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구체적 방안 실리지 않았다” 비판…1기 신도시 반발 커지자 즉각 진화
“알맹이가 빠졌다. 270만 호라는 숫자보다 ‘어떻게’가 나와야 했다.”
“부동산은 정공법으로 나가면서 사회적 공감대를 모아야 하는데 시장의 눈치를 너무 봤다.”
“당장 주거 선호 지역에 정비 사업이 급격히 활성화될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윤석열 정부가 지난 8월 16일 첫 주택 공급 대책을 발표하자 부동산 전문가들은 대체로 비판적인 평가를 내놓았다. 270만 호라는 물량 제시는 있었지만 구체적인 실행 방안이 담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부의 이빠진 ‘선언’에도 이유는 있다. 재건축 규제를 무작정 풀었다가는 최근 하락세에 접어든 집값을 다시 자극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구체적 방안은 추후 제시해 속도를 조절하겠다는 복안이다.
‘부동산 정상화’를 내건 윤석열 정부의 첫 부동산 정책의 핵심은 공급 확대였다. 방법은 전 정권의 정책을 뒤집는 식이었다. 이전 정부가 과도한 규제로 공급을 억제했다고 보고 각종 규제를 완화해 민간 주도로 270만 호를 공급하겠다는 내용이었다.
특히 수요가 몰리는 지역의 재건축·재개발 규제 완화 방안에 가장 큰 관심이 쏠렸다.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이 ‘취임 100일 내 구체적 방안을 내놓겠다’고 공언한 만큼 시장에서는 초과 이익 환수제와 안전 진단 규제 완화가 대책에 포함될 것이라는 예측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270만 호라는 숫자만 나오고 구체적인 내용은 다시 ‘추후’로 미뤘다.
민간의 적극적인 참여가 이뤄질지도 미지수다. 원자재값 상승에 따른 공사비 증가와 금리 인상으로 조합과 시공사가 몸 사리기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일례로 최대 규모의 둔촌주공 재개발 역시 조합과 시공사 간 공사비 증액 갈등으로 공사가 중단되고 기존에 공사비를 대출해 줬던 대주단이 빠지는 등 난항을 겪고 있다.
손재영 건국대 부동산학과 교수는 “규제를 완화해 준다고 하더라도 지금은 물가 인상이나 경기 침체 우려 등으로 시장이 어려운 환경이기 때문에 조합이나 시공사들이 적극적으로 임할지는 지켜봐야 할 문제”라며 “공급 총량에 집착하지 말고 시장과의 치열한 논쟁을 통해 정공법으로 대책을 내놓아야 한다”고 말했다.
“부동산 경착륙 가능성 낮아”정부는 집값 상승을 우려하며 미온적인 대책을 내놓았지만 일각에서는 공급 과잉으로 인한 시장 침체 가능성을 지적하기도 한다.
3기 신도시에 이어 이른바 ‘4기 신도시’까지 더해지면 시장이 경착륙할 수 있다는 우려다. 하지만 원희룡 장관은 브리핑에서 과잉 공급 우려에 대해 일축하기도 했다.
원 장관은 “270만 호는 인허가 기준으로 실제 공급과 시차가 있고 주택 멸실도 감안해야 한다”면서 “민간 전문가들과도 적정한 수준이라고 계산했고 물량을 쏟아내겠다는 뜻이 아니다”고 밝혔다. 그는 “하락기에 공급을 줄였다가 상승기에 통상적인 상승이 아닌 폭등이 왔던 실패를 반복해선 안 된다”는 의지를 내비쳤다.
전문가들 역시 추가 주택 공급 필요성에는 동의한다. 함영진 직방 빅데이터랩장은 “충분한 주택 공급으로 시장의 집값 불안 우려를 낮추는 공급 시그널을 보낸 것은 긍정적”이라고 평했다. 하지만 “주택 경기 침체와 경기 위축에 따른 미분양·미계약 증가 문제 등 향후 풀어야 할 숙제는 상당해 보인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1기 신도시 정비 사업과 관련한 마스터 플랜을 2024년까지 마련하겠다고 발표한 것도 논란이 되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이 대선 당시 공약으로 내걸었지만 이번 대책에서 사실상 중·장기 과제로 미룬 게 아니냐는 지적이다. 이에 대해 원 장관은 적극 대응하고 나섰다.
