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넘어 산업 성장 이끌려면 기술이 중요, 그래도 기술보다 ‘인간’이 더 먼저”

창업 32년 만에 ‘콜마’ 상표권 100% 인수... 윤동한 한국콜마 회장 “기업의 문화를 연결하는 게 마지막 할 일”

[인터뷰]



1980년대 후반 한국은 고도 성장기를 거쳤다. 저금리·저유가·저달러 등 3저 호황이었다. 1988년 서울올림픽은 경제 호황의 정점에서 이뤄지며 소비 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기업인들은 또다른 기회를 엿보기 시작했다. 해외 시장과 새로운 비즈니스였다.

윤동한 한국콜마홀딩스 회장은 1989년 제약사 최연소 부사장직을 버리고 창업이라는 기회를 얻기 위해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한 잡지에서 본 ‘ODM(제조자 개발 생산) 비즈니스 모델’을 한국 화장품 시장에 도입하면 승산이 있겠다고 생각했다. 기술을 이전받기 위해 찾은 곳은 미국의 콜마였다.

윤 회장이 콜마의 문을 처음 두드리던 때만 해도 미국과 일본의 기술력은 ‘절대 넘을 수 없던 산’처럼 보였다. 하지만 기술에 대한 꾸준한 투자는 한국콜마를 변방이 아닌 중심에 자리 잡게 했다. 한국콜마는 지난 5월 콜마 본사에서 상표권을 인수했다.

7월 28일 서초동에 있는 집무실에서 만난 윤동한 회장은 “오늘날 K-뷰티의 성공 비결은 우수한 제조 플랫폼과 판매사의 협업 생태계에서 나온 시너지 덕분”이라며 “그 중심에 한국 최초로 화장품 ODM을 도입한 한국콜마가 있어 가능했다고 자부한다”고 말했다.

-한국콜마는 올해 5월, 창립 32년 만에 미국콜마에서 ‘KOLMAR’ 글로벌 상표권을 100% 인수했습니다. 인수가 갖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30년 전 미국콜마를 방문했을 때가 생각납니다. 변방이었던 한국에서 화장품 사업을 키우기 위해 전 세계 최대 화장품 시장인 미국을 찾아갔었죠.

회사 내부적으로는 한국콜마가 전 세계 ‘콜마의 중심이 됐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글로벌 시장 확대를 위한 유리한 포석이 될 것입니다. 나아가 한국 기업이 글로벌 기업의 상표권을 인수할 만큼 전 세계 화장품 시장에서 한국의 위상이 높아졌다는 방증이라고 봅니다.

북미에서 상표권 인수의 시너지를 내기 위해 미국 법인 PTP는 콜마 USA로, 캐나다 법인 CSR은 콜마 CANADA로 법인명을 변경했습니다. 현지에서 인지도 높은 콜마 브랜드를 적극 활용하려고 합니다. 또 연내 가동을 목표로 미국 뉴저지에 북미기술영업센터를 건립 중입니다.”

-콜마 브랜드 인수 후 달라지는 전략이 있습니까.

“콜마 상표권을 기반으로 미국과 캐나다 사업을 확대할 계획입니다. 현재 한국에서 하고 있는 제약과 건강기능식품을 직접 현지에서 판매하는 등 다양한 방안을 검토하고 있습니다. 콜마의 브랜드 가치와 한국콜마의 기술력을 합치면 충분히 도전해 볼만합니다.

화장품을 가지고 직접 브랜드 사업을 하는 것도 생각해 보고 있습니다. 다만 한국이 아니라 해외, 특히 북미·중남미 등 시장에서 기회를 살펴봐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글로벌 시장에서 ‘콜마’ 브랜드의 가치는 어느 정도인가요.

“미국콜마는 1921년 설립돼 100년의 역사를 지닌 브랜드입니다. 이번 인수는 단순히 브랜드 인수가 아니라 콜마 100년의 역사와 가치가 함께 온 것입니다.

브랜드 가치는 결국 기술력에서 확인할 수 있어요. 립스틱에 공기가 들어가면 쉽게 부러지고 산화가 이뤄져요. 립스틱의 공기 침투를 막기 위한 미세한 구멍을 없애는 기술이 미국콜마가 개발한 대표적인 기술입니다. 이 기술을 비롯해 보습 등 미국콜마는 뛰어난 화장품 기술을 여러 가지 최초로 개발했죠.

이 업계에 오래 몸담은 사람이라면 ‘콜마’ 브랜드의 명성을 잘 압니다. 뉴욕이나 이탈리아에서 열리는 화장품 브랜드 박람회에서는 콜마 부스가 가장 붐빕니다. 업계 관계자들이 어떤 신규 기술이 개발됐는지 살피러 오는 거죠.”

-한국콜마를 창립했을 당시 일화가 궁금합니다.

