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미들 지난해 ETF 10조 순매수, 운용사 경쟁 불붙어
2위 미래에셋 약진, KB·한투도 맹추격
상장지수펀드(ETF) 시장의 강자로 군림해 온 삼성자산운용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업계 2위인 미래에셋자산운용을 비롯해 KB자산운용·신한자산운용·한국투자신탁운용 등 운용사들이 삼성맨을 영입하거나 수수료를 낮추고 상품을 개발하는 등 공격적인 전략을 펼치며 삼성자산운용에 도전장을 내밀고 있다. 삼성자산운용은 그간 ETF의 선구자로 다른 운용사들과 앞도적인 점유율 격차를 보였지만 최근 들어 격차가 좁혀지고 있다.
박스권 코스피·MZ세대가 변수로
2002년 한국 1호 ETF인 코덱스(KODEX)200 ETF를 선보이며 ETF 시장의 포문을 연 삼성자산운용은 20년간 1위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최근 판도가 확 달라졌다. 5년 전만 해도 35조원대를 기록했던 ETF 시장 규모가 지난해 70조원을 돌파했다. 100% 이상 증가한 것이다. 개인 투자자들의 뭉칫돈도 10조원 정도 몰린 것으로 나타났다. ETF 시장이 한껏 달아오르면서 운용사들이 점유율 확보 경쟁에 가속 페달을 밟고 있다.
ETF가 왜 갑자기 인기를 끌고 있을까. ETF는 개별 주식처럼 거래할 수 있고 특정 주가지수의 움직임에 따라 수익률이 결정되는 펀드다. 코스피지수가 3000선을 놓고 오르락내리락을 반복하면서 직접 투자와 간접 투자의 장점을 모두 가진 ETF로 눈을 돌리는 개인 투자자들이 많아졌다는 분석이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지난 한 해 동안 개인 투자자들은 한국 상장 ETF를 약 9조7000억원어치 사들였다. 전년 대비 76% 늘어난 수치다. 현재 한국 증시에 상장된 ETF는 500개가 넘는다.
이 같은 흐름은 올해도 이어질 것이란 게 업계의 중론이다. 미국 중앙은행(Fed)의 정책 불확실성에 대한 우려가 퍼지면서 코스피가 박스권 장세를 이어 갈 것이란 전망이 나오고 있고 개인 투자자들이 한국은 물론 해외 ETF 투자에도 관심을 보이고 있다. 또 주요 시중은행들이 퇴직연금 ETF를 대거 출시하면서 시장 규모가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여기에 정부는 ETF 시장 활성화를 위해 규제 완화를 검토 중이다.
또 다른 변수는 소비의 주측으로 떠오른 MZ세대(밀레니얼+Z세대)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이후 이들을 중심으로 한 새 투자층이 자본 시장에 대거 뛰어들었다. MZ세대는 ‘영끌(영혼까지 끌어모아 투자)’해 부동산·주식·코인 등에 투자한다. 투자 성향만 보면 4050세대들보다 훨씬 더 공격적이다. ETF를 선택할 때도 이런 투자 성향을 보이는데 지난해 미래에셋자산운용의 ‘타이거(TIGER)’ 브랜드가 대박을 쳤던 이유다. 타이거 브랜드는 기술 기반의 해외 혁신 기업에 집중 투자하는 테마형 ETF다. 테마형 ETF는 펀드매니저가 상대적으로 적극적으로 운용하는 액티브 ETF의 한 종류다. 액티브 ETF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펀드매니저의 실력이다. 종목 구성과 비율 등을 정할 때 지수를 그대로 추적하는 ETF보다 펀드매니저의 권한을 조금 더 반영한다.
미래에셋자산운용은 이 브랜드를 앞세워 삼성자산운용을 맹추격했다. 미래에셋자산운용의 점유율은 2020년 말 25.3%에서 지난해 35%로 10%포인트 가까이 높아졌다. 반면 지난해 삼성자산운용의 ETF 시장점유율은 4년여 만에 50%가 깨졌다. 2020년만 해도 25% 이상 벌어졌던 삼성자산운용과 미래에셋자산운용의 점유율 격차가 한 자릿수로 좁혀진 것이다. KB자산운용·한국투자신탁운용 등도 1·2위와 격차를 좁히기 위해 맹렬히 추격 중이다.
너도나도 ETF 보수 인하
올해 들어선 자산 운용사들의 ETF 시장 경쟁이 더욱 치열해졌다. 우선 삼성자산운용·미래에셋자산운용·KB자산운용 등 대형 운용사들이 보수 인하에 팔을 걷고 나섰다.
