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로 대중화…사회적 거리두기 완화되면 다시 불법
‘닥터나우는 토스일까, 타다일까.’
혁신은 늘 기득권의 벽에 부딪친다. 이를 뚫어 내면 혁신이 되고 벽에 막혀 멈추면 실패한 실험이 된다. 토스의 성장은 핀테크 규제 혁신의 역사가 됐지만 타다의 침몰은 낡은 규제가 새로운 플랫폼의 성장 발목을 잡은 기록으로 남았다. 혁신은 규제의 틈을 뚫고 싹을 틔운다. 이 싹이 자라난 후에야 규제가 논의됐고 규제 완화와 상생의 과정을 겪으며 산업은 성장했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한국에서 ‘토스냐, 타다냐’의 기로에 놓인 산업을 꼽으라면 원격 의료와 디지털 헬스케어를 들 수 있다. 코로나19 사태로 30여 개에 달하는 원격 의료 플랫폼이 성장 궤도에 올랐다. 하지만 이들은 코로나19 심각 단계가 끝나면 사라질 운명에 놓인다. 오랜 기간 논란만 있었던 원격 의료를 가능하게 한 것도 코로나19였고 이들의 명운을 가르는 것도 코로나19가 된 셈이다.
의사와 약사들의 반발도 여전하다. “원격 의료는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흐름”이라는 주장과 “국민 건강과 생명에 앞서 산업적인 측면만 강조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주장이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다. 금융이나 플랫폼보다 더 철옹성 같은 의료법의 문턱도 넘어야 한다. 급성장한 원격 진료 플랫폼은 의료 시장의 토스가 될 수 있을까. 코로나19 엔데믹(주기적 유행) 시대를 준비하는 디지털 헬스케어 플랫폼의 전략을 들여다봤다.
한국에서 30년 넘게 제자리걸음해 온 원격 진료 시대가 열렸다. 코로나19가 원격 진료의 빗장을 풀었다. 코로나19 사태로 인한 의료 공백을 채우기 위해 정부는 2020년 2월부터 전화 상담과 처방(원격 진료)을 한시적으로 허용했다.
제도가 마련되자 원격 진료는 빠르게 확산됐다. 의사와 통화나 화상으로 진료를 받으면 환자가 있는 동네 약국으로 처방전이 가고 택배 업체를 통해 약이 문 앞에 배달되는 시스템이었다. 의료 소비자들의 반응은 좋았다.
업계에서는 “한시적이지만 ‘누구나’ 원격 진료를 경험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변화의 시작”이라고 평가한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지난해 10월까지 150만 명이 312만 건의 원격 진료를 경험했다.
지난해 말부터 오미크론 변이가 번지면서 원격 진료는 더 활발해졌다. 원격 진료 플랫폼 닥터나우 한 곳에서만 지난 3월까지 400만 명(누적)이 원격 진료를 받았다. 닥터나우와 제휴한 의료 기관도 지난 1월 360곳에서 3월 900곳으로 늘었다. 다른 플랫폼들 역시 급성장했다.
라이프시맨틱스가 운영하는 원격 진료 플랫폼 닥터콜은 이용자 수가 한 달 만에 70% 이상 증가했다. 김준철 라이프시맨틱스 최고혁신책임자는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국가적 관심과 자본 시장에서의 관심이 원격 진료에 집중됐고 소비자들의 경험이 시작되면서 편의성과 안전성에서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고 말했다.
의료계 ‘강경 반대’에서 ‘유연한 대응’으로
의료 수요자뿐만 아니라 그동안 날을 세우며 원격 진료를 반대해 온 의료 공급자들의 인식도 변하고 있다. 그동안 의료업계에서 원격 진료를 포함한 원격 의료는 말을 꺼내는 순간 반발이 시작되는 민감한 문제였다. 한국에서 원격 의료가 오랫동안 ‘시범 사업’에서 벗어나지 못한 배경이다.
역사도 오래됐다. 1988년 연천·화천·울진 보건의료원과 대학병원을 연결해 원격 영상 진단을 실시하면서 최초의 원격 진료가 도입됐다. 2000년대에도 원격 의료는 특정 지역이나 군부대·교도소 등을 위주로 운영하는 정도에 그쳤다.
