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명 남은 원전 조기 폐쇄하더니 ‘원전 유턴’ 행보
정권 말기 책임 회피 지적 나와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정책에 앞장서 왔던 한국수력원자력(이하 한수원)이 정권 말기에 접어들면서 친원전 행보를 이어 가고 있다.
정부는 원전의 비율을 낮추면서 태양광 등 신재생에너지의 비율을 높이는 에너지 전환 정책의 일환으로 탈원전 정책을 추진해 왔다.
한수원은 정권 말기에 들어서자 탈원전 정책에 반하는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한수원이 월성 원전 1호기 조기 폐쇄로 대표되는 탈원전 정책을 최일선에서 수행해 온 한국 최대 에너지 공기업이라는 점에서 업계에선 이례적이라는 반응이다.
탈원전과 거리 두는 한수원, 출구전략 돌입
정재훈 한수원 사장은 최근 1년간 원자력 발전에 대한 소신 발언을 쏟아냈다. 그는 2021년 10월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국정 감사(국감)에서 원전 없이 탄소 중립이 가능하느냐는 질문에 불가능하다고 밝혔다.
정 사장은 “과학기술 정보에 입각해 보면 원자력 발전은 안전하다는 데 동의한다”며 “탄소중립위원회에 의견을 제안할 때도 원자력 발전과 신재생에너지를 병행해야 순조로운 탄소 중립이 가능하다고 했다”고 말했다.
탈원전 정책으로 5년째 공사가 중단된 신한울 3·4호기에 대해서도 “정부 정책이나 전력 수급을 떠나 원자력 생태계만을 따져본다면 한수원 최고경영자(CEO)로서는 신한울 3·4호기 건설이 재개돼 숨통을 틔웠으면 좋겠다는 개인적 바람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한수원은 한국 원전의 안전성을 강조하는 설명 자료를 국회에 제출해 탈원전 정책의 논거였던 ‘원전은 안전하지 않다’는 주장도 일축했다. 올해 1월 김도읍 국민의힘 의원실에 제출한 자료에서 한수원은 “한국에서 운영되는 원전은 안전하다”고 강조했다.
한수원은 “원전 운영의 최우선 핵심 가치는 언제나 안전”이라며 “한국에서 원전이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운영되면서 값싸고 안정적인 전력 공급에 기여한 바가 커 안정성·경제성 등이 부각됐지만 한 차례의 사고도 없이 운영됐던 것은 원전 안전에 대한 믿음과 신뢰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말했다.
또한 원전에서 발생하는 방사성 물질은 부지 내에서 안전하게 관리해 외부에 유출되는 것을 철저하게 방지하고 있고 법적 배출 관리 기준 이내로 안전하게 관리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정 사장은 최근 소형 모듈 원자로(SMR) 홍보에도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한수원은 2012년 표준 설계 인가를 받은 SMR과 중소형 원전(SMART) 등 소형 원전 기술을 개량해 경제성과 안전성을 대폭 향상시킨 ‘혁신형 SMR’을 개발하고 있다. 2028년까지 SMR 표준설계 인허가를 완료하고 2030년 본격적으로 수출 시장에 뛰어든다는 계획이다.
일각에서는 한수원의 탈원전→친원전으로의 방침 변화에 대해 탈원전 책임론을 회피하기 위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3월 대선을 앞두고 탈원전 출구전략에 돌입했다는 분석이다. 정권이 바뀌면 탈원전 정책은 폐기될 가능성이 높다.
야권의 유력 대선 주자인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는 탈원전 백지화를 내걸고 신한울 3·4호기 건설도 재개하겠다는 구상이다.
여권의 유력 대선 주자인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는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정책을 계승하지 않겠다고 선을 긋고 현재 건설 중인 원전을 2085년까지 쓰되 신규 원전을 짓지 않는 ‘감원전’ 정책을 공약으로 내세우고 있다. 누가 정권을 잡든 원전 정책의 변화가 불가피한 상황이다.
정 사장은 탈원전 정책에 반대한 이관섭 전 한수원 사장이 중도 사퇴한 후 2018년 4월부터 한수원을 이끌어 왔다. 2021년 한 차례 연임에 성공해 2022년 4월 임기 만료를 앞두고 있다. 정 사장 취임 후 한수원은 2018년 6월 이사회를 열고 월성 1호기 조기 폐쇄와 천지 1·2호기, 대진 1·2호기 등 4기의 신규 원전 계획을 취소했다.
수명 만료 시점이 남은 월성 1호기 조기 폐쇄는 문 대통령의 대선 후보 시절 핵심 공약 중 하나였다. 신규 원전 4기는 설계 또는 부지 매입 단계에서 백지화됐다. 탈원전 정책이 담긴 에너지 전환 로드맵과 제8차 전력수급기본계획을 그대로 이행한 것이다.
