 익숙했을 뿐이다.

M그룹의 체제에서는 서로 수십 년 함께해 온 사람들끼리 도와 가며 혹시 나중에 문제가 생기면 함께 책임질 생각으로 현안을 풀었지만 서로 다른 곳에서 살아 온 잘 모르는 사람들이 모인 회사에서는 사정이 다르다.

조달본부가 현장에 자재가 급히 필요하다고 내부통제 부문과 충분히 협의하지 않고 전화 한 통으로 발주에 들어가면 나중에 누구도 도와주지 못한다.

L 사장이 나선다고 일이 해결되지도 않는다. 수십 년 같이 일하며 신뢰를 쌓은 것도 아니고 최고경영자(CEO)의 현안 개입과 책임 부담에 대한 명확한 장치를 두지 않은 상황에서 L 사장의 권한도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당장 일이 급하고 체면도 있어 무리하게 개입하면 이것이 선례로 남아 회사의 원칙과 체제가 다 흔들린다.

사실 과거 M그룹에서 L 사장의 추진력은 ‘창업자 회장님’의 절대적인 뒷받침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앞으로 몇 년을 같이할지 모르는 L 사장에게 생전 처음 만난 직원들이 ‘위험을 무릅쓴’ 무리한 충성을 할 리가 없고 과거 함께 일했던 ‘드림 팀’ 임원들도 전혀 다른 여건에서 L 사장만 생각할 수 없다.

회사가 팔리거나 CEO가 바뀌면 당장 자기들 처지도 난감하기 때문이다. L 사장은 M그룹의 체제에서 선택된 사람일 뿐 스스로 새로운 체제를 만들고 이끌어 갈 능력자는 아니었던 것이다.

L 사장이 현안을 제대로 해결하려면 ‘긴급 현안에 대한 해결 절차’를 만들고 구체적 요건과 함께 경영자를 비롯한 관계자들의 역할과 책임을 명확히 설정해야 한다. 긴급 현안이 아니더라도 문제 해결의 절차 자체를 대폭 줄여 숨고 떠넘기다가 일이 망가지는 여지를 없애야 한다. 위험과 어려움을 부담한 일에 대해서는 확실한 보상이 돌아가게 만드는 것도 중요하다.

절대적 권한을 가진 조정자 없이 다양한 사람들의 이해관계가 얽혀 일이 엉망이 되는 경우는 너무나 흔하다. 개인적 이해관계를 넘어 집단적 구조가 만들어지고 나름의 신념을 더하면 일은 더욱 복잡해진다.

사실 정치판이 대표적인 경우인데, 지금 이 글을 쓰는 시점에서 주요 정당들이 선거 기구를 놓고 고민인 것도 잘못 만들어진 체제는 그 안에서 끊임없이 문제가 발생하고 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현안 대응 없는 노곤한 체제 개편무역업에서 시작해 반도체 장비 제조업을 통해 최근 크게 성장한 P그룹은 Q 사장으로의 2세 승계 작업을 진행 중이다. 경영대학원을 마치고 컨설팅 실무를 거쳐 부장으로 입사한 지 5년, Q 사장은 회사의 진부한 문화와 체제가 답답하다.

경제와 산업의 동향을 전문적으로 분석하지 못한 주먹구구식의 사업 계획, 금융 시장의 요구를 따라잡지 못하는 ‘경리’ 수준의 재무 관리를 보면 난감할 따름이다.

Q 사장은 컨설팅 회사를 불러 회사 전반의 의사 결정과 정보 공유 및 지원의 체제를 다시 설계하고 구성원들에게 변화의 필요성과 방향을 강조한다. 외부 전문가와 함께하는 토론과 사례 연구에는 전문적 경영 기법과 개념들이 늘 등장한다. 그때그때 다른 주먹구구식 일처리를 막기 위해 사안마다 상세한 매뉴얼을 만들었다.

그런데 Q 사장이 만드는 새로운 체제와 운영 방식은 수시로 발생하는 현안들 앞에 무력하다. 직원들은 늘 하던 방식과 달라 정신이 없고 자금 관리, 자재 수불, 계약 관리 등의 세부적인 내용들은 미처 마련하지 못해 책임 소재가 모호하다.

당장 실무 직원들은 문서 작성 자체가 난감할 때가 있다. 이미 실무에서 멀어진 고참 부장이나 임원들에게 새로 배워 관리 감독까지 하는 일은 너무 어렵다. 새로운 체제와 운영 방식이 혼선을 겪으면서 Q 사장에 대한 구성원의 기대는 불안으로 바뀌고 문제가 발생하면 책임을 피할 궁리만 하는 증상이 도처에서 목격된다.

체제 개편은 회사 일을 잘하기 위한 것이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체제 개편의 방향을 잡았다면 그 틀은 구체적 현안을 풀어 가는 과정에서 다듬어야 한다.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아이디어가 체제 개편의 시작일 때 제대로 된 변화가 가능하다.

미래의 기술 환경에 대한 전문적 분석은 한두 번 떠들고 마는 회의 자료가 아니라 사업 계획과 투자 유치에 반영하기 위한 것이고 직접 만들고 파는 사람들의 솔직한 의견에 비춰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손자병법’은 군대의 편제와 운영 체제를 지휘관의 작전과 병력 운용과 함께 다루고 있다. 잘못되면 떼죽음으로 몰리는 전쟁 상황에서 한가하게 미래를 위한 체제 개편만 논의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더 나은 편제와 무기, 그 운영 체제를 구상하고 실전에 도입하면 더 확실한 승리를 거둘 수 있다.

정사 ‘삼국지’는 제갈공명을 절묘한 작전보다 군대를 조직하고 운영하는 데 탁월했다고 묘사하고 있는데, 역사학자 진순신은 이를 실패하면 나라가 흔들리니 기책(奇策)을 구사할 수 없고 체제를 더욱 단단하게 다져야 하는 약소국의 슬픔이라고 해석한 바 있다.

이순신 장군의 경우를 보자. 함포 전술을 포함한 함대 기동을 위해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며 운영 체제를 개편했을 것이고 ‘난중일기’에는 지휘관들과 실전에서 발견된 문제들을 놓고 고심하는 장면들이 나온다.

경영학 책이나 논문에는 조직과 운영 절차는 나와도 구체적 현안은 나오지 않는다. 세상 물정 모르는 교수들이 써서인지, 학교여서 일반론만 다뤄서인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현실의 경영자는 미래를 위한 큰 틀을 구상하면서 다른 한편 당면한 문제를 풀면서 체제 개편의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 세상은 시시각각 달라지기 때문이다.

박찬희 중앙대 경영학부 교수
상단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