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연·유승민 출사표…이인제·손학규·김문수·이재명 등 줄줄이 대선 징검다리로 여겨
[홍영식의 정치판]“서울과 여의도 정치판만 관심을 가지지 말고 서울시 못지않게 중요한 경기도에도 신경 좀 써 달라.”
손학규 전 바른미래당 대표는 경기지사 시절(2002년 7월~2006년 6월) 사석에서 기자와 만나면 이런 요구를 자주 했다. 당시 이명박 서울시장, 박근혜 대표와 함께 한나라당의 대선 후보 ‘트로이카’로 불린 그는 투자 및 기업 유치 등 경기 도정을 위해 많은 성과를 냈는데도 중앙 언론에서는 잘 다뤄 주지 않은데 대한 섭섭함을 농담 삼아 얘기한 것이다.
대선 후보 여론 조사를 하면 인지도와 지지율이 낮게 나오는 데 대한 답답함도 담겨 있다. 실제 경기 도정에 대한 뉴스는 웬만해선 중앙 언론에서 찾아보기 쉽지 않다.
그럼에도 1995년 지방자치제도 실시 이후 역대 경기지사 자리는 대선판으로 가는 징검다리로 여겨졌다. 지자제 실시 이후 첫 경기지사를 맡은 사람은 이인제 전 의원이다. 그는 1995년 7월 취임한 지 2년여 지난 1997년 9월 지사직을 던지고 신한국당 대선 경선에 참여했다. 이회창 후보에게 패한 뒤 경선에 불복하고 탈당해 국민신당을 만들어 출마했다. 하지만 김대중 새정치국민회의 후보(득표율 40.27%)와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38.74%)에 이어 득표율 19.20%로 3위에 그쳤다. 그의 출마는 대선판을 뒤흔들었다. 그가 경선 패배를 받아들이고 김 후보와 이 후보 간 맞대결이 펼쳐졌다면 이 후보가 승리했을 가능성이 높았다는 게 정치권의 대체적인 분석이었다.
인구·국회의원 수 가장 많아 대선 유리한 터전
그는 5년 뒤인 2002년 16대 대선에서도 또다시 경선 불복 논란을 불렀다. 이번엔 민주당 경선에 출마해 초반 ‘이인제 대세론’이 퍼졌지만 ‘노풍(노무현 바람)’에 무너졌다. 대선을 2주일 정도 앞두고 탈당해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 지원에 나섰다. 연이은 경선 불복은 2005년 ‘당내 경선(여론 조사 경선 포함)에서 패배한 후보는 해당 선거에 출마할 수 없도록 하는 이른바 ‘이인제 방지법(공직선거법 제57조 신설)’을 낳았다.
이인제 전 의원에 이어 대선에 나선 경기지사 출신은 손학규 전 대표다. 그는 2007년 한나라당 대선 경선전에서 이명박·박근혜 후보와 겨뤘다. 하지만 여론 조사에서 밀리던 차에 ‘손 전 지사는 당에 있어도 시베리아, 밖에 나가도 시베리아’라고 한 이명박 후보의 발언을 빌미로 탈당했다. 이후 대통합민주신당에 입당한 뒤 대선 경선에 참여했지만 정동영 후보에게 패했다. 그는 5년 뒤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 경선에도 뛰어들었지만 문재인 후보에게 무릎을 꿇었다.
