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이후 7번의 경기 침체에서 4번만 S&P수익률 앞질러
‘자산 포트폴리오 변동성 줄이는 역할’로 접근 필요
안전 자산으로 꼽히던 금값이 떨어지고 있다. 금은 전통적으로 위기에 강했다. 화폐 가치가 떨어지고 주식 시장이 불안해지면 위험 회피와 인플레이션 헤지를 위해 돈이 금으로 향했다. 시대를 막론하고 국가·종교·인종을 초월하며 고유한 가치를 인정받는 자산이기 때문이다. 경기 침체 때마다 자산 시장에서 ‘난세의 영웅’ 취급을 받아 온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번 위기에서는 금이 맥을 못 추고 있다. 최근 가격 움직임이 수상하다. 인플레이션 때마다 상승했던 국제 금값은 최근 4개월째 하락하고 있다. 2020년 11월 이후 최장기 내림세다. 이 때문에 금이 위기에 강한 자산이라는 데 의문이 따라붙고 있다. 금은 정말 위기에 강했을까. 1971년 리처드 닉슨 당시 미국 대통령이 금 본위제를 폐지한 이후 금융 위기 때마다 금값 데이터를 살펴보면 금이 오르는 공식을 알 수 있다. 세계 실물 경제 지표가 악화되고 달러 가치는 떨어져야 한다. 금융 시장 변동성이 커지거나 미국 중앙은행(FED)가 완화적 통화 정책을 펼칠때에도 금값은 올랐다.
보통 시장에서 ‘국제 금값’이라고 하면 뉴욕상품거래소에서 거래되는 금 선물 가격을 말한다. 선물은 장래에 나오게 될 현물을 특정 가격에 미리 팔거나 사는 금융 상품이다. 7월 26일 뉴욕상품거래소에서 금 선물 가격은 7월 들어 4.7% 떨어진 온스당 1717.7달러에 거래를 마쳤다.
'달러가 왕' 금 가치 하락
전 세계 중앙은행이 앞다퉈 금리를 인상해도 물가가 잡히지 않는 인플레이션 상황이다. 하지만 금은 인플레이션 헤지 수단으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가장 큰 이유는 ‘킹 달러(King Dollar)’의 귀환이다. 전 세계적인 긴축이 단행되면서 달러는 유례없는 초강세를 보이고 있다. 주요 6개 통화(유로, 일본 엔, 영국 파운드 스털링, 캐나다 달러, 스웨덴 크로나, 스위스 프랑)와 비교해 달러 가치를 산출하는 달러 인덱스는 7월 한때 108선을 뚫었다가 현재 106선으로 내려왔다. 달러 인덱스가 108선에 오른 것은 2002년 10월 이후 처음이다.
달러와 금값은 반대로 움직인다. 1971년 미국 정부가 금 본위제(금태환)를 폐지한 이후 기축 통화인 달러의 가치가 오르면 금의 가치가 떨어졌고 달러의 가치가 떨어지면 위험을 회피하려는 수요가 몰리면서 금값이 올랐다. 금 선물은 달러로 표시되기 때문에 달러 가치가 오르면 미국 외 투자자들은 금을 비싸게 사야 한다. 달러가 오르면 금 수요가 줄고 금값이 하락하는 구조다.
상장지수펀드(ETF) 투자회사 올드 미션의 앤드루 레카스 파트너는 월스트리트저널(WSJ)에 “사람들은 지금 ‘인플레이션 헤지 수단으로서의 역할도 제대로 수행하고 있지 못하는데 왜 금을 보유하는 데 돈을 지불해야 하나’란 생각을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미국이 금리 인상을 단행하면서 채권에 대한 투자 매력이 올라간 것도 금 약세의 이유로 꼽힌다. 10년물 미국 국채 금리는 최근까지 3%가 넘었다. 채권 시장에서 금리는 가격과 반대로 움직인다. 채권 금리가 상승하면 채권 가격이 하락한다. 저가 매수의 기회가 생기고 수익률은 높아진다는 의미다. 특히 경제 강국인 미국 국채는 달러만큼이나 안정적인 수익처로 꼽힌다.
