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주도 10년 마무리하고 판교밸리로 중심축 이동
[스페셜 리포트] 2022년 기업 문화 3.0시대 열린다“뭔가를 지키기 위해 일하는 ‘해군’이 아닌 자유롭고 공격적인 ‘해적’이 돼야 한다.”
스티브 잡스 애플 창업자가 강조한 해적 문화는 애플이 혁신 제품을 만드는 원동력이 됐다. 구글의 모토는 ‘사악해지지 말자(Don’t be evil)’다. 나쁜 짓을 저지르지 않고도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자는 의미다.
사우스웨스트항공의 창업자 허브 켈러허 회장은 ‘펀(fun) 경영’으로 항공업계의 패러다임을 바꾸고 ‘사우스웨스트항공 조크’라는 용어까지 만들어 냈다. 켈러허 회장은 “유머는 조직의 화합을 위한 촉매제”라며 “일은 즐거워야 한다”고 했다.
켈러허 회장은 출근할 때 회사 정문에서 집무실에 들어가기까지 직원들과 많은 대화를 하느라 점심때가 돼서야 집무실에 도착했다는 일화가 있다. 이 항공사는 1999년부터 일하기 좋은 기업(GWP)에 연속 선정됐다. 직장을 즐거운 곳으로 만들기 위한 리더의 노력과 직원들의 신뢰가 쌓인 결과였다.
스티브 잡스 ‘해군이 아닌 해적이 되자’
성공하는 기업에는 ‘문화’가 있다. 기업 문화는 조직의 가치를 창출하는 원동력이자 구성원들의 사고와 행동 양식을 규정한다. 직무 만족도·애사심·일체감·응집력·몰입 등에 영향을 미치므로 조직의 성장과 발전에 매우 중요한 요소다. 4차 산업혁명의 시대에 새로운 변화의 변곡점을 만들지 않으면 지속적인 성장이 불가능하다.
기업 문화의 대가 에드거 샤인은 “당신이 문화를 관리하지 않으면 문화가 당신을 관리할 것이다”라고 조직 문화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기업 문화는 전략보다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잘 갖춰진 문화는 기업 경쟁력의 원천인 인재 전쟁의 무기가 되고 경쟁사가 모방하기 어려운 차별적 경쟁 우위를 가져다준다. 잘나가는 기업들에서 독특한 기업 문화를 공통으로 찾아볼 수 있는 이유다.
한국 기업들도 10여 년간 문화를 바꿔 오고 있다. 수직적 직급에 따른 상명하복식에서 최고경영자(CEO)까지 ‘님’으로 부르며 수평적 조직 문화를 지향하는 기업들이 부쩍 늘었다. ‘월화수목금금금’이라는 한국 기업들의 장점(?)을 버리고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을 목표로 하는 것이 표준이 됐다.
코로나19 사태가 가속화한 디지털 대전환의 패러다임 속에서 기업들은 생존 전략의 핵심 가운데 하나로 기업 문화를 인식하기 시작했다. 기업 문화는 이직률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혁신적 문화가 조직 내 구성원의 참여를 높이고 이직률을 낮춘다는 연구 결과는 차고 넘친다.
조직 성과에도 긍정적인 효과를 미친다. 글로벌 컨설팅 기업 헤이그룹에 따르면 재무적 성과의 약 30%가 조직 분위기에 의해 좌우된다.
삼성이 시작한 실리콘밸리식 혁신
최근 10년간 한국의 기업 문화는 세 번의 큰 변곡점을 만났다. 판교테크노밸리 기업들의 부상,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유행), MZ세대(밀레니얼+Z세대)의 유입이 맞물리면서 기업 문화에 변화의 물결이 몰아쳤다.
그동안 한국의 기업 문화 혁신을 주도했던 것은 삼성이었다. 고 이건희 전 회장의 미래 지향적이고 도전적인 경영을 통해 삼성은 반도체·가전·스마트폰 등 주력 사업에서 세계적인 기업으로 도약했다.
세계적 기업이 된 것은 삼성에 또 다른 숙제를 던져줬다. 삼성을 성공으로 이끈 ‘빠른 추격자 전략’이 더 이상 통하지 않게된 것. 더 이상 따라할 만한 기업이 없었다. 삼성 경영진의 판단은 관리·전략 중심의 문화를 창조적 문화로 바꾸는 것이었다. 호칭·직급·복장·보고서·회의 등 전 분야에서 혁신을 시도했다.
