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점에 도청 장치 설치하면 주거침입죄 해당될까 [김진성의 판례 읽기]
입력 2022-04-05 17:30:09
수정 2022-04-05 17:30:09
대법 “영업주 승낙 받아 출입, 침입 행위 해당 안 돼”
[법알못 판례 읽기]음식점에서 몰래 녹음기나 카메라를 설치하기 위해 들어갔더라도 주거침입죄로 처벌할 수 없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음식점에 도청 장치를 설치해 녹음한 대화를 언론에 폭로했던 ‘초원복국 사건’에 대해 대법원이 주거침입죄라고 선고한 지 25년 만에 판례가 바뀌게 됐다.
앞으로는 음식점 영업주가 도청에 동의했는지보다 음식점에 들어온 것이 영업주의 평안함을 위협했는지가 주거침입죄 여부를 판단하는 핵심 잣대가 될 것으로 보인다.
25년 만에 뒤집힌 ‘초원복국’ 판례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노태악 대법관)는 2022년 2월 24일 주거 침입 혐의로 기소된 A 씨 등의 상고심에서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재판부는 “영업주의 승낙을 받아 음식점에 들어갔다면 녹음·녹취를 목적으로 하더라도 주거침입죄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전남 광양시에서 영업 중인 화물 운송 업체의 부사장 A 씨와 팀장 B 씨는 2015년 회사에 불리한 기사를 쓴 기자에게 식사를 대접하겠다고 한 뒤 기자와 만나는 음식점 내부에 녹취·녹화를 위한 카메라 등의 장치를 설치했다.
이 같은 행위는 그해 1월 24일부터 2월 12일까지 총 네 차례에 걸쳐 이뤄졌다. 해당 기자가 그들에게 부적절한 요구를 하는 장면을 포착하기 위해서였다. 음식점 주인은 이 사실을 모른 채 평상시처럼 영업했다.
이런 정황 때문에 법정에선 A 씨와 B 씨가 도청을 위해 음식점에 들어간 것이 음식점 주인의 의사에 반하는 행위라면 주거침입죄가 성립되는지가 이 사건의 최대 쟁점으로 떠올랐다. 일단 1심 재판부는 이러한 행위를 유죄로 판단하고 A 씨와 B 씨에게 각각 징역 4개월에 집행 유예 2년을 선고했다.
당시 재판부는 “일반인의 출입이 허용된 음식점이라도 도청용 송신기를 설치할 목적으로 음식점에 들어갔다면 영업주의 명시적 또는 추정적 의사에 반해 들어간 것으로 볼 수 있다”며 “단기간에 반복해 범행을 저지른 점을 보면 죄질이 좋지 않다”고 판단했다.
2심에선 판결이 뒤집혔다. 2심 재판부는 “A 씨 등이 식당 관리자의 명시적 또는 추정적 의사에 반해 식당에 침입했다고 단정하기 어렵고 기자와의 대화를 녹음·녹화한 행위도 통신비밀보호법을 위반해 타인 간의 대화를 녹음한 것이라고 볼 수 없다”고 봤다.
또한 “식당 관리자의 허락을 받지 않고 기자와의 대화를 녹음·녹화했다고 하더라도 불법 행위 등에 해당하지 않는 이상 음식점에 들어간 것 자체가 관리자의 의사에 반하는 것으로 보기 어렵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도 이 같은 이유로 2심과 똑같은 결론을 내렸다. 전원합의체 재판부는 “A 씨 등이 이 사건 음식점의 영업주에게 승낙을 받아 통상적인 출입 방법에 따라 들어간 이상 사실상의 평온 상태가 침해됐다고 볼 수 없으므로 침입 행위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평온 상태 깨져야 유죄 성립”
대법원의 이번 판결로 도청 목적으로 음식점에 들어간 것도 주거침입죄로 본 오래된 판례가 바뀌게 됐다. 대법원이 1997년 초원복국 사건 당사자들에 대한 유죄를 확정한 뒤 이 판례는 오랫동안 깨지지 않은 채 비슷한 상황에 대한 판결 기준이 돼 왔다.
초원복국 사건은 14대 대통령 선거를 1주일 앞두고 김기춘 전 법무부 장관이 부산시장·부산지검장·부산경찰청장·부산교육감 등 당시 부산 지역 기관장들을 부산 소재 음식점인 초원복국에 불러들여 김영삼 민주자유당 후보의 대통령 당선을 위해 지역 감정을 부추기자고 모의했던 사건이다.
당시 야당인 통일국민당 관계자들이 현장 대화 내용을 도청해 폭로하면서 모의 내용이 세간에 드러났다. 해당 도청에 관여한 3명이 주거침입죄로 기소돼 벌금형을 받았다.
