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급망 관리의 핵심은 컨틴전시 플랜”

윤성혁 삼성전자 고문...글로벌 최전선 32년 영업맨, 공급망 관리를 말하다

[인터뷰]

사진=김기남 기자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공급망’ 혼란이 다시금 빚어지고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이후 공급망 재편에 나섰던 기업들은 이번 우크라 침공에도 예의주시하며 공급망 전략을 새로 짜는 등 공급망 대란 대비책 마련에 나서고 있다.

사실 공급망 관리의 중요성은 기업의 어제오늘 뉴스는 아니다. 기업 생존을 다투는 모든 뉴스의 중심에 공급망이 있었다. 1등 기업 삼성전자도 마찬가지다.

신간 ‘위기인가, 삼성하라’의 저자 윤성혁 삼성전자 고문은 32년 글로벌 현장을 누빈 영업 경험을 토대로, 공급망 관리의 중요성을 설파한다. 윤 고문은 “항상 위기관리 경영기법 ‘컨틴전시 플랜’을 떠올려야 한다”고 말한다. 컨틴전시 플랜이란 예상치 못한 긴급한 사태가 발생할 경우를 대비해 사전에 만들어 놓는 위기대응 계획을 의미한다. 지난 4일 한국경제매거진 사옥에서 윤 고문을 만났다.

-2020년 10월 퇴임 후 책을 썼다.

“아프리카를 떠나던 마지막 날, 현지 직원들로부터 부탁을 받았어요. 지난 4년간 함께 만들어온 삼성 아프리카의 변화를 꼭 책으로 남겨달란 주문이었습니다. 생각해보니 삼성이 지금의 초일류 기업으로 성장하기까지의 과정을 설명하는 책들은 많았지만, 해외 영업 현장 최전선의 기록은 찾아보기 쉽지 않았습니다. 32년의 재임기간 중 20년을 해외 주재원 생활로 보냈으니 그 치열한 현장에서의 경험을 기록하는 게 의미가 있겠다 싶었죠. 마침 코로나19로 자가격리를 하며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있었기에 32년간 겪었던 영업의 중요한 순간들을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책에서 특히 공급망 관리의 중요성을 강조하는데.

“공급망 관리는 극단적인 위기에서뿐만 아니라 어떠한 순간에도 필요합니다. 백업 플랜 역시 항상 준비하고 있어야 하죠. 제가 미국 주재원으로 IBM을 담당했을 때예요. IBM은 저희(삼성)와 같은 공급자에게 위기 발생 시 대처할 ‘컨틴전시 플랜’을 상시 요구했어요. 대만에 홍수가 났거나, 일본에 지진이 발생했으니 삼성도 컨틴전시 플랜을 제출하라는 식이었죠. 처음엔 이들 국가의 자연재해가 삼성 모니터 사업에 끼치는 직접적인 영향이 없다보니 불필요한 작업이 아닌가 황당했어요. 가상 시나리오를 토대로 아주 자세한 부품별 공급망 구조를 미리 분석해두고, 혹시라도 공급에 문제가 생길 경우 다른 공급자로 즉시 대체할 수 있도록 준비하다보니 간단치도 않았고요. 그런데 컨틴전시 플랜을 짜다보니 자연스럽게 예상치못한 비상사태에 대처하는 여러 방법을 학습할 수 있게 됐어요. 왜 하나 싶었지만, 실은 탁월한 전략이었던거죠.”

-이론이 실제 도움이 된 순간이 있었나요.

“2020년 코로나19 당시 아프리카 상황은 정말 심각했어요. 길에는 군인이 쫙 깔렸고 전국에 통행 금지가 발효되며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죠. 나라 전체가 봉쇄된 상황에서 구매선도 잘렸고, 우리가 구매하기로 계획한 예약 건들도 모두 취소됐어요. 그런데 스마트폰은 이미 현대인의 필수품이 됐잖아요. 사실상 필수품이기에 위급한 순간에도 무조건 구매할 것이란 생각이 있었죠. 삼성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스마트폰이 없으면 크게 불편하니까. 그런 생각을 하는데 문득 컨틴전시 플랜이 떠오르더라고요.”

사진=김기남 기자


-어떻게 하셨나요.