“장관직과 정부의 책임성을 걸고 즉각 신도시 마스터 플랜 수립에 착수하겠다”며 1기 신도시 재정비에 장관직까지 걸었다. 정부는 2024년으로 예고한 1기 신도시 재정비 마스터 플랜 수립 시기를 최대한 앞당기겠다고 약속했다. 9월 중 마스터 플랜 수립을 위한 연구 용역을 발주하면 올해 말에는 용역에 착수할 것으로 보고 있다. 2024년 중 가장 이른 시일 내에 마스터 플랜이 수립되도록 관련 일정을 최대한 단축하겠다는 것이다.
정부의 8·16 공급 대책 발표 이후 해당 지역 주민들 사이에서 “윤석열 정부에서도 재건축은 물 건너갔다”며 거센 반발이 나오자 즉각 진화에 나선 것이다.
실제 8·16 대책에 1기 신도시 재건축 내용이 담기지 않으면서 1기 해당 지역 아파트 가격이 하락으로 돌아섰다. 부동산R114에 따르면 1기 신도시 아파트 가격 변동률은 8월 12일 발표 기준 보합(0.00%)에서 8월 19일 마이너스 0.02%로 떨어졌다. 재건축 움직임이 가장 활발한 성남시 분당구(-0.04%)에서 하락 폭이 가장 컸다. 평촌(-0.02%)과 산본(-0.01%) 역시 하락했다.
한국부동산원의 주간 아파트 가격 동향으로도 비슷한 추세가 확인된다. 8월 셋째 주(8월 15일 기준) 분당 아파트 값은 0.07% 떨어져 7월 넷째 주 이후 4주 연속 하락세를 이어 갔다.
기대감이 빠지면서 1기 신도시의 거래량도 급격히 줄고 있다. 경기부동산포털에 따르면 분당구 아파트 매매 건수는 지난 3월 235건에서 4월 222건, 5월 165건, 6월 72건으로 위축됐다. 7월 기준으로는 31건, 8월은 4건에 불과하다. 등록 신고 기한(계약일 이후 30일 이내)이 지나지 않아 아직 신고를 하지 않은 매물이 일부 있을 수 있지만 ‘거래 절벽’추세라는 게 중론이다.
거래가 줄면서 재건축 기대감이 반영됐던 호가도 내려가고 있다. 일산 한 공인중개사무소 관계자는 “기존 호가는 재건축 기대감이 이미 반영됐었다”며 “8·16 대책 발표 이후 호가를 4~5000씩 깎고 있기는 하지만 올해 초와 비교하면 많이 떨어졌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1기 신도시 곳곳에서 반발이 일자 국토부는 재빠르게 움직였다. 8·16 대책 이후 1주일 만에 국토부는 1기 신도시 재정비 민관 합동 태스크포스(TF) 공동팀장을 현재 국토부 실장에서 1차관으로 격상하기로 했다. 마스터 플랜 수립, 특별법 제정 등 1기 신도시 재정비를 위한 추진력을 높이겠다는 취지다.
TF는 경기 분당·일산·중동·평촌·산본 등 5개 1기 신도시별 전담팀을 구성하고 도시 계획 현황 분석과 노후 주택 정비, 기반 시설 확충, 광역 교통 개선, 도시 기능 향상 방안 등을 담은 마스터 플랜 수립을 지원한다. 원 장관은 특히 1기 신도시 재정비 마스터 플랜 수립 일정은 이례적으로 빠르게 추진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대규모 개발을 위한 종합 계획을 세우는 데 길게는 4년 넘게 소요되는 데 1기 신도시는 2년을 목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입주 30주년이 넘은 30만 가구의 재건축이 빠르게 본격화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입주 50년이 지난 강남구와 여의도 아파트의 재건축이 되지 않은 상황에서 1기 신도시 30만 가구의 재건축이 먼저 이뤄지면 지역 간 형평성 문제가 제기될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1기 신도시 30만 호는 강남3구(강남·서초·송파구)의 아파트와 맞먹는 숫자다. 원 장관 역시 “이주 대책 문제 등을 고려하지 않으면 전세 폭등과 계획 전체가 차질을 빚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김영은 기자 kye0218@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