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사태로 셈법 복잡해진 유럽 에너지 전쟁 [글로벌 현장]

천연가스 둘러싸고 첨예한 대립 펼치는 강대국들…미국, 유럽 상대로 수출량 늘려

[글로벌 현장]

미국 노스다코타주 맥켄지카운티 왓포드시티에 있는 유정에서 천연가스가 불길을 뿜고 있다.(사진=연합뉴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최근 불거진 우크라이나 사태 속에서 “유럽을 대상으로 천연가스 공급을 확대하겠다”고 발표했다. 겨울철 난방 수요가 급증한 상황에서 러시아산 가스 공급량이 감소하자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주축인 미국이 유럽 지원에 나선 것이다.

세계 최대 천연가스 수출국인 러시아는 즉각 반발했다. 대통령궁인 크렘린은 “미국이 우크라이나를 둘러싼 거짓 정보를 양산하고 있다”며 “유럽 에너지 시장을 미국이 지배하려는 의도 아니냐”고 비판했다.
러시아와 유럽 모두에 중요한 가스관
러시아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천연가스를 생산·수출하는 나라다. 전체 수출액의 약 50%를 에너지에 의존하고 있다. 국내총생산(GDP)의 30% 정도가 에너지 판매 수익에서 나온다.

천연가스는 러시아의 강력한 ‘에너지 무기’이지만 약한 고리가 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국영 천연가스 생산 업체인 가즈프롬이 유럽행 가스 공급을 중단하면 하루에 2억300만~2억2800만 달러의 적자가 발생할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3개월만 공급을 못해도 약 200억 달러의 손실이 가능하다는 얘기다. 가즈프롬은 러시아 내 최대 기업이고 가장 많은 세금을 납부하는 곳이다.

러시아에 다행인 점은 단기간의 외부 충격을 견딜 수 있을 만큼 외화가 확보돼 있다는 점이다. 러시아 중앙은행의 외화 보유액은 현재 6400억 달러에 달한다. 중국·일본·스위스에 이어 세계 4위다. 국제 유가가 배럴당 평균 90달러를 넘나들 정도로 급등하면서 여유가 생겼다. 하지만 매일 뽑아내는 천연가스와 원유 생산량을 처리할 곳을 찾지 못하면 국가 재정에 구멍이 생길 수밖에 없다.

러시아는 긴급히 자구책을 마련하고 있다. 우호 관계를 맺고 있는 중국과 긴밀한 협력에 나섰다. 유럽에 대한 수출 의존도를 낮출 요량이다. 베이징 동계올림픽 기간 중 중국을 찾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우리는 100억㎥ 규모의 천연가스를 매년 중국에 추가 공급하는 방안을 마련하고 있다”고 공개했다.

푸틴 대통령의 연설 직후 가즈프롬은 중국석유천연가스공사(CNPC)와 장기 천연가스 공급 계약을 체결했다고 발표했다. 러시아에서 중국으로 이어지는 극동지역 가스관을 통해서다.

세계의 공장으로 불리는 중국에도 인접국 러시아의 천연가스는 안정적인 대안 에너지가 될 수 있다는 평가다. 전력난이 심화하는 상황에서 석탄 에너지 사용을 지속적으로 줄여 나가야 할 숙제를 안고 있기 때문이다.
유럽의 발등엔 불이 떨어졌다. 유럽연합(EU) 통계청인 유로스타트에 따르면 작년 EU에서 소비된 천연가스의 약 43%가 러시아 생산분이었다. 나머지는 노르웨이·중동·미국·북아프리카 등에서 들여온 물량이다.
일부 국가는 더욱 문제다. 오스트리아·핀란드·리투아니아 등은 러시아산 천연가스에 전적으로 의존해 왔다. 유럽 최대 경제를 자랑하는 독일의 러시아산 의존도는 55%에 달한다.

우크라이나 사태가 터지자 가장 난감해하는 곳은 독일이다. 미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러시아와 ‘에너지 밀월’을 과시해 왔기 때문이다.

독일과 러시아 간 돈독했던 관계를 상징하는 것은 가스관이다. 러시아산 천연가스를 발트해를 거쳐 유럽으로 들여오는 주요 통로인 노드스트림이다.

노드스트림 프로젝트가 시작된 것은 2005년부터다. 당시 집권당이던 사민당이 주축이 돼 추진했고 2011년 완공됐다. 러시아 기업인 가즈프롬이 대규모 투자를 단행했다. 동유럽 국가(우크라이나·폴란드)를 거쳐 러시아산 천연가스를 들여오는 가스관이 있지만 지정학적 위험이 높다는 판단에 따라 새로 설치됐다.