이건희 전 회장이 2014년 쓰러진 이후 삼성은 기업 문화 혁신에 더욱 몰두했다. 이재용 부회장은 ‘관리의 삼성’이라는 키워드로 대표되는 관료주의적 문화를 바꾸기 위해 수평적 리더십을 강조하는 ‘뉴삼성’을 본격화했다.
그 일환으로 2016년 ‘스타트업 삼성 컬처 혁신’을 선포하고 실리콘밸리식 기업 문화 혁신을 시도하고 있다. 스타트업처럼 빠르게 실행하고 소통을 원활하게 하는 문화를 지향하면서 지속적으로 혁신하자는 의미에서다.
권위를 나타내는 용어 대신 ‘프로’ 등의 호칭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비효율적인 회의와 보고 문화를 개선하기 위해 ‘스피드 보고의 3대 원칙’을 실행했다.
권오현 전 삼성전자 회장 등 당시 경영진이 내부 게시판에 “5년, 10년 뒤에도 삼성전자가 경쟁력 있는 기업으로 존재하고 있을지 장담하기 어렵다”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 급변하는 시대에 기존 기업 문화로는 삼성이 추구하는 ‘퍼스트 무버’가 될 수 없다는 위기의식 때문이었다.
삼성은 2008년 보스턴컨설팅그룹(BCG)이 발표한 가장 혁신적인 기업 26위에 처음 선정된 이후 매년 상위권에 들고 있지만 애플·구글 등 세계 굴지의 정보기술(IT) 기업들에 비해선 여전히 관료주의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다는 평가다.
삼성이 이끄는 기업 문화 혁신에 복병이 나타난 것은 2010년대 중반이었다. 미국 실리콘밸리 기업 문화를 위시한 판교 기업들로 대표되는 스타트업, IT 기업들의 수평적 조직 문화가 4차 산업혁명 시대 경쟁력의 원천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기업 문화 변화의 중심축이 삼성에서 판교 IT 기업들로 바뀐 것이다. 네이버·카카오·엔씨소프트는 코로나19 확산에 따라 비대면 수혜 업종으로 성장 가도를 달렸다. 한때 카카오의 시가 총액이 재계 3위 현대차를 넘어서기도 했다.
공정거래위원회의 2022년도 공시 대상 기업집단(대기업 집단) 자료에 따르면 카카오는 자산 총액이 지난해 19조9520억원에서 올해 32조2160억원으로 올라 기업 순위가 18위에서 15위로 3계단 상승했다.
네이버는 자산 총액이 1년 새 13조5840억원에서 19조2200억원으로 늘어 27위에서 22위로 올랐다. 높은 연봉과 자유롭고 수평적인 조직 문화, 빠른 성장세에 힘입은 IT 기업들은 코로나19 사태를 거치며 취준생이 가장 취업하고 싶은 기업이자 직장인이 가장 이직하고 싶은 꿈의 기업으로 부상했다.
특히 이들은 스톡옵션(주식 매수 선택권)이라는 강력한 보상 제도를 통해 더 파격적인 기업 문화를 구축해 나가기 시작했다. 원한다면 전면 재택근무를 할 수 있고 옷차림은 아무래도 상관없으며 테슬라 자동차 10대를 대여해 계열사 직원들이 자유롭게 쓸 수 있는 곳까지 생겨났다.
IT 기업에선 능력만 있다면 30대에도 임원이 될 수 있다. 혁신 기업들은 최근 그 성장을 가속화하며 전통적인 산업과의 격차를 확대해 나가고 있다. 네카라쿠배당토직야(네이버·카카오·라인·쿠팡·배달의민족·당근마켓·토스·직방·야놀자) 등 IT업계가 단숨에 우수 인력을 흡수하는 인재 블랙홀로 떠오른 것은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코로나19·MZ세대 유입으로 변화 가속화
새로운 라운드를 촉발한 것은 코로나19 팬데믹 시기와 맞물린다. 기업 내 주류로 부상한 MZ세대와 코로나19 사태가 기업 문화 변화에 영향을 미쳤다.
MZ세대는 기존의 상명하복, 연공서열식 문화를 거부하고 자유롭고 수평적인 조직 문화를 추구한다. 회사보다 개인의 성장을 추구하며 가슴에 사직서를 품고 다니는 세대라고 할 정도로 ‘프로퇴사러(이직과 퇴사를 반복하는 사람)’가 보편화돼 있다.