대법원은 25년 전과 달리 ‘사실상의 평온 상태’가 실제로 침해됐다는 사실이 인정돼야 주거침입죄가 성립된다고 봤다.
자신의 의사에 반해 누군가로부터 정신적·심리적 피해를 입음으로써 주거의 평안함이 위협받는 상태가 됐는지 여부를 판결 잣대로 삼은 것이다. A 씨와 B 씨의 행위가 이 같은 평온 상태를 침해했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이 재판부의 판단이다.
이번 전원합의체 다수 의견에는 별개 의견을 낸 김재형·안철상 대법관을 제외한 11명이 동의했다. 별개 의견은 다수 의견과 사건에 관한 결론은 같지만 결론에 이르게 된 근거가 다른 의견을 말한다.
두 대법관은 “‘사실상의 평온 상태를 해치는 모습’이라는 의미는 추상적이고 불명확해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며 “사실상의 평온 상태가 침해됐는지에 따라 침입 여부를 판단하더라도 거주자의 의사에 반하는지를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요소로 삼아 주거침입죄의 성립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돋보기]
“음식점에서 도청은 주거 침입” 판례 세웠던 ‘초원복국’ 사건
한국 정치사에서 손꼽히는 도청 스캔들인 초원복국 사건은 ‘도청을 위해 음식점에 들어가는 것은 주거침입죄’라는 것을 보여주는 판례이기도 했다. 법조계에서 25년 동안이나 굳건한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초원복국 사건은 14대 대통령 선거를 1주일 앞둔 1992년 12월 11일 벌어졌다. 이날 부산에 있는 초원복국이란 음식점에 김영환 부산시장, 정경식 부산지검장, 박일룡 부산경찰청장, 이규삼 안기부 부산지부장, 우명수 부산교육감, 박남수 부산상공회의소 회장 등 부산 지역 정부 기관장 8명이 모였다. 이들을 불러 모은 주선자는 김기춘 전 법무부 장관이다. 김 전 장관은 이 자리에서 “지역 감정을 부추겨 김영삼 민주자유당 후보를 당선시키자”고 제안한다.
접전 양상으로 흘러가던 당시 대선에서 승리하기 위해 꺼내 든 비책이었다. 14대 대선은 김영삼 후보와 김대중 민주당 후보, 정주영 통일국민당 후보 간 3파전으로 진행됐다. 여론 조사에선 김영삼·김대중 후보가 초접전을 이어 갔고 통일국민당이 대선 9개월 전 총선에서 31석을 확보하는 등 약진하면서 정주영 후보 지지자들도 늘고 있던 차였다.
이 같은 상황에서 민주자유당 내부에선 권력 다툼이 이어졌고 당내 계파인 구 민정당계의 기반인 대구·경북(TK) 지역에선 김영삼 후보에 대한 반발 정서가 조성되고 있었다.
초원복국에서 이뤄진 은밀한 모의는 나흘 후인 12월 15일 통일국민당에 의해 폭로된다. 당시 공개된 녹취록에서 김 전 장관은 “지역 감정이 유치한지 몰라도 고향의 발전에 긍정적”이라며 “경남, 부산이 508만 명인가 그런데 80% 투표하면 400만 명, 그중에서 80%를 얻는다고 해도 320만 명인데 그것 가지고 되겠느냐”고 말했다. 이어 “하여튼 민간에서 지역 감정을 좀 불러일으켜야 해”라고도 했다.
모의 내용이 세간에 드러난 뒤 민주자유당은 통일국민당이 김 전 장관 등의 대화를 불법 도청했다고 거세게 비판했다. 여론 역시 불법 도청을 문제로 보는 쪽으로 기울면서 오히려 초원복국 사건이 터진 뒤 부산뿐만 아니라 TK 지역에서도 김영삼 후보의 지지율이 올라갔다. 김영삼 후보는 스캔들로 큰 타격을 입지 않은 채 41.96%의 득표율로 14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선거가 끝난 뒤 검찰은 도청에 관여했던 통일국민당 관계자 3명을 주거 침입 혐의로 재판에 넘겼다. 그 후 5년에 가까운 재판이 진행된 끝에 대법원이 1997년 이들에 대한 벌금형을 확정했다.
당시 재판부는 “음식점 주인이 도청용 송신기를 설치하려는 자들에게는 출입을 허용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일반인의 출입이 허용된 음식점이라고 하더라도 영업주의 명시적 또는 추정적 의사에 반해 들어간 것이라면 주거침입죄가 성립한다”고 판시했다.
김진성 한국경제 기자 jskim1028@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