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선만 부르고 유턴한 기업도 적지 않아…커리어패스 도입·직무 중심 평가 등 뒤따라야
[비즈니스 포커스]‘부장님’, ‘과장님’. 예전 호칭과 직급을 사용하는 기업은 어느새 시대에 뒤처진 ‘꼰대 회사’로 인식되는 세상이다. 삼성과 현대차 등 전 세계를 누비는 대기업들도 언젠가부터 호칭과 직급을 파괴하고 ‘님’이나 ‘프로’ 등과 같은 수평적 관계를 맺기 위한 시도를 하고 있다.
그러나 일각에선 호칭과 직급 파괴의 효과에 반신반의한다. 부르는 호칭만 바뀐다고 오랜 시간 지속된 수직적인 조직 문화가 단기간에 수평화되는 것은 어렵다는 얘기다. 호칭과 직급 파괴로 ‘기업 문화 혁신’이라는 대전제를 성공시키기 위해 어떠한 조건이 필요한지 알아본다.
능력 중심의 커리어패스 도입
인사 전문가들은 호칭이나 직급 파괴는 조직 문화를 바꾸기 위한 하나의 ‘트리거’라고 표현한다. 수평적 관계로 서로를 부르며 자연스럽게 업무 분위기를 개선하기 위한 방편이라는 것이다.
호칭·직급 파괴에서 시작해 최종 목표인 기업 문화 혁신을 위해선 능력 중심의 ‘커리어패스’가 도입돼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연공서열에 따른 승진과 보상 등이 이익을 추구하는 기업의 지속 성장을 막고 있다고 지적하며 능력 중심으로 기업이 운영돼야 한다는 주장이다.
구글·아마존 등의 글로벌 기업은 이미 예전부터 직무 중심의 커리어패스를 도입한 상황이다. 커리어패스는 선택한 직업에서 얻는 직무 경험이다. 한국에서는 커리어패스라는 말보다 ‘커리어’라는 단어로 표현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입사 연차와 연령 등 업무 외적 요인이 직무와 업무 중심의 경력보다 중요한 것이 한국 기업의 현실이다. 하지만 젊은 최고경영자(CEO)와 MZ세대(밀레니얼+Z세대)의 등장으로 커리어 중심으로 승진과 인사 고과를 높게 평가하는 새 문화가 자리 잡고 있다.
호칭과 직급 파괴는 연차와 연령 등과 같은 숫자보다 직무와 업무 중심의 능력·경력으로 사람을 평가하기 위한 첫발이나 마찬가지다. 또한 한국 기업 문화의 뿌리인 서열과 상명하복 문화를 없애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서열을 통해 정리된 관계에서는 대화나 회의의 주도권을 가져가는 사람이 자연스럽게 정해진다. 상대적으로 낮은 이들은 한 광고에서 나오는 것처럼 ‘넵’만 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이병태 카이스트 경영대 교수는 “호칭 파괴는 낮은 수준의 혁신이지만 상징적인 의미가 크다”며 “조직 수평화가 실제로 이뤄지려면 의사 결정 과정에서 창조적인 의견을 반영할 수 있어야 하고 평가와 보상도 걸맞게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커리어 중심과 함께 ‘호봉제’도 바뀌어야 한다는 의견이 많다. 업무 성과에 따라 임금 상승 폭이 비교적 자유로운 연봉제와 달리 호봉제는 근속 연수나 연령 등에 따라 임금이 지급된다는 특징이 있다.
호칭의 통일과 능력 중심의 수평적 조직 문화가 자리 잡기 위해선 근현대적인 호봉제 임금에서 연봉제가 채택돼야 한다는 말이다.
또한 경영진의 적극적인 동참도 중요하다. ‘톱다운 방식’으로 위에서부터 변화하지 않는다면 호칭·직급 파괴는 주먹구구식 행동에 그칠 수 있다. CEO 등이 나서야 수십년간 고착화된 조직 문화에 조금씩 변화가 나타날 수 있다.
CJ서 시작된 시도, 주류로 자리 잡다
한국의 대기업 중에선 CJ그룹이 가장 먼저 호칭·직급 파괴를 시도했다. 2000년대 초반부터 CJ는 서로를 ‘님’이라고 불렀다. 이재현 CJ그룹 회장 역시 ‘재현님’이라고 불렸다는 얘기는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CJ를 시작으로 네이버·SK텔레콤·제일기획·삼성전자·현대차 등 많은 기업이 이 흐름을 따르며 주류로 자리 잡았다. 이제 중견·중소기업도 CJ에서 시작된 문화에 동참하고 있는 추세다. 조직원의 창의성을 배가하며 유연성을 확보하는 데 호칭 파괴만한 것이 없다는 것에 공감한 것이다.
단, 호칭을 바꿨다가 다시 원상태로 돌린 기업도 많다. 포스코·한화·KT 등이 대표적이다. 포스코는 2011년 7월 이후 매니저, 팀 리더, 그룹 리더 등으로 간소화한 호칭과 직급을 2017년 2월부터 대리·과장·차장·부장 등 기존 체계로 다시 바꿨다. 원활한 의사소통을 위해 익숙한 직위 체계가 더 낫다는 판단에서다.
한화도 2012년부터 매니저 등으로 서로를 불렀지만 2015년 3월부터 종전 호칭으로 돌아갔다. 업무 일선에 혼선이 발생하고 승진이 사라진 것 같다는 불만 등으로 직원의 사기 진작과 자부심 향상으로 3년 만에 예전으로 돌아간 것이다.
하지만 수많은 스타트업이 등장하고 CEO의 평균 연령이 낮아지는 등 시대의 변화에 따라 호칭 파괴가 주류 문화로 자리 잡았다. 포스코와 한화 등 예전 체계로 돌아간 기업도 호칭 변화를 다시 꾀하는 중이다. 단어의 차이가 변화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화는 ‘프로님’으로 호칭 변화를 모색하고 있는 중이다.
강기봉 TPI인사이트 경영자문그룹 대표는 “호칭과 직급 파괴는 목표가 아닌 조직 개선을 위한 수단”이라며 “유연하고 기민한 조직으로 혁신하기 위해 경영진에서 표현부터 바꾸려고 하는 것이다. 수평적인 조직 문화가 호칭 변화만으로 완성되지는 않지만 시작하는 열쇠가 될 수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고 말했다.
유호승 기자 yh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