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에서 용리단길까지, 트렌드를 거리에 기록하는 용산[알쓸신잡 용산④]
입력 2022-08-13 06:04:02
수정 2022-08-13 06:04:02
한강로 재개발 구역 가까운 용리단길, 새로운 핫플레이스 등극
미국 샌프란시스코를 지나면 홍콩 뒷골목이 나온다. 조금 더 걸으면 일본 직장인들이 퇴근 후 맥주 한잔을 들이켜는 ‘다치노미(선술집)’가 등장한다. 우리말로 ‘서서 마시는’ 술집이다. 거리를 돌아다니다 보면 세계를 만날 수 있다. 이태원과 경리단길, 해방촌의 뒤를 이어 용산의 핫 플레이스로 떠오른 용리단길 풍경이다.
용산 변화의 바람은 상권에서도 일고 있다. 용산정비창 부지나 미국이 반환한 용산공원이 아니라 기존의 거리가 새롭게 탄생하는 분위기다. 정부가 마스터 플랜을 통해 도시의 변화를 행정적으로 계획할 때 한쪽에선 개성 넘치는 카페와 식당이 도시의 변화를 이끌고 있다.
강북과 강남 어디에서도 접근성이 좋은 용산은 오래전부터 색깔 있는 상권이 곳곳에서 발달했다. 이태원 뒷골목부터 떠오른 용산구 상권은 한남동·경리단길·해방촌까지 뻗어 나갔다. 오랜 시절 ‘핫 플레이스’ 자리를 유지하고 있는 만큼 상권별 부침도 있었다. 젠트리피케이션으로 개성을 잃은 이태원역 뒷골목은 클럽이나 술집 말고는 젊은 세대의 발길이 닿지 않는다. 임대료가 오르면서 이태원 뒷골목을 차지하고 있던 터줏대감들도 버티지 못하고 사라지는 일도 생겼다.
경리단길과 해방촌 상권은 예전같지 않다. 한남동 상권은 여전히 견고하다. 구찌의 플래그십 스토어 ‘구찌가옥’을 비롯해 다양한 패션 브랜드가 자리 잡고 있고 고급스러운 분위기의 식당과 바가 한남동의 정체성을 이어 가고 있다. 용산구에서 가장 최근 새 옷을 입은 상권은 지하철 4호선 신용산역에서 삼각지역으로 이어지는 이면 골목에 형성돼 있는 용리단길이다.경리단길·해방촌·한남동 바통 이어 받은 용리단길
용리단길 상권은 2017년 신용산역 인근에 아모레퍼시픽의 신사옥이 들어오면서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했다. 인근 대단지 아파트와 신축 오피스텔, 주상 복합까지 화려한 건물들 사이로 낡은 단독 주택과 다세대 주택, 상가 건물이 밀집해 슬럼화되던 곳이다.
2017년 아모레퍼시픽 사옥이 들어선 후 유동 인구가 늘면서 상가 수요가 증가했다. 이전까지는 손칼국수를 파는 식당과 백반집이 한강로 2가 일대의 맛집으로 통했다. 젊은 직장인들이 들어서면서 이 일대 주택 건물이 카페나 식당으로 용도를 변경했다.
작은 식당이나 카페가 하나둘 생기던 용리단길의 급격한 변화를 이끈 주역은 남준영 셰프다. 베트남 음식점인 효뜨와 남박, 홍콩식 중식당인 꺼거, 일본 다치노미식 이자카야 키보 등 남 셰프가 이 일대에서 운영하는 브랜드만 6개다.
작은 카페가 하나둘 생기던 용리단길은 2019년 남 셰프가 베트남 음식점 효뜨를 열면서 새로운 분위기가 형성됐다. 낡은 건물 사이를 걷다 보면 뜬금없이 노랗고 빨간색으로 알록달록하게 단장한 식당이 등장한다. 간판 색깔부터 서체까지 베트남에 여행을 온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현지 느낌을 재현했다. 내부는 베트남에서 직접 공수한 소품들로 꾸몄다.
효뜨가 성공하자 남 셰프는 2021년 홍콩식 중식당 꺼거를 오픈했다. 꺼거 역시 홍콩 배우 장국영이 등장하는 영화 속 식당을 그대로 재현한 듯한 분위기다. 짜장면과 짬뽕을 팔지 않고 홍콩식 광둥성 지역의 메뉴를 그대로 재현했다.
남 셰프가 다양한 브랜드를 성공시키자 해외 현지 분위기를 그대로 담은 식당이 용리단길의 정체성이 됐다. 같은 해 이탈리아 레스토랑인 포카치아 델라스트라다가 오픈했고 8월에는 미국 샌프란시스코 해변을 연상케 하는 쌤쌤쌤이, 9월에는 일본 다치노미 콘셉트의 키보가 문을 열었다. 주말이면 젊은 세대로 거리가 가득 차고 웨이팅은 필수다.
