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3년 밀라노에 가죽 매장 내면서 역사 시작[명품 이야기]

창업자, 여행 통해 패션에 눈떠…손녀, 가볍고 심플한 백팩·토트백 히트시켜 위기 탈출

[류서영의 명품 이야기] 프라다①

프라다 로고안 왕실문양 (DAL 1913 아래)/출처:인스타그램 prada

프라다의 역사는 1913년으로 거슬로 올라간다. 마리오 프라다가 동생 마티노 프라다와 함께 이탈리아 밀라노에 있는 쇼핑센터 갤러리아 비토리오 엠마누엘레 아케이드에 가죽 제품 전문 매장인 ‘프라텔리 프라다(프라다의 형제라는 의미)’를 열면서 시작됐다.

그는 부유한 공무원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유럽과 미국 전역을 여행했다. 패션 디자이너였던 마리오 프라다는 여행을 통해 패션과 세상에 대한 안목을 넓혔고 여행 중 상류 사회의 화려한 생활을 누린 경험을 바탕으로 고급 가죽 가방 브랜드를 론칭하고 판매를 시작했다.

그는 거북 껍데기와 바다 동물의 껍질 등 희귀한 소재를 들여와 고급스러운 가죽 상품을 만들었고 프라다는 곧 유명해졌다. 프라다는 1919년 이탈리아 사보이 왕실에 가방을 납품하는 공식 업체로 지정돼 왕가의 로고를 받았다. 이때 받은 왕가의 로고는 프라다 역삼각형의 로고 안에 오늘날까지 사용되고 있다.

프라다 설립자 마리오 프라다/사진출처:prada.com
대공황·2차 세계대전으로 쇠퇴기 맞아
갤러리아 비토리오 엠마누엘레에 있는 프라다 매장 입구에는 창업 당시의 간판이 남아 있는데 거기에는 ‘오제티디 루소(명품)’라고 쓰여 있다. 하지만 대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프라다는 쇠퇴하기 시작했다. 마리오 프라다는 아들인 알베르토 프라다에게 가업을 물려주고 싶어 했지만 아들은 관심이 없었고 1958년 마리오 프라다는 사망했다.


결국 가업은 마리오 프라다의 딸인 루이자 프라다가 물려받았다. 1977년 창업자의 손녀이자 루이자 프라다의 딸인 미우치아 프라다가 업을 3대째 이어받았고 쓰러져 가는 회사를 위해 고군분투했다. 1949년에 태어난 미우치아 프라다는 밀라노대에서 정치학을 전공하고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시위대에 참석하는 등 급진적인 페미니스트였다. 하지만 부잣집에서 태어나 명품 브랜드인 이브 생 로랑이나 앙드레 쿠레주를 입고 시위에 참가하는 등 페미니스트로선 흔하지 않은 행동을 했고 당연히 눈에 띄었다. 미우치아 프라다는 패션을 전공하지 않았기 때문에 재단과 재봉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로 사업을 할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었다. 미우치아 프라다는 자신이 생각하는 스타일을 디자인팀에 전한 다음 디자인팀에서 소재와 재단, 봉제 방법을 찾아오면 일을 함께 진행하는 방법으로 일을 처리해 나갔다.

1913년에 문을 연 프라다의 밀라노 엠마누엘레의 첫매장/사진출처: prada.com

1978년 파트리치오 베르텔리와 미우치아 프라다는 동업을 시작하게 된다. 일설에 의하면 미우치아 프라다가 베르텔리를 처음 만난 것은 전시장에서 베르텔리가 프라다의 모조품을 전시 판매하면서다. 베르텔리는 이탈리아 중부 도시인 아레초에서 가죽 제품을 아주 정교하게 만드는 기술력이 뛰어난 작은 공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아레초 지방의 법조계 가문에서 태어나 볼로냐대에서 엔지니어링을 공부했다.

그가 모조품을 팔다가 미우치아 프라다에게 발각됐을 때 “프라다는 신발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발각된데 대한 미안함에서 나온 말이라고 할까, 일종의 조언이었다. 미우치아 프라다는 그의 말이 비전으로 느껴졌다. 당시 미우치아 프라다는 가업을 이어받아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었던 터다. 미우치아 프라다는 “만일 그를 만나지 못했다면 사업을 계속하지 못했을 것”이라며 “그에게는 공장이 있었고 나는 디자인에 주력할 수 있었다. 그 덕분에 회사를 한 차원 끌어올릴 수 있었다”고 말했다.

미우치아 프라다는 영국에서 완제품 형태로 수입해 오던 핸드백과 트렁크 등 가죽 제품을 베르텔리의 조언에 따라 프라다만의 독자적인 스타일로 개발하기 시작했다. 베르텔리가 경영을 맡고 미우치아 프라다는 디자인을 맡아 2인 체제로 운영하기 시작했다. ‘만약 미우치아 프라다가 베르텔리를 만나지 않았다면 오늘날의 프라다가 가능했을까’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이들은 8년 동안 동거한 뒤 1987년 결혼식을 올렸고 현재 두 아들이 있다. 미우치아 프라다는 “회사 규모를 키우고 더 많은 수익을 내는 것보다 현재 내가 어떤 것을 할 수 있는지에 초점을 맞추고 싶었다”고 말했다. 부부 경영 체제를 이루며 프라다는 더욱 성장했고 전 세계 460개 이상의 매장과 7000명이 넘는 직원을 두고 있다. 프라다 제국의 중심에는 남편 베르텔리가 있었던 것이다.
남편의 조언으로 신발까지 만들어
미우치아 프라다를 높이 평가하는 이유 중 하나는 낙하산이나 텐트에 이용되던 방수천의 일종인 포코노 나일론 원단을 이용해 가볍고 심플한 가방을 개발한 것이다. 1979년 당시 가죽 가방 일색이던 명품업계에서 고정관념을 깨고 가볍고 실용적인 검은색 색상의 나일론 가방을 사용한 것은 획기적이었다.

3대 회장 겸 디자이너 미우치아 프라다/사진출처: prada.com

그는 백팩(back pack : 등에 메는 가방)과 토트백(tote bag : 손에 들고 다니는 여성용 핸드백)을 출시했고 이 제품들은 전 세계 백화점에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무거운 가죽 가방에 싫증 내던 소비자들은 손잡이 두 개가 달린 토트백으로, 별다른 장식없이 삼각형의 금속 로고만 붙어 있는 디자인이 단순하면서 가볍고 실용적인 프라다 가방에 환호했다, 커리어 우먼들을 중심으로 유행하기 시작했다. ‘포코노백’은 정장이나 캐주얼에도 잘 어울려 인기를 끌었고 미국의 미니멀리즘 유행과 맞물려 날개 돋친 듯 팔렸다. 그 덕분에 프라다는 파산 직전의 위기에서 가업을 이어 갈 수 있었다.

미우치아 프라다는 패션쇼에서 모델들에게 무뚜뚝한 표정으로 무대에 설 것을 주문했다. 이는 모델들은 예쁘게 보여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깨는 그의 페미니스트적 성향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그는 특정 고객을 위한 소수의 여자들을 위해 옷을 만들지 않았다. 일상을 살아가는 여자들, 스스로 삶을 즐기는 보통 여자들,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의 커리어 우먼들이 미우치아 프라다에게 영감을 불어넣는 뮤즈다.

자료 : ‘최고의 명품, 최고의 디자이너(명수진, 삼양미디어)’

류서영 여주대 패션산업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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