2014년 한국보건산업진흥원과 한국건강증진개발원 등이 원격 의료 시범 사업에 나서자 의료계가 거세게 반발했다. 2014년 대한의사협회가 주도한 집단 휴진의 주된 이유 중 하나가 원격 의료였다. “비대면 진료가 확산되면 오진 가능성이 있고 의료 사고 책임 소재가 불분명하다”며 “한국 의료계의 고질적 문제인 대형 병원 쏠림 현상이 가속화될 것”이라는 이유를 들었다.
하지만 의료계에서도 원격 의료에 대한 신중론과 현실론이 교차할 정도로 상황이 변하고 있다. 원격 진료에 대한 ‘원칙적 반대’ 방침을 고수해 온 대한의사협회는 ‘원격 의료 대응 태스크포스(TF)’를 개설해 원격 진료를 포함한 원격 의료를 스스로 연구하고 방향성을 정립하는 등 대응에 나섰다.
의료 공급자인 의사들도 원격 진료를 경험한 후 변화된 인식을 보여주고 있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전체 의료 기관 중 3분의 1 이상이 비대면 진료를 시행한 경험을 갖고 있다. 개원의 중심의 서울시의사회가 지난해 의사 675명을 상대로 한 설문 조사에선 응답자의 86.7%가 ‘원격 의료 수요가 증가할 것’이라고 응답했다.
윤석열 정부가 들어서면서 원격 진료업계의 기대감도 커지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은 후보자 시절 “국민 모두가 원격 의료의 수혜를 누릴 수 있게 할 것”이라고 공언했다. 또 공약으로 디지털 헬스케어 산업 육성을 내걸었던 만큼 원격 의료에 관한 규제가 완화될 것이라고 보고 있다.
OECD 32개국은 허용하는데…‘시한부 운명’ 원격 진료 플랫폼
하지만 원격 진료는 여전히 시한부 운명이다. 지금은 누구나 원격 진료를 받을 수 있지만 경보 수준이 낮아지면 원격 진료에 대한 논의는 다시 30년 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의견도 나온다. 현재 원격 진료는 정부의 감염병 위기 대응 경보 ‘심각’ 단계에서만 한시적으로 허용하고 있다. 원래대로라면 원격 진료부터 약 배달까지 하고 있는 원격 진료 플랫폼은 불법이다. 의료법 17조와 33조, 34조를 위반하는 행위이고 약사법 제50조를 위반한다.
원격 진료와 디지털 헬스케어 산업은 금융이나 플랫폼보다 더 철옹성 같은 규제의 벽 앞에 놓여 있다. 삼정KPMG가 2020년 발간한 보고서에 따르면 글로벌 디지털 헬스케어 스타트업 상위 100대 기업 중 63개사가 한국에 들어오면 규제 때문에 사업이 아예 불가능하거나 제약을 받는다. 원격 진료, 원격 환자 모니터링, 의약품 배송 등이 모두 불법이기 때문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7개국 중 32개국이 원격 진료를 허용하고 있지만 한국에서는 의료인-의료인 간 자문이나 원격 영상 판독 등만 허용된다. 의료인-환자 간 원격 진료는 의료법상 불법이다. 2010년부터 의료인과 환자 간의 원격 진료를 허용하는 내용을 포함한 정부의 의료법 개정안을 비롯해 2014년과 2016년 의료법 개정안을 잇달아 국회에 제출했지만 개정에까지 이르지는 못했다.
의료 서비스 공급자 vs 수요자 간 간극 여전
의료 서비스 공급자와 수요자 간 간극도 여전하다. 대한의사협회가 전국 의사 6342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이들 중 77.1%가 원격 진료에 대한 부정적인 의견을 보였다. 반면 컨슈머워치가 의료 소비자를 대상으로 원격 진료에 대한 인식을 조사한 결과 이들 중 66.1%가 원격 진료를 긍정적으로 바라봤다.
업계에서는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원격 진료에 대한 법제화가 어떤 식으로든 이뤄질 것이라고 보고 있다. 최근 2년여 동안 비대면 진료가 350만 건 이상을 기록하자 정부에서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2021년 10월 국회 보건복지위원회가 진행한 보건복지부·질병관리청에 대한 국정 감사에서 권덕철 보건복지부 장관은 “의료계에서 우려한 비대면 진료의 안전성과 관련된 사고 등이 크게 나타나지 않았다”며 “국민 쪽에서도, 의료 기관 쪽에서도 편익이 있었다”고 평가했다.