“먼저 중국으로부터 제품 공급이 불확실하니 다른 국가들로 공급지 변경을 추진했어요. 또, 화웨이와 같은 중국 기반의 경쟁사들의 공급이 어려워질테니 거래선별로 모델별 적정 재고를 유지하도록 했죠. 봉쇄가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유통사들은 가격을 내리지 않으면 구매하기 어렵다고 엄포했어요. 재고가 쌓이니 내부에선 총괄인 제 판단이 틀린 게 아니냔 우려스런 시선도 있었죠. 하지만 봉쇄가 풀리고 매장이 문을 다시 열자 보복소비가 일어났어요. 현지 유통업체들은 저희에게 추가 물량 공급이 가능한지 문의했죠. 다른 경쟁사의 공급이 사실상 불가한 상황에서 저희는 컨틴전시 플랜으로 재고를 비축해둔 덕분에 물량을 제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준비된 상황에서 봉쇄조치가 완화되자 원래 20~30%에 불과했던 판매점유율이 70%를 넘게 됐어요. 시장점유율을 크게 높인 측면도 있지만 유통사와 소비자에게 신뢰를 줬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었죠.”

-위기를 기회로 만드셨군요.

“주재원을 하며 글로벌 큰 기업들과 상대하다보니 컨티전시 플랜이나 공급망 관리가 자연스럽게 체득화되고 일상화가 된 것 같아요. 신문의 맨 끝자락에 있는 단신을 봐도, 그게 우리 기업에 줄 영향을 생각하는 거죠. 공급망 관리하면 생각나는 일화가 또 있는데, 제 상사였던 최지성 당시 디스플레이 사업부장 이야기예요. 어느날 폭풍우가 닥쳐 해안가에 모래가 범람했다는 기사가 뜬 적이 있어요. 그런 뉴스 그냥 흘려 보잖아요. 근데 곧바로 ‘모래에서 나오는 규소가 스크린 만들 때 필요하다. 빨리 가서 1년 치 계약하고 와라’ 하는 거예요. 지금 생각해보면, 컨틴전시 플랜이라고 이름만 안붙였을 뿐이지 선배들은 이미 공급망 관리가 일상화가 됐던 것이죠.”

-최근 공급망 대란은 어떻게 보셨나요.

“문제가 발생하면 즉각 대책이 나와야 해요. 그런데 이번에 ‘요소수’ 대란이 발생하니까 ‘정부가 잘못했다, 누가 잘못했다’고 하는데 사실 그보단 기업체와 해당 담당자가 항상 공급망 문제를 염두해야 하는 일이에요. 언제 무슨 일이 터질지 알 수가 없어요. 기간산업들은 특히 그 준비를 철저하게 해야 하죠. 본사에서 모든 문제에 대한 컨틴전시 플랜을 준비할 수도 없어요. 현지에서 또는 해당 담당자가 콘트롤 해야 하죠. 수백개의 나라에서 생기는 비상 대책을 본사가 관리할 순 없으니까요. 각자가 스스로 백업플랜, 컨틴전시 플랜 등 공급망 관리에 대응을 항상 준비해야 합니다.”

-인생 2막,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해요.

“아프리카에서 제가 쌓은 경험이 굉장히 특별한 거란 생각이 들더라고요. 아프리카에서 경험을 쌓은 이들도 소수이지만, 전 아프리카 총괄로 일하며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잖아요. 함께 일하며 두터운 신뢰도 쌓았고요. 그런 제 경험과 인맥을 활용해서 한국과 남아프리카공화국, 양국에 기여하는 일을 하고 싶어요. 남아공은 매일 순환정전을 해야할만큼 전력난이 심각해요. 대신 재생에너지를 생산하기 위한 조건은 매우 탁월하죠. 한국은 기술을 보유하고 있고요. 양국이 만나면 상당한 시너지효과를 발휘하리라고 믿어요. 그 중간에서 제가 힘이 될 수 있다면 매개체 역할을 하고 싶은 거죠.”

사진=윤성혁 고문 제공


윤성혁 고문은...

삼성이 세계 초일류 브랜드가 되기까지 삼성전자와 함께하며 글로벌 현장에서 뛴 영업의 산 증인. 16년간 세 차례 미국 주재원을 역임했고, 4년간 아프리카에 파견 나가 해외 시장을 개척하고 위기를 돌파하며 큰 성과를 거두었다. 2020년까지 삼성 아프리카 총괄과 남아프리카공화국 법인장을 겸임했으며 현재는 삼성전자 고문으로 활동 중이다.

정채희 기자 poof34@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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