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드만삭스, 모간스탠리 등 원유 140~150달러 전망…중국 봉쇄 해제 등 수요 폭등
[비즈니스 포커스]네덜란드 출장을 앞둔 A 씨는 요즘 항공권 요금을 확인할 때마다 놀란다. 지난 6월만 해도 95만원 정도였던 네덜란드 직항(편도) 항공권 가격이 1주일 사이 145만원으로 1.5배 뛰었다. 무섭게 치솟는 것은 항공권 가격뿐만이 아니다. 자동차 운전자들도 최근 몇 주간 오름세를 지속하고 있는 휘발유 가격 때문에 주유할 때마다 두려움이 앞선다.
항공권 요금과 자동차의 휘발유 가격이 급등한 것은 국제 유가 상승의 영향이다. 2월 24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원유의 수급 불균형 문제가 심화된 때문이다. 국제 유가가 배럴당 100달러가 넘는 초고유가 상황이 이어지면서 경기 침체 상황에서 물가 상승이 지속되는 ‘스태그플레이션’에 대한 공포 또한 커져 가고 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사우디아라비아 방문 계획을 발표하는 등 ‘급한 불 끄기’에 나서고 있다. 특히 최근 미 중앙은행(Fed)이 28년만에 '자이언트 스텝(기준금리 0.75% 인상)'을 단행한 이후 하락세를 보이고 있지만 안심하기엔 이르다. 월가의 글로벌 은행들은 올 하반기 국제 유가가 배럴당 150달러까지 치솟을 수 있다는 전망을 내놓고 있다.
JP모간체이스 회장 “유가 170달러 넘을 수도”
국제 유가의 벤치마크인 영국 런던 ICE선물거래소에서 거래되는 브렌트유의 가격은 6월 13일 기준 배럴당 122.27달러를 기록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전인 지난 2월 초 브렌트유가 배럴당 90달러 선에서 거래되던 것과 비교하면 전쟁 이후 4개월여 만에 30% 이상 상승한 셈이다. 뉴욕상업거래소의 서부텍사스산원유(WTI) 가격 또한 마찬가지 상황이다. 2월 초만 하더라도 배럴당 88달러 정도 하던 가격이 4개월여 만에 배럴당 120달러까지 치솟았다. 6월 13일 기준 WTI 가격은 120.93달러에 거래를 마쳤다.
월가의 글로벌 은행들은 유가 전망치를 잇달아 상향 조정하고 있다. 골드만삭스는 6월 초 보고서를 통해 유가가 2023년까지 강세를 유지할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했다. 하반기 국제 유가는 배럴당 140달러를 넘어설 가능성이 높다고 예상했다. 모간스탠리는 최근 올 3분기 국제 유가가 배럴당 150달러를 넘어설 것이라고 봤다. 제이미 다이먼 JP모간체이스 회장은 전쟁이 지속되면 유가가 배럴당 최고 175달러를 넘어설 수 있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지금까지 브렌트유의 역대 최고가는 2008년 7월 배럴당 147.50달러다.
암울한 전망이 지속되는 상황에서 고공 행진 중인 유가를 잠재우기 위한 다양한 조치가 논의되고 있지만 시장의 반응은 회의적이다. 6월 2일 비(非)OPEC 산유국 협의체인 OPEC+가 6월 정례 회의에서 7월과 8월 산유량을 50% 늘리는 데 합의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6월 13일에는 미국 민주당이 석유 회사의 초과 이익에 추가 세금을 물리는 법안을 추진하겠다고 발표했다. 오는 11월 중간 선거를 앞두고 유가 상승을 잡기 위한 강수다. 여기에 더해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유가를 잡기 위해 최대 4500만 배럴의 전략 비축유 방출을 지시했다. 바이든 행정부가 발표한 하루 방출량은 100만 배럴로, 러시아의 하루 원유 수출 감소량(300만 배럴)의 3분의 1 수준이다.
