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CD가 지배하는 글로벌 곡물 시장…한국 기업의 역할은

포스코인터 팬오션 CJ 롯데상사 등 관련 시장 진출…“미래 식량난 막으려면 자체 수입망 확보해야”

[비즈니스 포커스]

우크라이나 체르니고프주의 위치한 농장에서 농부들이 곡물을 수확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세계 각국이 ‘식량 창고’를 걸어 잠그고 있다. 기후 변화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등으로 인해 식량 가격이 치솟고 있기 때문이다.

코로나19 사태로 가뜩이나 불안하던 식량 시장에 직격탄을 날린 것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다. 우크라이나는 전 세계 밀 수출량의 25%를 차지하는 ‘유럽의 빵 바구니’이지만 러시아의 침공으로 밀 수확량이 급감했다. 이에 더해 5월 14일부터 인도가 밀 수출을 금지하고 정부의 허가 물량만 수출하기로 결정하면서 식량난이 가속화될 것이란 우려가 나오고 있다.

밀에서 촉발된 식량난은 다른 식량군으로도 번지고 있다. 세계 1위 팜유 생산국인 인도네시아도 수출 제한에 나섰다. 인도네시아 업자들이 수출에만 집중해 내수 시장의 식용유 값이 오르고 품귀 현상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한국은 국가별 식량 안보 수준을 비교 평가하는 세계식량안보지수(GFSI)에서 2021년 32위를 기록하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최하위권이다. 전체 곡물 수요의 80%를 수입에 의존한다. 세계 각국이 식량 안보를 앞세울수록 난처한 상황에 놓일 수밖에 없다.

기후 변화와 전쟁 등으로 치솟는 식량 가격곡물 시장은 소수의 곡물 수출국이 자국의 소비량을 제외하고 다수 국가에 수출하는 ‘공급자 우위’의 성격을 띤다. 이는 이른바 ‘ABCD’로 불리는 세계 4대 곡물 기업이 유통을 꽉 쥐고 있기 때문이다. 아처대니얼스미들랜드(ADM)·번지(Bunge)·카길(Cargill)·루이스드레퓌스컴퍼니(LDC)가 ‘ABCD’인데, 이들은 전 세계 곡물 교역량의 75%를 장악하고 있다.

농협중앙회 농협경제연구소는 ‘ABCD’에 대해 “세계 각지의 농산물 생산지나 선물 거래소를 통해 대규모 곡물을 매입해 전 세계 곡물 수급과 가격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설명한다.

곡물 유통의 중요성을 깨달은 세계 각국은 종합상사와 국영 기업 등을 통해 시장에 발을 들여놓고 있다. 농협경제연구소에 따르면 일본은 2000년대부터 미쓰이·마루베니·미쓰비시 등 종합상사들이 인수·합병(M&A)을 통해 수출국의 곡물을 저장했다. 중국은 국영 기업인 중량그룹이 아시아 최대 곡물 유통 기업인 노블그룹과 네덜란드의 니데라를 인수했다.

한국에서는 포스코인터내셔널·팬오션·CJ·롯데상사 등이 곡물 유통업에 진출해 있다. 최근 식량난에 대한 우려가 커지자 곡물 유통 사업에 진출한 기업들에 시선이 쏠리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 관계자는 5월 4일 포스코인터내셔널을 방문해 식량 위기에 대한 대책을 논의했다. 이 자리에서 포스코인터내셔널 측은 우크라이나 곡물 터미널 운영 중단에 따른 영향과 미주 등 타 권역의 물량 확보 등 공급처 다변화 추진 현황을 공유한 것으로 알려졌다.

포스코인터내셔널은 2019년 9월부터 우크라이나 미콜라이우에서 연간 250만 톤의 곡물을 생산할 수 있는 터미널을 운영 중이다. 포스코인터내셔널은 이 곡물 터미널 지분의 75%를 인수했다. 물동량은 2020년 기준으로 116만2000톤이고 밀·보리·옥수수·대두 등을 취급한다.