3월에 2000달러 돌파한 금, 4개월 연속 하락세
올 초까지만 해도 금의 위상은 높았다. 3월 초 국제 금값은 온스당 2000달러를 돌파했다. 파이낸셜타임스 등 외신에서는 경기 침체 우려와 전쟁으로 인한 지정학적 리스크로 금이 각광받을 것이라는 보도가 나왔다. 하지만 인플레이션의 타격은 예상보다 강했고 미국 중앙은행(Fed)을 비롯한 각국 중앙은행의 금리 인상 속도도 시장의 예상을 웃돌았다. Fed가 올해만 네 차례 금리 인상을 단행하자 4월 1900달러대로 떨어진 국제 금값이 5월 1800달러대, 7월 1700달러대로 주저앉았다. 미국 상품선물거래위원회(CFTC)에 따르면 7월 19일 마감된 해당 주의 선물·옵션 거래에서 3년여 만에 처음으로 금 하락에 관련한 베팅이 상승 베팅보다 더 많았다.
스위스 투자은행 UBS는 금 선물 가격이 내년 6월까지 온스당 1650달러로 떨어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당초 제시했던 전망치 온스당 1700달러에서 하향 조정한 것이다. 전망대로라면 금값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직후 기록한 3월 고점 대비 15% 하락하게 되는 것이다.
금 관련 주식이나 ETF도 줄줄이 하락하고 있다. 뉴욕 증시에 상장된 세계 최대 금광 업체 뉴몬트의 주가는 14% 하락했다. 최근 뉴몬트의 분기 수익이 1년 전보다 약 41% 급감하면서 손실을 낸 영향이다. 다른 금광 업체 바릭골드 역시 7월 동안 주가가 13% 떨어졌다. 같은 기간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500지수가 4.7% 반등한 것과는 대조적인 모습이다. 수익률 집계 기간을 3개월로 넓히면 손실은 더 커진다. 뉴몬트와 배릭골드의 3개월 수익률은 각각 36.7%%, 30.7%씩 급락했다.
국제 선물 가격을 추종하는 한국의 금 관련 ETF 역시 고전하고 있다. 에프앤가이드에 따르면 설정액 10억원이 넘는 ETF 5종의 3개월 평균 수익률은 마이너스 16.7%다. 특히 지금처럼 환율이 높은 상황에서 환을 헤지하는 ETF 상품은 환율을 반영하지 않아 달러가 비싼 상황에서 투자 효과가 떨어지고 있다.
다만 한국거래소 KRX 금시장에서 사고파는 한국의 금값은 국제 금값과 다른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한국의 금 시세에는 국제 금 시세에 원화 대비 달러화 가치 상승분이 반영되기 때문이다. 여기에 한국 유가증권시장이 다른 국가와 비교해 더 큰 폭으로 급락하면서 투자자들의 위험 회피 수요가 몰린 결과로 분석된다.
한국거래소는 최근 1년 추이로 살펴보면 금 시세는 상승 추세를 유지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한국의 금 시세는 2019년 말 g당 5만6000원대에서 올 3월 7만8000원까지 40% 정도 올랐다가 최근 조금 떨어져 7만2000원 선을 유지하고 있다.
닉슨 쇼크, 금융 위기, 팬데믹 속에서 빛난 금
눈으로 보이는 ‘실물 자산’인 금은 오랜 시간 교환 가치가 있는 화폐로서 역할을 수행해 왔다. 칼 마르크스가 “화폐는 금이 아니지만 금은 원래 화폐다”라고 말한 이유다. 금 본위제가 이어진 1960년대까지도 금은 국제 통화의 중심이었다. 화폐 가치가 금과 연동되면서 달러를 비롯한 화폐가 일종의 ‘금 교환증’ 역할을 했다. 1944년 브레튼 우즈 체제 이후에는 금 1트로이온스(약 31.1g)가 35달러로 고정됐고 자연스럽게 세계 시장은 달러를 결제 통화로 했다. 지금과 같은 변동 환율이 아니라 고정 환율이었다.
금 본위제는 1971년 8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15년간 이어진 베트남 전쟁이 원인이 됐다. 미국이 금 보유량을 넘어서는 막대한 달러를 찍어냈고 달러 가치 하락을 우려한 독일, 프랑스, 일본 등 미 국채 보유국들이 “달러를 금으로 교환해 달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리처드 닉슨 당시 미 대통령은 달러와 금의 교환을 중단하겠다고 선언했다. 달러가 금을 뛰어넘는 경제 패권을 쥐게 된 계기다.