김문수 전 지사는 2006년 7월부터 2014년 6월까지 8년간 지사를 지냈다. 그는 재임 중이던 2012년 대선에 도전했지만 새누리당 경선에선 박근혜 벽을 넘지 못했다. 남경필 전 지사도 대선 잠룡으로 꼽혔지만 뜻을 펼치지 못하고 2018년 도지사직을 내려놓은 뒤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2018년부터 지난해 10월까지 경기지사를 지낸 이재명 전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도 낙마하면서 ‘경기지사는 대선 무덤’이라는 사례를 하나 더 추가했다. 그럼에도 이 지사는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에게 0.73%포인트 차로 석패하면서 경기지사 출신 중 대통령에 가장 가까이 다가섰다. 그가 ‘전국구 인물’로 중앙 언론이 주목한 것은 성남시장 시절부터 추진한 기본수당 등 논쟁적 정책 때문인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손학규 전 지사가 언급했듯이 서울시장에 비해 경기지사 자리가 중앙 언론의 주목도가 떨어지고 ‘경기지사=대선 낙마 징크’를 깨지 못하고 있음에도 잠룡들이 몰리는 이유는 뭘까. 6월 1일 실시될 예정인 지방 선거를 앞두고 차기 대선 주자로 꼽히는 김동연 새로운물결 대표와 국민의힘 소속 유승민 전 의원이 도전장을 내밀면서 대선 전초전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 무엇보다 경기도 인구가 1365만여 명으로 전국 17개 광역시·도 중 가장 많다는 점이 대선 주자들에겐 매력적이다. 서울시 950만여 명보다 400만여 명 더 많다. 경기지사로서 행정을 잘 펼친다면 든든한 텃밭이 될 수 있다. 이 지역의 지역구 국회의원 수도 59명으로 서울 49명보다 10명 더 많다. 전국 최다다. 경기지사로서 국회의원 지역구의 민원을 잘 챙겨 주고 이들과 호흡을 맞추면 정치권의 기반을 넓히는 토대가 될 수 있다. 이재명 전 후보가 국회의원을 한 번도 하지 않은 이른바 ‘0선’임에도 당내 경선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도 경기도 지역구 의원들의 지지 덕분이었다. 정성호·김영진·김병욱·임종성·김남국 등 이 전 후보의 최측근 의원들은 대부분 경기도 출신이다.
여야 대선 후보 모두 경기지사직을 징검다리로 삼는 또 다른 이유는 대표적인 스윙보터(지지하는 정당과 정치인이 없이 그때그때의 정치 상황과 이슈에 따라 투표) 지역이란 점 때문이다. 호남·영남과 같이 특정 정당에 일방적으로 유리한 게 아닌 점은 여야 잠룡들 모두의 구미를 자극하는 요소다. 선거 때마다 여야 대선 후보들이 뛰어들면서 경선부터 대선 전초전이 되는 이유다.
대표적 스윙보터 지역…여야 번갈아 가며 승리
1995년 지자제 실시 이후 지금의 국민의힘 계열과 더불어민주당 계열 정당에서 각각 3명씩의 도지사를 배출한 것만 봐도 대표적인 스윙보터 지역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역대 대선에서 경기 지역 득표 현황도 마찬가지다. 지난 3월 20대 대선에서 이재명 후보가 50.94%로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45.62%)를 5.32%포인트 앞질렀다. 19대 때는 문재인 민주당 후보(42.08%)가 홍준표 자유한국당 후보(20.75)를 2배 이상 앞섰다.
반면 18대 대선 때는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가 50.43%로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49.19%)를 간발의 차이로 따돌렸다. 17대 대선 때는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가, 16대 대선 때는 노무현 새천년민주당 후보가, 15대 대선 때는 김대중 새정치국민회의 후보가, 14대 대선 때는 김영삼 자유민주당 후보가, 13대 대선 때는 노태우 민자당 후보가 경기 지역에서 득표율 1위를 차지했다.
6·1 지방 선거를 앞두고 민주당의 최대 변수는 김동연 새로운물결 대표의 참전과 당원·도민들의 선택이다. 민주당과 새로운물결은 합당에 합의했다. 김 대표는 지난 대선에서 이재명 전 후보와의 단일화를 통해 이 전 후보를 지지하고 자신은 후보를 사퇴했다. 이 때문에 김 대표의 경기지사 출마는 이 전 후보와의 암묵적 합의의 결과라는 분석이 나온다. 이 때문에 당세가 약함에도 그는 민주당의 다른 경쟁 후보보다 훨씬 높은 지지율을 나타내고 있다.
국민의힘에선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의 대변인을 맡았던 김은혜 의원이 도전장을 내민 가운데 대선 잠룡인 유승민 전 의원도 출마 선언했다. 유 전 의원은 경기 지역과 연고가 없는 게 약점이다. 그는 “히딩크 전 국가대표 감독이 한국인이어서 한국 축구가 월드컵 4강을 만든 게 아니지 않느냐”는 논리를 내세우며 의욕을 보이고 있다. 그가 지난 국민의힘 대선 경선에서 패배한 뒤 곧바로 경기지사 선거에 출사표를 던진 것은 5년 뒤 대선의 징검다리로 삼겠다는 뜻이다. 누가 되든 5년 뒤 ‘경기지사=대선 패배’ 징크스를 깰 수 있을까.
홍영식 대기자 겸 한국경제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