이에 따라 6월 14일 이후 브렌트유와 WTI 가격이 소폭 하락세로 돌아서는 모습이다. 120달러를 넘어섰던 브렌트유는 6월16일 기준 115달러까지 내려왔다. 특히 6월16일 미 Fed의 금리인상 발표 이후 브렌트유는 6월23일 기준 100달러 근처에서 거래되고 있다. 기준금리가 인상되면 선물시장에서의 이자 비용 등이 올라 투자심리가 위축된다. 이로 인해 국제 유가 하락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최근 몇 달간 급격한 상승세를 보이던 국제 유가가 하락세로 돌아섰지만, 여전히 안심하기엔 이른 상황이다. 국제 유가가 배럴 당 100달러 이상의 '초고유가' 상황이 지속되고 있는데다, 유가 상승을 이끌고 있는 근본적인 원인이 해소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국제 유가가 세 자리수 가격에 거래되는 것은 지난 2014년 이후 처음이다.
우선 원유의 수급 불균형 문제가 향후 더 악화될 가능성이 높다. 세계 최대 원자재 거래 중개 업체인 트라피구라의 제레미 웨어 최고경영자(CEO)는 6월 7일 파이낸셜타임스가 주최한 콘퍼런스에서 향후 에너지 시장과 관련해 “단기적으로 유가가 배럴당 150달러까지 상승할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며 “가뜩이나 원유 공급량이 부족한 상황에서 러시아의 원유 생산이 더 줄어들게 된다면 유가를 떨어뜨릴 수 있는 방법은 거의 없다”고 지적했다.
글로벌 에너지 시장에서 원유 공급량은 코로나19 사태 이후 이미 줄어들 만큼 줄어든 상황이었다. 항공과 여행업계가 급속도로 얼어붙으며 원유 수요가 급속히 줄자 2020년 4월 WTI 등 국제 유가가 사상 처음으로 ‘마이너스’로 떨어지는 사태가 벌어졌다. 줄어든 원유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글로벌 정유 업체들은 원유 생산량을 대폭 줄였다. 여기에 강화된 환경 규제 또한 큰 영향을 미쳤다. 자동차를 비롯해 친환경 제품이 확대될수록 원유 수요가 지속적으로 감소할 것이라는 전망이 제기되면서 글로벌 정유 업체들은 원유 생산량 확대에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이렇듯 바짝 조여 놓았던 원유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서는 상당한 비용과 시간이 소요된다. 그레고리 브루 예일대 잭슨국제문제연구소 연구원은 최근 포린폴리시에 기고한 칼럼에서 “팬데믹(감염병의 세계적 유행) 기간 동안 미국과 유럽 정유 공장들의 상당수가 문을 닫았다”며 “원유를 석유 제품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정제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정제 시설을 정비하는 데 상당한 비용과 시간이 들어간다”고 지적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원유 공급 부족을 심화시키는 결정타가 됐다. 유럽과 미국 국가들의 러시아에 대한 강력한 제재가 이어지면서 러시아의 원유 생산이 심각한 차질을 빚고 있다. 웨어 CEO에 따르면 러시아의 산유량은 이미 하루 130만 배럴 정도 줄어든 상태다. 웨어 CEO는 “이는 전 세계 석유 수요의 1% 이상을 차지하는 규모”라고 설명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유럽연합(EU)이 올해 말부터 러시아산 원유 수입의 90%를 감축하기로 합의하며 향후 러시아의 원유 생산량은 더욱 줄어들 가능성이 높다. 러시아는 전 세계 원유 공급의 14%를 담당하고 있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유럽 국가들이 남미 등으로부터의 원유 수입을 확대한다고 하더라도 고유가는 한동안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 원유를 수입해 오는 데 들어가는 운반비가 크게 증가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소비자들이 체감하는 유가는 더욱 높아질 가능성이 높다.
사상 최대 실적 행진 정유 업체들, 증산에 소극적인 이유는
원유 공급 부족에 대한 우려가 지속되는 와중에 원유 수요는 폭증하고 있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6월 15일 발간한 월간 보고서에서 “2023년 세계 석유 수요는 올해보다 2.2% 증가해 사상 최대를 기록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팬데믹 이후 일상으로의 회복이 빨라지면서 그동안 억눌렸던 여행 수요 등이 폭발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미국은 5월 30일부터 8월 말까지 이어지는 여름휴가철인 ‘드라이빙 시즌’이 본격화되며 원유 수요가 더욱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재택근무를 하던 직장인들이 다시 출근을 시작한 것 또한 원유 수요를 증가시키는 원인이 되고 있다. 이런 요인들에 따라 실제 미국 내 휘발유 수요가 증가하면서 지난 6월 10일에는 미국 내 휘발유 값이 사상 처음으로 갤런당 5달러를 돌파하기도 했다.