원격 진료, 대학병원 쏠림? 동네 병원이 80%
원격 진료가 한시적으로 허용되는 동안 원격 진료에 대한 안정성을 검증할 만한 임상이 이뤄졌다는 것 또한 의미가 있다. 의사들이 원격 진료를 반대하는 가장 큰 이유였던 '대형 병원 쏠림화'가 실상은 정반대인 것으로 나타났다.
그동안 원격 진료를 반대하는 측에서는 “같은 가격에 이뤄지는 원격 진료라면 특정 병원이나 대학병원으로의 환자 쏠림 현상이 심화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2022년 1월까지 전체 비대면 진료 건수 중 79%가 1차 병원으로 분류되는 동네 병원(의원급)에서 이뤄진 것으로 나타났다.
이 같은 근거를 들며 원격 진료업계에서는 원격 진료 플랫폼이 경증 환자를 1차 의료 기관으로 유도하고 상급 병원에 환자가 몰리는 현상을 해소하는 등 의료 체계를 효율화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장지호 닥터나우 대표는 "원격 진료 플랫폼은 기존 의료 시장을 빼앗는 서비스가 아니라 개원의 등 의사나 약사와 함께 성장하는 서비스"라며 "올해 1분기 닥터나우 제휴 의료 기관의 수익이 지난해 간은 기간 대비 1995% 상승했다"고 말했다.
한국, 의사 수는 꼴등·진료 수는 일등
원격 의료에 대한 논의가 원점으로 돌아간다면 의료 주권을 놓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OECD 통계에 따르면 한국은 인구 1000명당 의사 수 최하위 국가다. 반면 외래 진료 수는 1년에 17.2회로 1위다.
의학계에서도 이대로라면 다른 국가보다 훨씬 빨리 수요와 공급의 불균형이 커질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다. 김준철 최고혁신책임자는 "한국의 의료비 지출은 지난해 35조6000억원에서 2030년 91조로 늘어날 것으로 추정된다"며 "의료 수급 불균형에 대비해 의료인을 확보하고 양성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이지만 효율성을 높이고 환자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서는 원격 진료와 의료 데이터 축적을 통한 헬스케어 산업의 성장이 필수적"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의료계에서는 여전히 오진이나 약물 부작용 등 풀어야 할 숙제가 많다는 입장이다. 원격 진료 플랫폼 역시 이러한 문제에 공감하며 ‘원격 진료가 되느냐, 안 되느냐’를 떠나 오진이나 약물 부작용 등에 대한 구체적인 가이드라인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국과학기술한림원(이하 한림원)은 2021년 발간한 ‘원격 의료 실현을 위한 한국 과학 기술의 현황과 극복 과제’ 보고서에서 법·제도 개선과 사회적 합의 등 선결 과제 등 합의 방안을 제시했다.
한림원은 “코로나19 사태의 영향으로 원격 의료 분야가 전 세계적으로 놀라운 성장을 보여주고 있지만 한국에서는 관련 제반 기술이 있음에도 널리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며 “답보 상태에 있는 원격 의료 문제를 해결하고 활성화하기 위해 활발한 논의가 더 필요한 시점”이라고 진단했다.
이후 원격 진료가 법적으로 허용된다고 하더라도 실제 의료인에 의해 활용되려면 건강보험상의 수가 정책 등 의료인이 원격 진료를 활용할 유인을 충분히 제시해야 한다고 분석했다.
한림원은 “만약 건강보험에서 원격 진료를 대면 진료와 동등한 또는 적어도 상당히 합리적인 수준의 수가를 인정해 주지 않는다면 의료인들이 원격 진료를 외면할 여지가 있다”며 “과거 미국 역시 미국 의료보험 회사들이 원격 진료에 대한 수가를 대면 진료 수가보다 훨씬 낮게 책정하는 바람에 미국 의료인들이 원격 진료를 기피하는 경향이 있었다”고 말했다.
물론 코로나19 사태 이후 의료보험 회사들이 원격 진료 수가를 대면 진료 수가에 상응할 정도로 상향하면서 의료인들이 원격 진료를 활용하는 비율도 높아졌다.
김영은 기자 kye0218@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