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르르 몰려가 기념사진 찍고 오는 관광버스는 옛일…요즘 트렌드는 현지의 라이프스타일 체험하는 여행
직장인 A 씨는 회사 이직으로 한 달 정도 시간 여유가 생겨 제주도 한 달 살기를 감행했다. 포털 사이트의 카페 ‘제주도 게스트하우스’에서 정보를 얻어 곳곳에서 실시간 숙소를 예약하며 한 달 동안 제주도를 한 바퀴 다 돌았다. 동네를 걷다 괜찮은 식당이 나오면 들어가 밥을 먹고 한참 동안 바다만 바라보며 멍 때리다 슬슬 역동적인 삶과 사람이 그리울 때쯤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관련 여행 상품도 속속 생겨나고 있다. 직장인 B 씨는 지난 주말 마음 편히 쉴 목적으로 강원도 횡성군 산채마을을 찾았다. 모닥불을 피워 놓고 ‘불멍’하며 마시멜로를 구워 먹고 해먹에서 낮잠 자다 비닐하우스에서 갓 딴 채소로 만든 샌드위치에 향긋한 커피 한잔 즐기는 여유는 그 자체가 힐링이었다. 산채마을은 농림축산식품부에서 운영하는 ‘소규모 농촌 체험 프로그램 개발 지원 사업’에 선정된 마을 중 하나다. 전국을 대상으로 심사를 거친 100개 마을이 지역 특성에 맞는 체험 여행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다. 최정미 농림축산식품부 농촌산업과 과장은 “지난해 20개 마을을 시범 운영한 결과 여행객들의 반응이 뜨거워 올해 100개 마을로 프로젝트를 확대했다”며 “반려견과 함께 하는 여행부터 엄마와 딸이 같이 하는 프로그램까지 다양한 마을 여행 상품이 생겨나 여행 수요가 꾸준히 몰리고 있다”고 했다.
잠시 방문해 유명 관광지에서 눈도장 찍고 오는 ‘관광’은 고릿적 이야기다. 머무르면서 지역 라이프스타일과 문화를 체험하는 로컬 여행이 요즘 대세다. 긴 시간 머무르지 못하더라도 지역에서 유명하다는 브루어리나 동네 책방, 카페를 방문하기 위해 여행을 떠나는 사람도 적지 않다. 지역 막걸리가 뜨면서 울산의 ‘복순도가’는 관광객을 불러 모으는 지역 대표 상품이 됐고 부산 광안리의 ‘갈매기 브루어리’, 인천 신포동의 ‘인천맥주’ 등은 MZ세대(밀레니얼+Z세대)에게 여느 유명 관광지 못지않은 인기를 누리기도 한다.
시골 체험 해볼까, 뉴스레터도 인기
로컬 체험 플랫폼도 눈길을 끈다. 농촌과 청년 세대 도시민을 연결하는 정보를 모은 뉴스레터 ‘안녕, 시골’도 그중 하나다. 문 연 지 2년 정도 되는데 구독자의 약 70%가 도시 거주 2030 여성 직장인들이다. 운영 주체는 광고 대행사 ‘브랜드 쿡’으로 뉴스레터 외에 시골과 농촌을 연결하는 체험 상품을 소개하는 플랫폼 ‘어마어마(어쩌다 마을 어서와 마을)’도 서비스 중이다.
