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 리더십의 조건, 세계 지도자 6인의 어젠다[놓치지 말아야할 한경비즈니스 ①]
입력 2022-09-08 06:00:22
수정 2022-09-08 09:37:02
기아제로부터 인더스트리 4.0까지
대표 어젠다 설정 후 국가 의제 발전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은 성공한 대통령으로 꼽힌다. 그는 많은 이슈 가운데 우선순위를 정하는 능력 그리고 이를 관철하는 설득력까지 갖췄다는 평가를 받는다. 대통령학 학자들이 말하는 대통령의 성공 요인이다.
다른 말로 하면 어젠다 선점 능력이 탁월했다고 할 수 있다. 어젠다도 간명했다. 감세, 예산 절감, 국방력 강화였다. 다시 말해 ‘작은 정부’와 ‘힘의 미국’이었다. 모든 것이 경제 문제였다.
레이건 전 대통령의 더 중요한 성공 비결은 취임 1년 내에 이를 실행했다는 점이다. 6개월 만에 감세안을 의회에서 통과시켰다. 이어 다른 예산은 절감하고 국방 예산은 늘렸다. 정권의 힘이 강력할 때라는 점을 활용했다. 그는 하나의 이슈가 해결되지 않으면 다른 이슈를 부각시키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당시 알렉산더 헤이그 국무장관이 우선순위에 없던 외교 문제를 부각시키자 교체해 버린 일화가 이를 보여준다.
물론 집권 초기 물가는 잡지 못했다. 하지만 금리를 계속 올리고 있던 민주당 출신 폴 볼커 미국 중앙은행(Fed) 의장에 대해서는 한마디 비난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1983년 그를 연임시키며 결국 물가도 잡아냈다.
한국 사회는 ‘어젠다 실종’의 시간을 맞고 있다. 공정과 상식보다 정권 교체를 내세운 윤석열 정부는 미래 지향적 담론 형성에 실패하고 있다는 평가다. 느닷없이 등장한 ‘5세 초등학교 입학’ 같은 이슈는 역풍만 불러일으키고 있다. 물가 상승, 주가 하락, 급증하는 무역 수지 적자, 매달 올라가는 실업률, 시한폭탄 같은 가계 부채 등에 대한 대책은 보이지 않는다.
전문가들은 가장 중요한 집권 1년 차에 낮은 지지율, 어젠다 세팅 실패는 한국 경제 전반에 부담으로 작용할 것으로 보고 있다.
여기, 대표 어젠다를 가진 세계 지도자가 있다. 어떤 어젠다는 국가의 운명을 갈랐고 어떤 어젠다는 세계에 변화를 가져왔다. ‘대통령=어젠다’ 공식을 성립시킨 6인의 어젠다를 조명했다.
①룰라 전 브라질 대통령 / ‘기아 제로’
“하루 세 끼 밥을 먹게 해주겠다.”
이나시우 룰라 다 실바 전 브라질 대통령이 국민에게 한 약속이다. 그는 집권기 최대의 어젠다로 브라질 사람이면 누구나 배를 곯고 잠자리에 들어서는 안 된다는 ‘기아 제로(포미 제루·Fome Zero)’를 설정했다.
룰라 전 대통령에게 ‘기아 제로’는 평생의 숙제였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1980년 “모든 국민을 굶주림에서 해방시키겠다”는 슬로건을 내걸고 노동자당(PT) 창립을 이끌었다. 이후 빈곤 퇴치, 소득 불평등 해소를 위해 싸웠다. 2002년 넷째로 대선에 도전하며 ‘기아 제로’란 어젠다를 내걸었다. 당시 브라질 인구 1억7600만여 명 중 4400만여 명(25%)이 하루 1달러 미만으로 생활하는 절대 빈곤층이었다. 이 때문에 그의 어젠다는 확실한 선거 전략이 됐다. 룰라 전 대통령은 과거 청산의 메시지도 ‘기아 제로’에 담았다. 전임 군사 정권이 남긴 고물가와 재정 적자, 심각하게 쌓인 외채와 수많은 실직자가 청산의 대상이었다.