정년퇴직과 평생직장의 개념도 약해 기성세대가 승진과 높은 급여를 목표로 회사에 다니던 것과 달리 이들은 승진에도 연연하지 않고 개인의 성장과 워라밸 추구에 중점을 둔다.
잡코리아·알바몬이 지난해 7월 20~30대 직장인 971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이들 중 60%는 불합리한 조직 문화를 경험하면 퇴사를 결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만큼 MZ세대를 담기 위한 기업 문화 구축이 중요하다는 의미다.
MZ세대가 추구하는 다양성과 창의성은 기업의 핵심 역량이 되고 있다. 인구 구조 변화로 점점 조직 내 MZ세대의 비율이 높아지고 있어 기업들도 대응책 마련에 부심하고 있다.
김영준 하나금융경영연구소 연구위원은 “기업은 MZ세대에게 회사에서의 자아실현이 가능한 ‘비전’을 제시할 필요가 있고 유연 근무제 일상화 등 새로운 근무 형태가 정착되기 위해서 경영진의 직원 신뢰와 직원의 책임감 있는 자세가 동시에 요구된다”고 말했다.
최근 기업들은 기업 문화 혁신에 속도를 내고 있다. 네이버의 최수연 대표는 ‘기업 문화 회복’을 최우선 과제로 꼽았다. 그 일환으로 네이버는 직원들에게 사무실 출근과 재택근무에 대한 선택권을 줬다. 직원이 업무에 몰입할 수 있다면 근무 장소와 방식은 중요하지 않다는 판단에서다.
네이버는 오는 7월부터 사무실 출근과 원격 근무 중 하나를 선택하는 근무제도 ‘커넥티드 워크(Connected Work)’를 도입한다. 커넥티드 워크는 직원이 1주일에 3일 이상 사무실에 출근하는 타입 ‘O’와 원하는 장소에서 원격 근무할 수 있는 타입 ‘R’ 중 고를 수 있다.
LG전자의 조주완 사장도 조직 문화 개선을 강조하고 있다. LG전자는 블라인드 기업 평점에서 2.1점을 받았다. LG전자 임직원들이 직접 평가한 내용으로, 5대 그룹 중 가장 낮은 수준에 속한다.
조 사장은 5월 3일 임직원들과 온라인으로 소통하는 자리를 열고 직원들의 불만을 구체적으로 공개했다. ‘우리 회사는 엉덩이가 큰 공룡처럼 앉아 있다’, ‘1주일 내내 회의용 보고장 표만 만든 적도 있다’, ‘위로 갈수록 잘 듣지 않는 것 같아 소통이 어렵다’ 등이었다.
조 사장은 이를 개선할 11개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했다. 구체적으로 ‘꽉 막힌 소통은 LG전자의 손상 원인이 된다’, ‘보고의 군살을 빼고 행동의 근육을 키우자’ 등 자유로운 소통을 강조한 내용이 대부분이다.
삼성전자 CEO들도 소통에 나서고 있다. 경계현 삼성전자 반도체(DS) 부문장(사장)은 지난해 12월 개설한 사내 프로그램 ‘위톡’을 통해 매주 수요일마다 구성원과 만나고 있다.
유영상 SK텔레콤 CEO는 지난 4월 임직원과 타운홀 미팅을 열고 수평적 소통 문화를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구현모 KT CEO는 취임 이후 2030 직원이 역량을 펼칠 수 있는 기업 문화를 조성하기 위해 ‘Y컬처팀’을 출범하는 등 조직 혁신에 힘을 기울이고 있다.
이런 노력과 함께 기업들의 인사 관리 방식에도 변화가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김기찬 가톨릭대 경영학부 교수는 “MZ세대 직원들에게는 목적을 통해 동기를 부여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지시의 전략이 아닌 공감으로 기업 문화를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인력 관리가 인풋(input)에서 아웃풋(output) 중심으로 바뀌면서 팀원들의 업무 진도와 아웃풋을 매일 평가할 수 있는 팀장의 역할이 중요해졌다”며 “팀장이 1주일에 한 번씩은 구성원들과 면담을 통해 업무 진도를 평가하고 코칭과 멘토링으로 부하 직원을 육성하고 성과 창출을 돕는 아웃풋 경영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안옥희 기자 ahnoh05@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