브랜드쿡 차주영 마케팅 팀장은 “은퇴자나 귀농·귀촌 인구를 위한 프로그램은 많은 반면 도시와는 다른 라이프스타일을 체험하려는 젊은층을 위한 서비스는 마땅한 게 없어 사업을 시작하게 됐다”며 “뉴스레터 구독자 중 45% 이상이 체험에 관심이 높아 관련 상품을 꾸준히 늘려 가는 중”이라고 했다. 최근에는 농림축산식품부의 지원으로 귀촌한 사람과 도시민을 연결하는 시골 언니 프로젝트를 진행해 인기를 끌기도 했다. 강릉·강화·상주·서천·순창·옥천·울주·제천 등 8곳에 터를 잡은 시골 언니들과 함께 1주일 정도 함께 생활하는 프로그램인데 조기 마감되는 지역이 속출할 정도다. 한 지역을 선정해 해당 지역의 문화 공간과 농업 체험, 힙 플레이스 등을 전하는 ‘대동힙지도’나 3주간 또래 친구들과 함께 농사 지으며 살아보는 영월의 ‘잘자라소’, 바텐더·요리사·바리스타·로컬 PD 등 시골에서 할 만한 직업을 체험해 보는 ‘어쩌다 민박’ 등도 인기 체험 코너다. 차주영 팀장은 “소셜 채널에 올리기 위해 맛집이나 사진 찍기 좋은 곳을 찾는 보여주기 식 여행 트렌드와 상반되게 남들과 다른 삶을 추구하려는 젊은층의 니즈가 로컬 체험 인기로 반영된다”고 했다.
생활 터전을 완전히 시골로 옮기지는 않더라도 타지에서 일하며 다양한 삶을 경험하려는 트렌드 역시 로컬 여행의 한 축을 차지한다. ‘일(work)’과 ‘휴가(vacation)’의 합성어인 워케이션은 트렌드 이상의 문화로 자리 잡아 한국관광공사는 지방자치단체와 기업 워케이션을 연결하는 사업도 진행 중이다. 주로 강원도와 제주도 연계 프로그램이 인기가 높고 2박 3일부터 7박 8일 등 일정도 다양하다. 관광공사 국내관광마케팅팀은 휴넷이나 티몬 등 정보기술(IT) 기업을 중심으로 워케이션을 정식 인사 제도로 도입하는 기업이 늘어 워케이션 확산 추세는 당분간 지속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경험에 가치 두는 소비 문화에 지역 청년 문화 확산 가세
한국의 로컬 여행 트렌드는 지역의 청년 유인이나 도심 재생 사업 등의 정책적 요인으로 탄력을 받기도 한다. 갈수록 심해지는 지역 공동화 현상을 막기 위한 노력들이다. 이런 상황은 가까운 일본도 다르지 않다. 2019년 일본 나가사키현에서 인근 농어촌 마을의 민박과 체험 상품을 결합한 여행 상품인 ‘그린투어리즘’을 해외여행객 대상으로 론칭하며 여행 체험단을 운영한 적이 있다. 아오시마 섬에서 민박을 하며 바다 낚시를 해 직접 잡은 생선으로 끼니를 해결하고 소토메 지역 민박에 들러 동네 할머니들과 오코노미야키를 만들어 이웃과 함께 저녁을 나눠 먹는 식이다. 지역에 빈집이 늘어나며 집과 땅을 모두 준다고 해도 살러 오는 청년이 드물어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지역 문화를 알리기 위해 만든 여행 상품이라고 했다. 그린투어리즘을 시작한 이후 젊은이도 하나둘 돌아와 간이역에 작은 식당을 내거나 일본 차 문화 체험관 등을 운영하는 공간도 하나둘 생겨나기 시작했다고 한다.
한국도 국토교통부가 도심 재생 사업으로 지역의 로컬 문화 확산을 지원하자 지역 곳곳의 콘텐츠를 앞세운 로컬 문화 공간이 많아졌다. 실제 조선소 노동자들이 떠나 쇠퇴 일로를 걷던 부산 영도구 봉산마을에 ‘우리 동네 공작소 목금토’나 ‘목선 제작소 돛앤닷’ 등의 문화 시설이 생겨나 로컬 문화 확산의 원동력이 됐는가 하면 충북 조치원은 특산물인 복숭아를 활용한 수제 맥주를 상품화해 안정적인 수익 창출원을 만들기도 했다.
물론 경험과 가치 소비에 중점을 두는 요즘 MZ세대의 특성도 로컬 체험 확산의 주요 배경이다. 유튜브 ‘오느른’으로 폐가를 고쳐 살면서 전격 시골살이를 선보인 최별 PD의 이야기나 배우 김태리가 열연한 영화 ‘리틀 포레스트’의 생소하지만 여유 가득한 일상 풍경이 주는 로망의 힘은 MZ세대를 끌어당기는 힘이 세다.