“15년간 제약회사에 재직하면서 최연소 부사장을 역임한 후 퇴사했습니다. 마음속에 품었던 창업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죠. 당시에는 퇴직자가 같은 업계에서 창업하는 것을 격려하는 분위기는 아니었습니다. 배운 게 제약인데 이와 겹치지 않으면서 비슷한 게 뭐가 있나 고민하다가 화장품을 선택하게 됐죠.

어느 날 잡지를 보다가 패션 쪽에 ODM 비즈니스 모델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자체적으로 개발한 기술을 브랜드사에 납품하는 ODM 비즈니스 모델을 화장품에 도입하면 괜찮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ODM 비즈니스 모델로 사업을 하던 콜마에 가기 위해 곧장 비행기를 탔죠. 당시 콜마는 13개 국가에서 ‘KOLMAR’를 사명으로 쓰면서 글로벌 네트워크를 형성했어요. 하지만 미국콜마 본사는 투자할 의사가 없다며 일본콜마를 찾아가 보라고 했어요. 일본콜마가 아시아 투자 계획이 있다는 것을 알려준 거죠. 그래서 미국에서 일본 오사카로 한달음에 날아갔습니다.

일본콜마에 지분 20%만 갖겠다고 제안했습니다. 돈이 없었어요. 일본 쪽에서는 ‘다른 기업인들은 지분 51%를 고집하는데 당신은 왜 20%만 투자하려고 하느냐’고 반문했습니다. 그래서 회사 지분보다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게 중요하다고 답했습니다. 투자를 이끌어 낸 후 당시 자본금 1억5000만원으로 3명의 직원과 함께 ‘한국콜마’를 세웠죠.”

-1990년대 한국의 화장품 시장은 어땠습니까.

“1980년대만 해도 방문 판매와 백화점을 중심으로 유통 채널이 단순했지만 1990년대부터 다변화됐어요. 또 지금이야 시장에 2만여 개의 화장품 브랜드가 있지만 당시에는 태평양과 한국화장품 등 상위 기업들을 중심으로 시장이 형성됐습니다. 이들이 기획·제조·유통을 모두 다루는 구조였죠.

독자적으로 제품 연구·개발(R&D)부터 디자인·생산까지 도맡는 ODM 비즈니스 모델을 도입한 한국콜마의 등장이 한국 화장품 시장의 변화를 촉진했다고 봅니다. 탄탄한 기술력을 지닌 R&D 제조 기업이 중소 화장품 업체들의 생산과 기술 개발을 도맡았죠. 중소업체들이 판매와 유통에 주력할 수 있게 되면서 업계의 판도가 뒤바뀌기 시작했습니다.”

-화장품 ODM 비즈니스 모델을 설계할 때 고려한 것은 무엇인가요.

“한국콜마의 시작은 주문자의 처방에 따라 단순 제조만 하던 OEM 비즈니스입니다. 사업이 안정 궤도에 오르자 ‘고객사 주문을 받아 제조만 해서는 미래가 없다’는 생각에 연구소를 설립하고 한국 최초로 ODM 비즈니스 모델을 도입했습니다.

우리 회사가 처음으로 도입한 ODM을 이해하는 데는 상당 시일이 필요했습니다. 발주 기업과 제조 기업 간의 구분이 확실하고 발주 기업의 힘이 훨씬 강할 수밖에 없는 OEM 구조와는 근본적으로 달랐기 때문이죠. ODM은 제조 기업이 원천 기술을 가졌기 때문에 발주 기업과 협업이 가능합니다. 따라서 이종업계에서도 화장품업계 진출을 용이하게 만들어 시장의 파이를 키울 수 있었습니다.

ODM의 관건은 기술력입니다. 제약회사의 철저한 품질 경영 시스템을 화장품에 적용해 한국 화장품의 품질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했죠. 제약의 품질 기준인 우수의약품제조관리기준(GMP)을 화장품에 도입해 우수화장품제조및품질관리기준(CGMP)를 만들었어요. 제약회사의 까다로운 품질 기준이 피부에 바르는 화장품에 적용하면 한국 화장품의 품질력이 한층 더 올라갈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한국콜마는 기술에 대한 투자를 아끼지 않는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기업의 성장뿐만 아니라 화장품 산업의 발전과 제조업의 ‘신 르네상스’를 만들기 위해서는 우리만의 기술력이 있어야 합니다. 창업 초기부터 직원의 30% 이상을 연구원으로 구성한다는 원칙을 지금까지 지켜오고 있습니다. 또한 연매출의 5% 이상을 신소재·신기술 연구·개발에 지속적으로 투자하고 있어요.”

-미국이나 일본의 기술을 넘어섰다고 판단한 시점은 언제인가요.

“1990년대 한국콜마가 비타민C를 함유한 파우더 제품을 개발했습니다. 일본과 미국 등 전 세계 콜마가 모두 뛰어들었지만 한국콜마가 가장 먼저 개발에 성공했죠. 이 기술이 적용된 제품은 당시 우리 고객사의 규모를 크게 키운 ’히트작‘이 됐어요. 그 후 일본콜마가 우리에게 기술을 문의하기도 했죠.”