정 사장은 월성 1호기 경제성 조작에 관여한 혐의로 백운규 전 산업통상자원부 장관, 채희봉 전 청와대 비서관과 함께 직권남용·업무방해·배임 등의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다.
검찰은 정 사장이 월성 1호기 즉시 가동 중단에 따른 정부의 한수원에 대한 손해 보전 여부가 불투명한 상황에서 백 전 산업통상부 장관의 월성 1호기 즉시 가동 중단 지시에 따라 월성 1호기의 경제성이 없는 것처럼 경제성 평가 결과를 조작하고 조작된 결과로 2018년 6월 이사회의 의결을 이끌어 내 1481억원 상당의 손해를 가했다고 보고 있다.
한수원은 대표적 탈원전 사업 중 하나인 새만금 수상태양광 사업에도 깊숙이 관여하고 있다. 감사원 감사 결과 한수원이 사업 경험도, 설계 면허도 없는 현대글로벌과 설계 용역 계약을 체결한 것으로 밝혀져 특혜 논란 등으로 3년째 표류하고 있다.
정 사장이 신한울 3·4호기 건설 재개에 대해 언급한 것도 배임 이슈를 의식한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건설이 취소되면 두산중공업이 한수원을 상대로 손해 배상 소송을 제기할 가능성이 높고 정 사장의 법적 책임 문제가 불거질 수 있다.
EU 택소노미에도 포함…원전 회귀는 세계적 추세
탈원전에 발맞추던 한수원의 친원전 행보에 대한 또 다른 분석으로, 원전에 대한 재평가가 전 세계적으로 이뤄지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정부가 세계적 흐름이라고 했던 탈원전 정책의 명분도 사라지는 추세다.
글로벌 에너지 대란이 신재생에너지의 공급 불확실성, 화석 연료 가격 급등을 불러오면서 탄소 중립을 실현하기 위한 대안으로 원전이 다시 떠오르고 있다. 유럽과 미국을 중심으로 원전 회귀 움직임이 커지면서 세계 주요국들은 친원전 기류에 올라타고 있다. 유럽연합(EU)은 원전을 녹색 에너지로 인정했다.
원전은 탄소 배출이 거의 없어 탄소 중립을 실현하기 위한 과도기 에너지원으로 주목받고 있다. 최근 EU 집행위원회는 원전을 녹색 분류 체계(택소노미)에 포함했다. 택소노미는 녹색 투자를 받을 수 있는 친환경 산업과 그렇지 않은 산업을 구분하는 정책 기준이다.
2011년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원자력 의존도를 축소하는 정책을 펴온 프랑스는 최근 원전 추가 건설 계획을 밝히며 원전 회귀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4월 대선을 앞둔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2월 10일(현지 시간) 추가 원전 건설을 발표하며 원전 르네상스를 이룩하겠다고 선언했다.
신규 원전 6기를 새로 짓고 8기를 추가 건설한다는 계획이다. 이로써 프랑스는 2050년까지 30년 내 총 14기의 신규 원전을 짓게 된다.
취임 당시 원전 의존도를 75%에서 50%로 낮추겠다고 공언했던 마크롱 대통령이 취임 공약을뒤집고 원전 회귀로 돌아선 이유는 탄소 중립 달성과 최근 유럽을 강타한 에너지 대란 때문이다. 프랑스는 전력의 70%를 원전을 통해 얻고 있으며 원전을 수출하는 세계 최대 원전 강국이다.
원전으로 회귀하는 세계적 추세와 달리 정부의 에너지 정책은 여전히 ‘거꾸로’ 가고 있다. 정부는 지난해 말 ‘한국형 녹색 분류 체계(K택소노미)’ 최종안에서 원전을 배제했다. 이에 따라 폴란드 등 해외 원전 프로젝트 수주에 나선 한수원이 자금 조달의 어려움 때문에 원전 수출 경쟁력이 저하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한수원은 2021년 12월 환경부에 제출한 보고서를 통해 원전의 장점과 필요성을 강조하며 K택소노미에 원전을 포함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한수원은 보고서에서 “원전은 탄소 배출이 매우 적은 초저탄소 전원”이라며 “탄소 중립과 국가 온실가스 감축 목표(NDC) 상향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재생에너지의 한계를 완화해 주는 현실적 대안”이라고 밝혔다.
경제계도 우려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는 1월 4일 EU 집행위원회가 원전을 택소노미에 포함하기로 한 것처럼 한국도 원전을 녹색 에너지로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경련은 “정부는 K택소노미 가이드라인을 재검토해 원자력 발전을 녹색 기술에 포함해야 한다”면서 “미국과 중국에 이어 EU도 원전을 탄소 중립의 핵심 수단으로 삼는 데 반해 한국만 거꾸로 가고 있다”고 지적했다.
안옥희 기자 ahnoh05@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