최근 출간되는 여행서에도 이런 여행 문화는 고스란히 나타난다. ‘대한민국 요즘여행’은 지역의 유명 빵집과 카페, 뉴트로 감성 가득한 한옥 숙소 등을 소개하고 ‘로컬 에세이 프로젝트’라는 부제가 달린 ‘그래서 강원’은 5명의 작가가 강원도에서 느낀 로컬 문화의 이야기를 차분하게 풀어내기도 한다. ‘한경트렌드 틈틈이 가족여행’은 전국 여행 170여 곳을 소개하는데 ‘경주 불국사’, ‘부산 해운대’라는 여행 공식을 완전히 깨고 새롭게 부각되는 여행지는 물론 지역의 정원, 걷기 좋은 길, 지역 체험 여행 프로그램까지 최근 트렌드를 모두 담았다.
학벌·지역·직장이라는 기존 공동체를 벗어나 메신저의 오픈 채팅방에서 비슷한 취미와 관심사를 가진 사람끼리 취향을 공유하며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는 MZ세대의 문화적 다양성의 힘은 생활과 소비는 물론 여행으로까지 영역을 넓혀 나가는 중이다.
박스 기사)
나도 해볼까? 로컬 체험 추천 5
‘한경 트렌드 틈틈이 가족 여행’에서 소개하는 로컬 체험 여행 중 큰 부담 없이 즐길 만한 로컬 체험 여행 스폿을 5군데 꼽았다. 지역 마을협동조합이나 사회적 기업이 제공하는 로컬 체험인 관광두레부터 지역에서 직접 운영하는 골목 투어까지 종류도 다양하다.
대구 근대목골 투어
대구를 이해하기에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인 ‘골목투어’. 5개 테마의 코스로 구성돼 있고 길을 걷다 보면 ‘달구벌’의 기원, 조선 시대 행정 중심 도시로서의 면모, 독립운동의 중심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패션·예술 도시로서의 면모까지 대구의 역사와 현재를 알 수 있다.
파주 평화 오르골
오르골을 만들며 분단의 상징인 비무장지대(DMZ)에서 평화의 의미를 되새겨볼 수 있는 체험 프로그램이다. DMZ를 상징하는 지뢰와 총알 맞은 철모, 전사자의 총 등 전쟁의 상징물에 꽃을 더해 평화 기원 오르골을 만들어 보고 투어카를 타고 해설사와 함께 숲을 돌아보며 전쟁과 갈등의 의미를 되짚어 보는 숲 해설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안성 목금토 크래프트
안성 지역에서 활동하는 공예가들과 함께 도예, 가죽, 천연 캔들&비누, 한지, 금속, 천연 염색, 직조 등 7개 분야의 공예를 취향대로 경험해 볼 수 있다. 내 손으로 직접 빚는 도자기, 한 땀 한 땀 바느질로 완성하는 가죽 제품은 세상에 단 하나뿐이라 더욱 소중하다.
산청 풀꽃누리
천연 염색가 박영진 장인의 지도로 ‘규합총서’와 ‘동의보감’ 등 고서에 나오는 전통 천연 염색을 직접 체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다. 전통 천연색을 구현하고 산청의 한방 약초를 이용한 염색 원리도 익힐 수 있다. 산청의 청정 자연환경을 활용한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과 마을 관광까지 이어진다.
강진 외미골 이야기
동화책 ‘민들레는 민들레’의 작가 오현경 대표가 운영하는 곳으로, 외미골에서 재배한 단호박으로 만든 민들레라테를 마시며 야외에 이젤을 세워 놓고 동화책 작가가 된 듯 나만의 그림을 그리는 ‘나도 예술가’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다.
글 이선정 기자 sjlgh@hankyung.com 참조 ‘한경트렌드 틈틈이 가족여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