임대료와 권리금이 싸 뜬 용리단길도 이제는 젠트리피케이션을 걱정한다. 남 셰프는 “권리금 3000만~5000만원이던 가게들이 이제는 1억원 이상 내야 한다”며 “자본이 있는 기업이나 투자를 받은 플레이어 대신 창의력 있는 창업가들이 거리의 활기를 더 오래 지속할 수 있는 것이 용리단길에 남은 숙제”라고 말했다.
또 4호선 신용산역에서 드라마 ‘나의 아저씨’ 촬영지인 철길이 있는 곳까지 이어지는 뒷골목에도 개성 있는 카페와 레스토랑이 들어서며 용리단길의 한 축을 형성하고 있다.
이 밖에 과거 화랑이 있던 4호선 삼각지역에서 신용산역으로 이어지는 길가에는 이름 없는 음식점들이 들어서 젊은이들의 발길을 붙들고 있다. 화랑 폐쇄로 슬럼화되고 있던 길이 개성 있는 음식점 덕에 저녁이 되면 다시 불을 밝히기 시작했다.
앵커스토어만 6개...용리단길 핫플로 만든 30대 셰프
용리단길은 성수동부터 을지로까지 핫 플레이스가 만들어져 온 공식을 그대로 따랐다. 세월이 두껍게 쌓인 낡은 골목에 젊은 창업가가 작은 레스토랑을 연다. 접근성에 비해 권리금이 낮은 게 장점이다. 특별한 홍보를 하지 않았지만 인스타그램이나 블로그를 통해 새로운 공간에 대한 소문이 퍼진다. 화려함과 거리가 먼 서울의 중심가는 젊은 세대에게 새로움으로 다가간다. 노포들이 자리 잡고 있던 낡은 골목에 새로운 공간이 들어서자 거리는 생기를 되찾는다. 용리단길도 그렇게 만들어졌다. 2019년 서른한 살이던 남준영 셰프가 오래된 순댓국밥집을 임대해 베트남 쌀국숫집으로 만들면서 용리단길의 변화가 시작됐다.
-용리단길이 기존 경리단길이나 해방촌·한남동 상권과 다른 점은 무엇인가.
“직장과 다양한 거주 형태가 공존했다. 아모레퍼시픽과 국방부, 올해는 대통령 집무실까지 용리단길 근처에 직장이 늘면서 유동 인구가 많아졌다. 거주 형태도 다양했다. 신축 오피스텔과 대단지 아파트, 단독 주택과 낡은 다세대 주택이 공존했다. 신용산역과 삼각지역 사이에 있어 지하철역도 두 개나 있었다. 주변 건물에 주차 공간이 많아 자가용과 대중교통 모두 접근이 편했다. 접근성에 비해 노후 상가가 많아 권리금은 쌌다. 다양한 세대와 다양한 계층을 아우르는 상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6개 브랜드를 모두 성공시켰다.
“보통 식당을 열기 전 ‘내가 잘하는 메뉴’가 무엇인지부터 생각한다. 하지만 성공하려면 이 상권에 필요한 공간이 무엇인지를 생각해야 한다. 처음 베트남 쌀국수로 시작한 이유는 이곳에 설렁탕집이나 백반집 말고는 적당한 가격대에 먹을 수 있는 점심 메뉴가 없어서였다. 또 쌀국수는 20대 초반 소비층의 해장 메뉴이기도 하다. 다치노미 형태의 ‘키보’와 레트로 바 ‘새드클럽’은 직장인들이 밀집한 상권이어서 기획했다. 다치노미 혹은 가쿠우치라고 불리는 일본식 선술집은 일본 노동자들이 일을 끝내고 집에 가기 전에 맥주 한잔으로 피로를 푸는 문화였다. 용산 직장인들이나 요식업자들도 그런 공간이 필요하다고 봤다.”
-현지 분위기를 그대로 재현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나.
“베트남 레스토랑을 기획할 때는 모든 소품을 베트남에서 사왔다. 일본과 중국은 가 보지 못했고 코로나19 사태가 터지면서 갈 수도 없었다. 그 대신 접할 수 있는 모든 매체를 확인했다. 책과 인터넷 레퍼런스, 영화를 참고했고 풍물시장·동묘시장·당근마켓까지 온·오프라인 중고 시장을 다 돌아다녔다. 그런 식으로 디테일을 잡았고 필요한 디자인이 있다면 그래픽 디자이너와 함께 상의해 디자인했다.”
-용리단길 길의 변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처음 용리단길에 왔을 때 33~50㎡(10~15평) 가게 기본 권리금이 2000만~5000만원이었다. 지금은 같은 면적의 가게가 8000만~1억원이 됐다. ‘네가 값을 너무 올려놓았다’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점포 비용만 1억원 이상 발생하면 소상공인들은 접근하기 힘들다. 자본이 있는 기업이나 투자 받은 플레이어들이 계약해 버리면 가격은 계속 올라간다. 언젠가는 (젠트리피케이션으로) 경리단길 같은 쇠퇴를 피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이색적인 식음료(F&B) 매장뿐만 아니라 다양한 라이프스타일 브랜드가 계속 들어와야 상권이 지속될 수 있을 것이다.”
김영은 기자 kye0218@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