지난해 포스코인터내셔널은 2030년까지 곡물의 취급량을 기존 800만 톤에서 2500만 톤으로 늘리고 연매출 10조원을 달성해 글로벌 10대 식량 종합 사업 회사로 도약하겠다는 목표를 밝힌 바 있다. 지주회사 포스코홀딩스는 식량을 철강과 2차전지 소재, 수소 등과 함께 ‘7대 핵심 사업’에 포함시키며 신규 성장 동력으로 점찍었다.

하지만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포스코인터내셔널이 운영 중인 우크라이나 곡물 터미널의 운영에 차질이 불가피해졌다. 2월 24일 러시아의 침공으로 인한 항만 폐쇄 이후 터미널 운영이 중단된 상태다.

벌크선사 팬오션 또한 곡물 운송에 진출해 있다. 2025년까지 500만 톤 이상의 판매 실적을 달성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팬오션은 축산과 양계로 성장한 하림그룹을 모회사로 두고 있다. 팬오션이 하림에 인수되면서 모기업과 시너지를 낼 수 있는 곡물 운송이라는 포트폴리오를 더하게 됐다. 옥수수·대두·옥수수주정박·소맥 등을 취급하고 있다. 2020년에는 곡물 트레이딩 사업을 주관하는 미국 법인이 이토추사가 보유한 미국 곡물 터미널 운영사 EGT 지분을 인수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식량 파동, 주기적으로 반복될 것” 기업들은 곡물 수출 터미널을 이용해 국제 가격이 낮을 때 곡물을 사 보관했다가 가격이 오르면 판매하는 방식으로 이익을 낼 수 있다. 식량이 인간의 삶을 떠받치는 근간인 만큼 곡물 산업은 향후 가장 유망한 산업군으로 떠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곡물 메이저의 ‘독과점’으로 한국 기업들의 사업은 순탄하지 않은 상황이다.

다수의 기업들이 곡물 유통 사업에 진출했지만 현재 한국은 여전히 곡물 수입량의 60%를 ‘ABCD’에 의존하고 있다. 농식품신유통연구원장을 맡고 있는 김동환 안양대 글로벌경영학과 교수는 “곡물 메이저들은 산지에서부터 수출 엘리베이터(곡물을 수출할 때 필요한 설비), 곡물 밸류 체인 전반을 장악하고 있다”며 “한국의 종합상사들은 산지까지 진출하지 못하고 곡물 유통 메이저와 거래하고 있어 이들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지정학적 리스크도 곡물 산업의 성장을 막고 있다. 러시아 연해주에 롯데상사·아로·서울사료·상생복지회 등이 진출해 있지만 현지 유통 위주로 한국 반입 실적은 미흡한 수준이라는 게 업계의 설명이다. 김동환 교수는 “러시아와 같은 국가들은 수출 통제에 따른 리스크가 커 비상시 곡물을 확보할 수 있는 대책이 되지 못한다”고 말했다.

식량난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코로나19 사태가 진정되고 전쟁이 끝나더라도 식량난이 심화될 것이란 예측이 나오고 있다. 식량 파동이 주기적으로 재현된다는 것이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기후 변화의 가속화로 환경이 변하고 있다. 또 중국의 식량 자급률이 지속적으로 하락한다는 것도 식량난을 부추기고 있다.

12년 전 한국은 글로벌 곡물 유통 업체를 육성하기 위해 정부와 민간 기업이 컨소시엄 형태로 사업을 추진한 바 있다. 하지만 경험 부족과 높은 진입 장벽으로 성과를 내지 못했다. 전문가들은 지금이라도 곡물 메이저에 대응할 수 있는 업체를 육성해 자체적으로 수입망을 확보해야 한다고 말한다. 김 교수는 “곡물 가격이 급등할 때를 대비해 수출국 곡물 유통 업체와 장기 곡물 도입 계약을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에 집중돼 있는 곡물 관련 터미널도 우방국 중심으로 추진할 필요가 있다. 미국·호주와 같이 식량이 풍부한 나라에서 해외 곡물 조달 시스템을 구축해 유사시에도 안정적으로 곡물을 확보할 수 있는 방향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명지 기자 mjle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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