그렇다면 금은 정말 위기 때마다 강했을까. 1971년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이 금 본위제 폐지를 선언한 이후 현재까지 미국의 공식적인 경기 침체는 7번이다. 글로벌 경제연구기관 매크로트렌드 데이터에 따르면 그중 4번은 금 수익률이 S&P500 수익률을 앞섰고 3번은 S&P500의 수익률이 금 수익률보다 높았다. 금이 S&P500 수익률을 앞지른 것은 1973년, 2001년, 2007년, 2020년이다.
먼저 1970년대. 1971년 금 본위제가 폐지된 이후 미국 물가 상승률은 두 자릿수를 넘겼다. 이른바 ‘닉슨 쇼크’다. 물가 상승으로 달러 가치가 하락하면서 금값이 급등했다. 금이 인플레이션을 헤지할 수 있는 투자처로 각광받기 시작했다. 1973년 공식적인 경기 침체 선언 이후 16개월간 금은 87% 올랐고 S&P500의 수익률은 마이너스 13.1%를 기록했다. 2차 오일쇼크가 닥친 1979년부터 1981년까지는 금값이 195% 상승했다.
전 세계를 경제 불황의 늪으로 몰아넣은 금융 위기 때도 금이 빛을 발했다. 2008년 금융 위기 당시 18개월 간 이어진 경기 침체로 S&P500은 마이너스 37.4% 추락했다. 반면 명목 금값은 16.3% 올랐다. 범위를 넓혀 정보기술(IT) 버블 시기를 시작으로 금융 위기 직전까지인 2001년 5월부터 2008년 2월까지의 상승률을 살펴보면 약 266%에 달한다.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에도 금값 상승은 이어졌다. 2008년 10월 온스당 723.9달러에서 2011년 8월 1825.6달러로 약 152% 상승했다. 2008년 이후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 담보 대출) 부실 사태, 2009년 리먼 브라더스 사태, 2011년 미국 국가 신용 등급 강등 조치 등을 계기로 달러 가치가 흔들리면서 이 시기 금값이 급등한 것이다. 하지만 2013년부터 5년간 약세를 보여 왔다.
국제 금값이 사상 처음으로 온스당 2000달러를 넘긴 것은 2020년이다. 미국은 코로나19 사태가 터진 2020년 3월과 4월, 공식적으로 경기 침체를 선언했다. 미국을 필두로 각국 중앙은행이 앞다퉈 금리를 인하하면서 ‘제로 금리’ 시대가 열렸고 팬데믹(감염병의 세계적 유행)으로 인한 경기 불확실성이 커지자 금값이 치솟았다. 그해 8월 초 금값은 사상 처음으로 2000달러를 넘겼다.
이처럼 경기 침체와 금리 인하 기조에서 금은 늘 안정적인 수익을 내는 투자처였다. 따라서 Fed가 금리 인상 속도를 늦춰 미 국채 금리와 달러 가치가 내려간다면 금값이 탄력을 받을 수 있다는 관측도 있다. 골드 불리언 스트래티지펀드의 공동 포트폴리오 매니저인 제이슨 티드는 월스트리트저널과의 인터뷰에서 “금이 수익률 측면에서 놀라운 수준을 보여주지는 못하고 있지만 자산 다각화와 투자 포트폴리오의 변동성을 줄이는 측면에서는 올해도 금이 제 역할을 톡톡히 했다고 본다”고 말했다.
지금이 금을 저가 매수할 수 있는 기회라는 의견도 있다. 미국 경기 침체가 가시화되고 있는 만큼 Fed가 오는 9월부터 긴축 속도를 늦출 수 있다는 전망에서다. 전규연 하나증권 연구원은 “긴축 속도가 빨라질수록 경기 침체 가능성이 높아진다”며 “침체를 반영하면 Fed는 9월 이후 금리 인상 속도를 베이비 스텝(한 번에 0.25%포인트 인상)으로 전환할 가능성이 높다”고 예상했다. 그러면서 “이 경우 장기 금리가 하락하며 금값의 반등을 이끌 수 있다”고 분석했다.
김영은 기자 kye0218@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