-기술력 부문에서 일본과 미국을 앞지른 것은 대단한 성과입니다.

“한국이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원조 국가가 된 것은 끊임없는 기술에 대한 투자 덕분입니다. 특히 한국콜마는 소재의 국산화를 위해 지속적으로 투자했습니다. 그 결과 해외 의존도가 높았던 기술을 국산화하는 것에서 성과를 냈죠. 일본 기업만 생산이 가능했던 곡물 발효 성분(피테라 성분)의 대체 성분을 만들었고 일본이 독점적 지위를 갖고 있던 선크림의 주원료 ‘징크옥사이드’의 국산화에도 성공했습니다.”

-2018년 HK이노엔 인수에 이어 올해는 한국 1위 화장품 용기 회사인 ‘연우’를 인수했습니다. 연우 인수로 기대되는 효과는 무엇인가요.

“연우를 인수한 것은 글로벌 시장 확대를 위한 전략적 결정이었습니다. 900여 개의 국내외 고객사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는 콜마가 전 세계 100대 화장품 기업 중 50여 개 기업을 고객사를 두고 있는 연우를 품은 것이죠. 글로벌 시장 확대를 향한 콜마의 발걸음이 속도를 낼 것으로 기대합니다.

인수 시너지를 극대화하기 위해 우리가 기존에 선보여온 서비스 수준을 넘어 R&D·제조·용기·디자인까지 포괄하는 궁극적인 토털 ODM 서비스를 선보여 나갈 계획입니다. 나아가 K-의약품·K-건강기능식품을 전 세계에 전파하는 글로벌 뷰티 헬스 기업으로 발전시켜 나갈 예정입니다.”



-기업을 인수할 때 철학이 있나요.

“HK이노엔을 인수한 후 이노엔 직원들에게 두 기업의 문화를 엮어 새로운 문화를 만들자고 했습니다. 인수 후에도 콜마에서는 임원 한 사람과 실무진 한 사람만 파견했습니다. 연우 역시 마찬가지로 두 명만 파견합니다. 인수한 기업에서 사람을 너무 보내면 점령군처럼 돼 버려요. 인수·합병(M&A)은 회사를 사오는 게 아니라 회사의 인재들을 데려오는 것입니다. 그들이 일할 수 있게 만들어 주고 더 성장할 수 있는 비전을 제시하는 게 M&A를 성공으로 이끄는 길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금 한국콜마 경영진에게 창업자로서 강조하는 말이 있나요.

“기업의 문화가 무너지지 않게 연결해 주는 것이 제 마지막 할 일이에요. 한국콜마는 기술을 중시하는 기업이지만 그중에서도 인간을 존중하는 기술을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기술의 가치를 경제적인 면만 고려하면 인간을 존중하는 문화가 깨져 버려요. 비용 면에서 유리하다고 하더라도 인간을 대하는 가치가 무너지면 오래가지 못 해요.”

-경영 외에 관심을 두고 있는 일이 있나요.

“책을 읽고 책을 쓰는 것입니다. 한 가지 주제에 천착하면 끊임없이 자료를 정리해요. 이 자료를 순서대로 나열하면 목차가 되는데 목차를 만드는 것에는 몇 년이 걸려요. 책을 쓰는 것은 두 달이면 됩니다.
올해 이순신 장군의 어머니 초계 변씨를 다룬 ‘조선을 지켜낸 어머니’를 펴냈습니다. ‘역사 경영 에세이’라는 장르를 만들어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고자 했습니다.”

-창업자로서 심은 한국콜마만의 DNA는 무엇인가요.

“저는 지금도 1주일에 책을 3권씩 읽고 있습니다. 독서의 장점을 몸소 체득했기 때문에 그 경험을 나누기 위해 직원들과 함께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게 벌써 32년이 됐습니다

우리 직원들은 모두 연간 6권의 책을 읽고 독후감을 제출합니다. 현재 8만여 권의 독후감이 등록돼 있어요. 여느 도서관 못지않은 큰 자산이죠. 2006년부터 임직원의 독서량을 기록하기 시작했는데 읽은 책을 일반적인 책 두께로 환산하면 백두산 높이에 가까운 2293m가 됩니다.

한 가지 더 소개한다면 우리 회사 기업 문화 전반에 자리 잡고 있는 우보천리(牛步千里)의 정신입니다. ‘소의 걸음으로 천 리를 간다’는 뜻의 우보천리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묵묵히, 우직하게 목표를 향해 꾸준히 나아가는 것입니다. 콜마의 10대 경영 원칙 중 하나인 ‘우보천리’는 제가 기업인으로 살아오면서 얻은 지혜 중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이명지 기자 mjle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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