문제는 자금이었다. 당시 브라질은 국제통화기금(IMF)의 관리를 받고 있어 재정 집행에 제약이 컸다. 빈곤 퇴치 프로그램에는 막대한 자금이 투입돼야 했다. 선진국에서는 룰라 전 대통령을 ‘포퓰리스트’로 낙인찍었다. 룰라 전 대통령은 “배부른 소리 마라. 배고프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며 밀어붙였다. 결과는 룰라 전 대통령의 압승이었다. 빈곤 국가였던 브라질은 룰라 전 대통령의 임기 동안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으로 성장했다. 장기적 안목으로 복지 시스템을 설계했기 때문에 가능한 결과였다.
②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 / 재정 감축
“난 경제를 다루기 위해 뽑혔습니다. 재정 감축이야말로 경제를 제 궤도에 올려놓기 위해 꼭 해야 할 일입니다.”
1993년 미국 제42대 대통령에 당선된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은 첫 어젠다로 ‘재정 감축’을 설정했다. 민주당 내에서도 좌파로 알려진 그가 전통적 우파의 어젠다인 ‘재정 개혁과 균형 재정’을 첫 카드로 꺼낸 것이다.
클린턴 전 대통령의 지지 기반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민주당 내에선 배신자 비판이 쏟아졌다. 클린턴 전 대통령은 굽히지 않았다. ‘향후 5년간 매년 재정 적자를 1300억 달러씩 축소하겠다’는 법안을 발의하며 강수로 맞섰다. 여기에 부유층에 대한 증세도 포함했다. 이번엔 공화당이 반발에 나섰다. 민주당도, 공화당도 그의 편이 아니었다.
그런데 정치적 손해를 감수하며 실현한 어젠다는 오히려 클린턴 전 대통령의 회심의 카드가 됐다. 아니 미국 경제의 회심의 한 수가 됐다. 클린턴 전 대통령 취임 전 한 해 2900억 달러에 달하던 미국의 재정 적자가 줄기 시작하더니 1998년 재정 수지가 흑자로 돌아섰다. 클린턴 전 대통령 임기 마지막 해인 2000년에는 재정 흑자가 사상 최대인 2362억 달러에 달했다. 클린턴 시대는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최장기 재정 흑자 시대’로 평가 받는다.
미국 경제에 황금기도 가져 왔다. 그의 재임 기간 경제는 연평균 3.9% 성장했고 물가는 2.6% 상승에 그쳤다. 실업률은 완전 고용 수준인 5.2%로 억제됐다. 전임 정부인 조지 H 부시에게 이어 받은 7.5%의 실업률과 최악의 재정 적자를 클린턴 전 대통령이 해결한 것이다.
③루드 루베르스 전 네덜란드 총리 / 폴더 모델
“내년 1월 1일까지 협상을 끝내세요. 임금 인상을 억제하는 데 합의하지 못하면 정부가 직접 나서 어떤 조치라도 취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1982년 11월 17일 네덜란드 헤이그의 노·사·정 대화 기구 ‘노동재단’ 청사 회의실. 재계 대표와 노동자 대표에게 한 남자가 ‘최후 통첩’을 선언했다. 2주 전 총리에 오른 43세의 루드 루베르스였다. 루베르스 전 총리는 이들을 압박하기 위해 정부 예산을 동결해 버렸다. 강력한 공권력 개입 카드도 꺼냈다.
노사는 1주일간의 난상 토론 끝에 11월 24일 간단한 합의를 이뤄냈다. 노조는 임금 인상 요구를 자제하고 사용자 측에선 고용을 확대하고 기업의 주요 현안을 노조와 협의하며 정부는 기업들의 비용 감축을 위해 세금을 낮추는 등의 내용이 합의안에 담겼다. 합의는 협상이 열린 장소의 이름을 따 ‘바세나르 협약’으로 불렸다. 높은 실업률과 과도한 사회 복지에 시달리던 ‘네덜란드병’을 치유하고 ‘네덜란드의 기적’을 이루는 개혁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당시 네덜란드는 7% 가까운 물가상승률, 2년 연속 마이너스 성장, 10%에 이르는 실업률, 기업들의 잇단 도산으로 ‘유럽의 미운 오리새끼’로 불렸다.
바세나르 협약 이후 네덜란드 산별노조는 대부분 단체 협약을 개정했다. 기업들은 세금과 임금 부담이 크게 경감돼 국제적인 경쟁력을 갖게 됐다. 1990년대 네덜란드 경제성장률은 연평균 3%를 넘어 2.5% 수준에 머물렀던 유럽의 다른 국가들을 앞질렀고 실업률은 거의 제로(0)를 유지했다.