올해 처음으로 ETF 운용 보수를 내린 곳은 미래에셋자산운용이다. 미래에셋자산운용은 ‘타이거(TIGER) 미국S&P500레버리지 ETF’의 총보수율을 연 0.58%에서 연 0.25%로 0.33%포인트 내렸다. 한국거래소에 상장된 해외 지수 레버리지 ETF 중 최저 수준의 보수율이다. 지난해에도 삼성자산운용을 따라 잡기 위해 TIGER 레버리지, 인버스의 총 보수를 국내 최저 수준으로 낮춘 바 있다.
KB자산운용은 ‘KB스타(STAR) 헬스케어’, ‘KBSTAR 200 건설’, ‘KBSTAR200 IT’ 상장지수펀드(ETF) 3종의 보수를 0.05%로 인하했다. 이현승 KB자산운용 대표는 지난해 단독 취임한 이후 대표 지수 상품의 보수를 대폭 내리는 전략을 취하고 있는데, 올해 역시 언론을 통해 ‘ETF 최저 보수 운용사’로의 행보를 대대적으로 예고하기도 했다. 한국투자신탁운용도 지난해 말 한국의 ETF 5종에 대한 보수를 업계 최저인 연 0.02%로 내렸다.
삼성자산운용 역시 이에 대응하기 위해 최근 주요 ETF 7종의 운용 보수를 인하했다. 한국 주식형 2종(KODEX 헬스케어, KODEX 200ESG), 미국 주식형 2종(KODEX 미국반도체MV, KODEX 미국스마트모빌리티), 미국 리츠 1종(KODEX 다우존스미국리츠(H)), 국내외 채권형 2종(KODEX 10년국채선물, KODEX 미국채10년선물) 등이다. 총보수는 KODEX 10년국채선물은 0.07%, 나머지 ETF는 0.09%로 낮아진다.
삼성맨의 경쟁사 이동도 삼성자산운용이 촉각을 곤두세우는 한 요인이다. 우선 ‘ETF의 산파’로 불리는 배재규 삼성자산운용 부사장이 21년 만에 삼성을 떠나 한국투자신탁운용 수장으로 이동한다. 그는 2000년대 초반에 ETF를 한국에 도입하기 위해 직접 금융 당국을 찾아가 설득 작업에 나서기도 했고 2002년엔 한국 1호 ETF인 KODEX200 ETF를 선보이는 등 삼성자산운용을 ETF 시장의 최강자로 끌어올린 주역으로 평가받는다.
미래에셋자산운용은 김남기 ETF운용부문장을 ETF 부문대표로 선임하며 ETF 부문에 더 힘을 줬는데, 김 대표는 삼성자산운용에서 ETF 운용팀장으로 일하던 삼성 공채 출신이다. 2019년 김 대표를 ETF 운용본부장으로 영입한 미래에셋자산운용은 2년 만에 상무를 거쳐 전무로 초고속 승진시켰다.
삼성자산운용으로서는 위기감이 남다른 상황인 셈인데, 외부 인력을 영입하며 분위기 반전을 꾀하고 있다.
삼성자산운용은 지난해 12월 수장을 교체했다. 심종극 전 대표의 임기가 1년 정도 남았지만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뉴 삼성’ 기조를 토대로 신임 인사를 단행하는 쇄신을 택했다.
새 지휘봉의 주인공은 외국계 금융사에서 잔뼈가 굵은 서봉균 대표다. 서 신임 대표는 1967년생으로, 심종극 전 대표보다 다섯 살 아래다. 1990년 한양대 도시공학과를 졸업한 후 모간스탠리·씨티그룹·골드만삭스 한국 대표를 거쳐 2020년 삼성증권에 합류해 세일즈앤드트레이딩(Sales&Trading) 부문장을 맡았다. 그는 금융 투자업계에서만 30여 년간 근무한 베테랑이다. 그중 절반은 골드만삭스에서 보냈는데 이곳에서 증권 담당 총괄 등을 지냈다.
삼성자산운용의 이번 인사는 앞선 수장 인사와 비교하면 외부 수혈이란 점에서 차별점이 있다. 박준현 전 사장(2012년 선임)을 비롯해 윤용암 전 사장, 구성훈 전 사장, 심 전 대표 등 모두 삼성생명 출신이다. 서 신임 대표가 삼성생명 요직 인사들이 수장을 맡던 관행을 깨고 오른 만큼 ETF 시장에서 삼성의 아성을 다시 세울지 귀추가 주목된다.
김태림 기자 ta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