노드스트림의 전체 가스관 길이는 약 1230km다. 2020년 독일이 러시아에서 수입한 천연가스는 약 563억㎥로, 유럽 내 2위 이탈리아(197억㎥)의 3배에 달하는 규모다.

가즈프롬은 작년 9월 기존 가스관 옆에 노드스트림2를 추가로 준공했다. 독일 정부의 전적인 지원 덕분이다. 가즈프롬의 신규 투자액만 80억 유로에 달했다.

준공 직후부터 러시아는 수차례에 걸쳐 가동 승인을 요청했지만 독일은 차일피일 미루고 있다. ‘EU 내부 규정’을 충족하지 못했다는 이유에서다. 천연가스를 채굴하는 가즈프롬과 별개로 가스관 운영 기업을 별도로 유럽 내에 설립해야 한다는 게 독일의 방침이다.

유럽 내부에선 독일이 미국과 타 유럽 국가들의 눈치를 보고 있다고 판단한다. 가동 승인을 내주면 러시아의 에너지 패권에 힘을 실어주는 결과가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가 바이든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 노드스트림2의 승인을 내주지 않겠다”고 공언한 것도 같은 배경이다. 독일이 노드스트림2를 러시아에 대해 협상의 지렛대로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초조해지는 것은 독일 쪽이다. 천연가스는 원유와 마찬가지로 필수 에너지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독일은 모든 원자력발전소의 가동을 완전히 중단한다는 계획을 실행에 옮겨 왔다. 2038년까지 탈석탄 체제로 이행한다는 목표다. 천연가스의 안정적인 공급이 더욱 중요해진 이유다.

천연가스 패권 놓고 다시 맞붙은 ‘슈퍼 파워’
러시아산 천연가스의 유럽행 통로가 노드스트림1·2만 있는 것은 아니다. 벨라루스·폴란드를 거쳐 독일까지 이어지는 야말~유럽 파이프라인은 1997년부터 가동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작년 말부터 가스 공급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우크라이나를 통해 서유럽으로 이어지는 가스관은 더 문제다. 동유럽 분쟁의 한복판에 있기 때문이다. 유럽의 에너지 문제가 얽히고설킨 것이다.

현재 유럽의 천연가스 재고량은 저장 능력 대비 36% 수준이다. 액화천연가스(LNG) 재활용 여력 등을 감안할 때 러시아가 공급을 끊으면 몇 개월 버티기 어려울 것이란 게 IHS마킷의 분석이다.

유럽 내 에너지난 우려가 커지자 미국이 개입하고 나섰다. 아시아로 향하던 미 LNG 운반선 상당수가 암스테르담 등 유럽 항구로 방향을 틀도록 중재했다.

미국은 작년 12월과 올해 1월 유럽 최대 천연가스 공급처로 올라섰다. 종전까지 최대 수출처였던 아시아보다 유럽에 더 많은 천연가스를 보내고 있다.

미국산 LNG의 유럽 내 비율은 작년 초 37%였는데 지금은 70% 가까이로 치솟았다. 그 덕분에 미국의 천연가스 수출량은 작년 말 만년 1등이던 러시아마저 제쳤다. 유럽이 재고 확보 차원에서 LNG 수입량을 1년 전보다 3~4배씩 늘리고 있는데 그중 상당량을 미국이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은 천연가스 생산량을 더욱 확대할 계획이다. 2010년대 초·중반 이후 최대 규모의 신규 투자를 통해서다.

미 벤처글로벌LNG는 신설한 루이지애나 생산 기지의 가동을 지난 1월 말부터 시작했다. 신기술을 적용해 생산 단가를 낮춘 게 특징이다. 또 다른 가스 업체인 셰니어도 인근의 사빈패스 수출 시설을 확장했다.

미국은 10년 전만 해도 천연가스를 수입했던 곳이다. 하지만 지금은 러시아와 함께 세계 1·2위 수출국 자리를 다투고 있다. 셰일가스 덕분이다. 세계 최대 원유 생산국으로 올라섰던 경로 그대로다.

우크라이나의 전쟁 위기 이면엔 천연가스를 둘러싼 초강대국들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해 있다는 게 에너지업계의 분석이다.

뉴욕(미국)=조재길 한국경제 특파원 road@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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