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후원자’ RM, 그리고 K-아트의 꿈 [김희경의 컬처 인사이트]

후원가의 등장·대중의 유입·기업의 지원…3개의 톱니바퀴가 돌아간다

전시회를 찾은 RM. 사진: RM 인스타그램

“슈퍼스타 RM이 예술 후원자(art patron)의 역할을 맡았다.”

미국 일간지 뉴욕타임스가 7월 24일 보도한 방탄소년단(BTS) 리더 RM의 인터뷰 기사 제목이다. 뉴욕타임스는 이 기사에서 K팝 스타 RM의 미술 애호가이자 후원자로서의 면모에 주목했다.

RM의 미술 사랑은 이미 익히 알려져 있다. 한국 미술계에선 “RM이 다녀간 전시와 아닌 전시로 나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영향력이 크다. 그는 단순히 미술을 좋아하고 즐기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훌륭한 예술 후원자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 그는 자신이 소장한 조각가 권진규 씨의 ‘말’이란 작품을 서울시립미술관에 대여했을 뿐만 아니라 국립현대미술관에 1억원을 기부했다. 이를 통해 RM은 2020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올해의 예술 후원인 대상’을 받았다. K팝 스타가 가진 이 독특한 수상 경력은 더욱 빛나 보인다.
◆르네상스, 인상파 모두 예술 후원의 힘
사회에서 영향력 있는 인물이나 가문의 예술 후원은 엄청난 파급력을 가져온다. 하지만 미국·유럽 등과 달리 한국에선 예술 후원의 개념이 제대로 정립되지 않았고 인식도 저조한 편이었다. 그런데 예상하지 못한 분야에서 막강한 예술 후원자가 등장하며 분위기가 반전되고 있다.
RM의 활약으로 인해 미술 시장 전반에 활기가 돌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미술에 대한 장벽과 문턱이 확 낮아졌다는 점이다. 한국에서 미술은 일부 애호가들만의 고급 취미 또는 음성적 거래의 대상으로 여겨져 왔다. 하지만 RM의 예술 후원을 계기로 MZ세대(밀레니얼+Z세대)가 미술 시장에 대거 유입됐다. 뉴욕타임스도 박경미 갤러리 PKM 아트딜러의 말을 인용해 이 현상을 분석했다. 박경미 아트딜러는 “RM이 대중에게 미술을 더욱 쉽게 접할 수 있도록 했다”며 “미술관과 젊은 세대 사이의 장벽이 허물어지고 있다”고 얘기했다.

이 관심은 해외로도 확산되고 있다. 글로벌 팬들도 한국 미술 작품들에 많은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세계 3대 아트 페어인 영국의 ‘프리즈’가 아시아 최초로 한국에서 열리는 것도 이와 연결된다. 프리즈는 최근 한국에서 폭발적인 미술 소비가 이뤄지고 있는 것에 주목해 개최를 결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예술 후원은 눈엔 잘 띄지 않지만 큰 힘을 갖는다. 그 역사를 되짚어 보면 15~17세기의 메디치 가문을 빼놓을 수 없다. 흑사병이 유럽을 휩쓸고 간 자리, 오히려 찬란한 르네상스 시대가 열린 것에 메디치 가문은 큰 영향을 미쳤다. 메디치 가문은 예술가들이 예술 활동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부오나로티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산치오 등 미술사에 길이 남은 대가들 대부분이 메디치 가문의 후원을 받았다.

메디치 가문은 도시 전체에 생명력도 불어넣었다. 메디치 가문이 주문 제작한 작품들과 건축물로 가득한 이탈리아 피렌체는 1982년 도시 전 지역이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지금까지도 매년 수많은 관광객이 피렌체를 찾고 있으니 메디치 가문의 파급력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짐작할 수 있다. “메디치 없는 피렌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에 고개가 끄덕여질 정도다.

영화에서도 예술 후원과 관련된 이야기들을 발견할 수 있다. 영화 ‘우먼 인 골드’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가 그린 황금빛 그림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의 초상’을 소재로 한다. 이 그림 속의 주인공인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는 성공한 사업가 페르디난트 블로흐 바우어의 부인이었고 두 사람 모두 유대인이었다. 당시 유대인들은 사업을 통해 큰 부를 쌓았다. 그리고 이를 활용해 많은 예술가들을 후원, 사회에서의 영향력을 높였다. 오스트리아 문화가 꽃피게 된 것에는 이런 유대인 부호들의 힘이 컸다.

영화에선 부부가 예술가들의 후원자 역할을 하는 것으로 나온다. 현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실제 두 사람이 살던 집은 구스타프 클림트, 요하네스 브람스, 구스타프 말러 등 빈 주요 문화계 인사들이 드나들던 살롱의 역할을 했다.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의 초상’과 같은 빛나는 명작이 탄생할 수 있었던 것도 클림트를 후원하며 작품을 의뢰한 이들 부부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하던 이들의 만남은 서로에게 영감을 주며 빈을 모더니즘의 중심지로 자리잡게 했다.