루베르스 전 총리는 이후 14년간 총리를 지내며 ‘노·사·정 타협을 통한 경제 성장’이라는 새로운 모델을 만들어 냈다. 네덜란드식 노사 모델은 노조가 임금 인상 요구를 자제하는 대신 사용자는 노조의 부분적 경영 참여 등을 보장하는 상호 협력적 노사 관계를 의미하며 세계적인 노사정 합의의 모델로 인정받고 있다. 흔히 ‘폴더 모델’로 불리는데 폴더는 ‘간척지’란 뜻으로 네덜란드를 상징한다. 즉, 바다의 위협에 직면해 살아온 네덜란드인들이 서로 타협하고 협력해 위기를 극복한 것처럼 노사정이 협력해 발전한다는 뜻이다.
④요시다 시게루 전 일본 총리 / 경제 우선
“민주주의를 실천하려면 우선 국민을 먹여 살리고 일자리를 줘 생활을 안정시켜야 한다.”
1946년 일본 총리에 오른 요시다 시게루의 어젠다는 ‘경제 우선’이었다. 당시 제2차 세계대전 패전국인 일본은 폐허와 다름 없었다. 성인 한 명의 식량 배급량은 하루 315g에 불과했다. 요시다 전 총리는 최우선순위로 일본인들의 배고픔을 해결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는 더글러스 맥아더 미 점령군 사령관을 거듭 설득한 끝에 매년 70만 톤의 식량 원조를 얻어 냈다. 식량 문제를 해결하자 국민들의 지지도 따라왔다.
식량 배급을 넘어 경제 재건에 나섰다. 요시다 전 총리는 1948년 전쟁을 포기하고 군대를 갖지 않는 내용을 포함한 헌법 개정을 추진했다. 군사력 포기와 경제 중심 정책을 누구도 거부할 수 없게 법으로 공표하겠다는 구상이었다. 반발은 컸다. 군사력을 포기하면 안 된다는 여론이 들끓었다. 요시다 전 총리는 라디오 연설을 통해 “군사력 없는 자립만이 전후 일본이 가야 할 길”이라고 국민들에게 호소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 일본의 평화헌법이다.
1952년 미 군정의 통치에서 벗어난 이후에는 군국주의자로 낙인이 찍혀 추방된 관료와 경제인을 불러들였다. 이때 미쓰이·미쓰비시·스미토모 등 6대 기업 그룹이 부활했다. 일본 경제 성장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음은 물론이다.
외교에서도 경제 부흥에 모든 것을 걸었다. 미국에 국가 안보를 맡기고 일본은 경제에만 집중하겠다는 전략을 세웠다. 그는 “친미와 경제 우선만이 일본이 살길”이라며 국민들과 의회를 설득했다. 대립 끝에 그해 9월 미국과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을 체결했다. 요시다 전 총리의 어젠다가 오롯이 경제 우선임을 보여주는 장면 중 하나다.
⑤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 / 오바마 케어
“정치적으로 나 편하자고 또다시 깡통을 길 아래로 차버리지 않겠다. 의료보험 개혁을 주장하는 최후의 대통령이 되기로 했다.”
영화 ‘식코’에는 손가락 두 개가 잘린 남성이 비싼 병원비에 한 손가락은 붙이고 한 손가락은 새 모이로 던져 버리는 장면이 나온다. 보험이 적용되지 않아 비싼 병원에 가지 못하는 현실을 지적한 장면이다.
과거 미국에서는 의료보험 개혁은 모두가 문제에 공감하지만 거대 보험사와 제약사 등 정치적 갈등으로 그 누구도 메스를 들이대지 못했다.
미국의 난제 중 난제 ‘의료보험’을 수술대에 올린 이가 있다. 미국 역사상 첫 흑인 대통령인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다.
미국은 선진국 중 전 국민 의료보험이 없는 유일한 나라다. 4500만∼4900만 명이 보험이 없어 병원 문턱을 밟지 못한다.
오바마 전 대통령은 민영 보험에만 의존하는 기존 의료보험 시스템을 바꾸고 전 국민의 의료보험 가입을 의무화해야 한다고 공표했다. 이른바 ‘오바마 케어’다. 공화당은 즉각 재정 적자 확대를 우려하며 강력히 반발했다. 당시 미치 매코넬 상원의원(공화)은 “전체 의료보험 비용은 더욱 늘어나고 우리는 빚더미에 파묻히게 될 것”이라고 비판했다.