중국 또한 6월부터 상하이를 비롯해 코로나19 봉쇄 해제가 본격화되면서 향후 원유 수요 증가는 더욱 불이 붙을 것으로 보인다. 주요 산유국 중 하나인 수하일 마즈루아이 아랍에미리트(UAE) 에너지부 장관은 6월 8일 요르단에서 열린 한 콘퍼런스에서 “중국의 봉쇄가 아직 완전히 풀리지 않은 상황에서 현재 유가가 정점이라고 보기는 어렵다”며 “지금과 같은 상황이라면 하루 260만 배럴의 원유가 추가 공급돼야 한다”고 말했다.
유가 상승세가 가팔라지면서 미국을 비롯한 글로벌 정유 업체들은 사상 최대 실적 행진을 이어 가는 중이다. 세계 최대 정유사인 미국의 엑슨모빌은 올해 벌써 430억 달러(약 55조원)의 이익을 올렸다. 사상 둘째로 높은 실적이다.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글로벌원자재인사이트에 따르면 미국 내에서 셰일 오일을 생산하는 정유 업체들은 지난 20년간 벌어들인 돈보다 올 한 해 더 많은 현금을 벌어들이고 있다. 리서치 업체 리스태드에너지는 최근 보고서에서 유가가 현재 수준을 유지한다면 올해 미국 내 셰일 오일 생산 기업들의 잉여 현금 흐름은 1800억 달러에 달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잉여 현금 흐름은 투자자 본과 관리 지출 등을 제외하고 기업에 순유입되는 현금을 말한다.
바이든 대통령은 유가 폭등을 진정시키기 위해 미 정유업체들에 증산 압박을 강화하고 있지만 정작 미국 정유 업체들은 원유 생산량을 늘리는 데 소극적이다. 2000년대 초·중반 셰일 혁명 붐이 일었던 당시 상당수의 셰일 오일 생산 업체들이 과도한 설비 투자에 나섰다가 원유 공급량이 늘어나며 국제 유가가 배럴당 30달러를 밑돌 만큼 낮아졌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과거와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대신 더 많은 이익을 벌어들이는 데 집중하겠다는 전략이다.
미국 전체 원유 생산량에서 셰일 오일이 차지하는 비율은 70%가 넘는다. 현재 미국 내 셰일 오일 생산 업체들의 하루 생산 원유량은 1180만 배럴로, 팬데믹 이전 수준인 1300만 배럴을 밑돌고 있다. 미 정유 업체들의 증산을 유도하기 위해 민주당이 ‘징벌적 과세’라는 초 강수까지 들고나온 배경이다.
깊어지는 S 공포, 세계은행 등 경고 쏟아져
지속되는 초고유가 상황에 세계은행 등 국제 기관과 글로벌 연구소들은 ‘스태그플레이션’ 경고를 쏟아내고 있다. 시장 데이터 조사 업체인 데이터트렉은 최근 보고서를 통해 “국제 유가 배럴당 140달러는 글로벌 경기 침체를 예고하는 신호”라고 분석했다. 1970년 이후 국제 유가가 1년 새 2배 이상 오르면 통상적으로 1년에서 1년 반 내에 경기 침체가 오는 경향이 있다. 1년 전인 2021년 6월 무렵 국제 유가는 배럴당 70달러 수준이었다.
세계은행은 최근 글로벌 경제 전망 보고서를 발간하고 세계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지난 1월 4.1%에서 2.9%로 하향 조정했다. 데이비드 맬패스 세계은행 총재는 “이는 1970년대 오일쇼크 당시 경기 침체보다 2배 이상 빠른 속도”라며 “세계 경제는 현재 높은 인플레이션과 느린 성장을 동시에 겪고 있다”고 말했다. 과거에도 오일쇼크로 인한 세계 경제 침체를 겪은 바 있지만 현재의 상황은 수요와 공급 측면을 비롯해 모든 요인이 얽혀 있는 복합적인 위기라는 점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향후 몇 년 동안 스태그플레이션의 고통이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고 경고했다.
이정흔 기자 vivaj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