그렇다고 반드시 막강한 부와 권력을 가진 가문 혹은 특정 민족의 대대적인 후원만이 예술 발전에 기여하는 것은 아니다. 영향력 있는 개인의 관심이 큰 힘을 발휘하기도 한다. 우리가 다른 미술 양식의 화가들에 비해 클로드 모네, 에두아르 마네, 폴 세잔 등 인상파 화가의 이름을 쉽게 떠올리는 것을 떠올려 보자. ‘히트 메이커스’의 저자 데릭 톰슨은 그 비결을 이들의 뒤에 있었던 조력자 구스타브 카유보트에게서 찾는다. 그는 군수 사업을 했던 아버지의 유산을 물려받은 인상파 화가였다. 하지만 자신의 작품을 알리기보다 동료 인상파 화가들을 도왔다. 그들의 밀린 화실 임대료를 내주고 작품도 사줬다. 그중 가장 인기가 없을 것 같은 작품만 일부러 골라 사들이는 ‘최후의 구매자’ 역할도 자처했다. 그 수도 많았다. 오르세 미술관에 있는 인상파 작품의 90%가 카유보트의 기증품일 정도다. 카유보트가 없었더라면 우리는 오늘날 인상파 화가들의 이름과 작품을 잘 알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 진가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을 수 있다.◆메디치家 “사람은 가도 예술은 남는다”
아쉽게도 한국 시장에서 예술 후원의 발전은 더디게 진행됐다. 경제 성장과 산업 발전 등에 무게 중심이 실려 있었기 때문에 문화와 예술에 대한 관심은 후순위로 밀렸다.
그럼에도 다행히 열악한 환경에 놓인 한국 예술가들을 응원하며 지원해 온 예술 후원가들이 일부 있어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절체절명의 순간 위대한 예술 후원가가 나타나 큰 도움을 받기도 했다. ‘문화 독립 운동가’로 불렸던 간송 전형필(1906~1962년) 선생이 대표적이다. 전형필 선생은 일제강점기 사재를 털어 수많은 국보급 문화유산들을 사들였다. 이를 통해 소중한 문화유산이 국외로 반출되는 것을 막은 것이다. 그는 1838년 한국 최초로 사립 미술관을 세워 대중이 쉽게 작품을 접할 수 있도록 했다.

이후에는 기업들이 나섰다. ‘메세나’ 활동이 확산됐다. 기업들은 젊은 예술가를 발탁하고 지원하는 것은 물론 문화 예술 교육을 받을 기회가 적은 농어촌 지역 등에서 청소년들에게 붓과 악기를 쥐여 주고 직접 배울 수 있도록 돕고 있다. 1975년 베네수엘라에서 빈민층 아이들을 위해 마련된 음악 교육 프로그램 ‘엘 시스테마’를 접목한 것으로, 예술에 대한 저변을 넓힌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RM과 같은 영향력 있는 개인 예술 후원가의 등장도 반가운 일이다. RM은 많은 사람들이 해외 미술품에 집중하는 것과 달리 한국 작품에 대한 깊은 애정을 보이고 있다. 그는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6·25전쟁, 군사 독재, 경제난을 겪은 세대의 한국 작가들의 작품을 수집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고 말했다. 바쁘게 해외 투어를 하던 중 오히려 자신의 뿌리가 한국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 말도 울림이 있다. 언젠가는 그가 만든 살롱이자 미술관도 만나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는 “건물 1층에는 카페, 2층엔 한국과 해외 작가들의 작품들을 전시해 젊은 세대의 관심을 끌 수 있는 공간을 그리고 있다”고 밝혔다.

물론 한국 미술 시장은 아직 갈 길이 멀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0.1~0.2%의 규모를 자랑하는 선진국 미술 시장에 비해 한국 시장은 0.02% 수준에 그친다. 그럼에도 해외에서 한국 시장을 주목하고 있는 이유, 앞으로 더욱 눈부신 발전을 기대하게 되는 이유는 명확해 보인다. RM과 같은 탁월한 안목과 깊이 있는 시선으로 멋진 꿈을 꾸는 후원가의 등장, 이를 계기로 문화 예술에 관심을 갖게 돼 열심히 공부하고 감상하는 대중의 유입, 제2의 메디치를 지향하는 기업들의 꾸준한 지원 등 3개의 커다란 톱니바퀴가 맞물려 열심히 돌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메디치 가문의 적극적인 예술 후원을 이끌었던 코시모 데 메디치는 이렇게 말했다. “메디치 가문의 영광이 사라지는 데는 50년도 채 걸리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은 가도 예술은 남는다.” 우리는 후대의 자손들을 위해 어떤 것을 남길 수 있을까. 우리 스스로가 영원히 기억되고 지속될 K-아트 열풍의 출발점이자 구심점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 담대하고 빛나는 꿈이 더욱 커지고 확산되기를 바란다.

김희경 한국경제신문 문화부 기자 · 한국예술종합학교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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