국민들도 반으로 쪼개졌다. 공화당 정치인들은 사회주의 딱지를 붙이며 우파를 자극했다. 민주당에 우호적이었던 블루칼라 백인 남성들까지도 재원 마련을 위해 세금 부담이 커진다는 우려에 오바마 전 대통령에게 등을 돌렸다. 고소득자들은 또 의료보험 개혁이 의료 서비스의 질을 하향 평준화시킬까봐 우려했다. 반면 경제 위기로 민영 보험에 탈락한 이들은 의료보험 개혁을 지지했다.
오바마 전 대통령은 굽히지 않았다. 의료보험 미가입자가 진료를 미루다 응급 치료 비용 등으로 국가 부담이 더 늘어나고 과도한 의료비 부담이 가계의 가처분 소득을 줄이면서 경제 성장에 걸림돌이 된다고 설득했다. 또한 사보험에 맞서는 공공 의료보험 체계를 갖추겠다고 공언했다.
오바마 케어는 2010년 의회를 통과했지만 시행을 둘러싸고 또 한 번 갈등이 최고조에 달했다. 2013년 10월 1일, 17년 만의 정부 폐쇄(셧다운)로 이어지기도 했다. 오바마 전 대통령에게도 정치적 명운을 건 선택이었다.
지난한 대립은 2015년 연방대법원이 오바마 케어에 합법 결정을 내리면서 오바마 전 대통령의 승리로 끝났다. 그가 후보 시절부터 각별히 공을 들여 온 핵심 어젠다라는 점에서 정치적 의미는 컸다. 레임덕 없이 국정을 주도하게 된 것은 물론 그의 이름을 딴 확실한 업적도 남겼다.
물론 오바마 케어의 성패는 여전히 끝나지 않은 난제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존폐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그럼에도 오바마 전 대통령은 곧 오바마 케어다. 그 어떤 대통령의 어젠다보다 확실한 어젠다로 평가받는 이유다.
⑥앙겔라 메르켈 전 독일 총리 / 인더스트리 4.0
“디지털 기술을 산업 제품과 물류와 연결하는 ‘인더스트리 4.0’에 독일이 주도권을 잡을 기회가 있다.”
2010년 컨설팅 기업 딜로이트가 발표한 ‘세계 제조업 경쟁력지수’ 순위는 독일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제조업 강국으로 통했던 독일이 멕시코보다 아래인 8위에 자리했기 때문이다. 당시 독일은 저성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경직된 노동 시장을 개혁하지 못해 ‘유럽의 병자(sick man of Europe)’ 취급을 받아야 했다.
앙겔라 메르켈 전 독일 총리는 즉각 독일의 부흥을 주도하며 자존심 회복에 나섰다. 그의 진두지휘 아래 ‘인더스트리 4.0’이라는 국가 전략이 발표됐다. 인더스트리 4.0은 독일의 강점인 제조업에 정보통신기술(ICT)을 접목해 업무 경쟁력을 향상시키는 것을 뜻한다. 증기기관의 발명(1차), 대량 생산과 자동화(2차), ICT와 산업의 결합(3차)에 이어 넷째 산업혁명을 일으킬 것이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말이다.
메르켈 전 총리는 인더스트리 4.0 전략을 주도하며 더 이상 유럽이 글로벌 경쟁력에서 미국과 중국에 뒤처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이를 실행하기 위해 민·관 협력 정책 기구인 ‘플랫폼 인더스트리 4.0’이라는 공식 기구를 출범시켜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결과는 ‘대박’이었다. 연간 2417억 달러(2012년 기준)의 무역 흑자에 지난 10년간 1인당 수출액은 14만5347달러로 세계 최고 수준에 달했다. 2010년 7%대에 달했던 실업률은 5.2%로 떨어졌다. 독일을 충격에 빠뜨렸던 세계 제조업 경쟁력 순위도 급상승했다. 2010년 8위에서 2013년 2위로 불과 3년 만에 제조업 강국의 명성을 되찾은 것이다.
독일을 유럽 최고 경제 대국으로 이끈 메르켈 전 총리의 정치적 위상은 더욱 높아졌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장수 총리인 16년 최장기 집권에 성공했다. 메르켈 전 총리의 어젠다는 독일뿐만 아니라 세계를 사로 잡았다.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과제 ‘4차 산업혁명’이 세계 제1의 미국도 세계 굴뚝인 중국도 아닌 독일에서 시작된 것이다.
정채희 기자 poof34@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