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ITOR's LETTER] 제네시스 그안에 담긴 축적의 시간…독일차와 경쟁하는 첫 국산차로
입력 2022-09-24 06:00:03
수정 2022-09-24 06:00:03
[EDITOR's LETTER]
아나크로니즘(anachronism). 가장 좋아하는 예술 용어입니다. 한글로 번역하면 ‘시대착오’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 번역에는 단점이 있습니다. 긍정적 함의가 없습니다. 개인적 해석은 ‘작품에 녹아 있는 시간들’ 정도가 아닐까 합니다. 위대한 작품 안에 여러 시간대가 뒤섞여 있다는 말입니다. 작품이 만들어진 과거, 우리 앞에 작품이 있는 현재, 그 사이를 이어 주는 긴 시간 등입니다.
전문가들이 가장 위대한 그림으로 꼽은 벨라스케스의 ‘시녀들(라스 메니나스)’을 예로 들어볼까요. 스페인 프라도 미술관에 있는 이 그림이 눈 앞에 있다고 상상해 보시죠. 보고 있는 이 시간은 현재입니다. 이 그림이 그려진 것은 1656년, 과거입니다. 이후 365년간 이뤄진 수많은 지적이고 감성적 해석이 이 작품에는 녹아 들어가 있습니다. 이 수수께끼 같은 그림에 논쟁을 불러일으킨 대표적 인물이 미셸 푸코입니다. 저서 ‘말과 사물’ 발문으로 시녀들을 끌어들입니다.
대략 이런 내용입니다. 이 그림은 누구를 위해 그렸을까. 왕의 서재에 걸리기 위해 그려진 그림입니다. 궁중화였지요. 하지만 푸코는 말과 사물에서 오늘날처럼 미술관에 걸려 있어 많은 관람자가 보는 상황으로 해석했습니다. 궁정화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무시한 겁니다. 그 작품이 그려진 시대의 관점에서 해석하지 않고 사람들 앞에 전시된 시점을 기준으로 해석했다는 얘기입니다. 푸코는 이를 근거로 이 그림에는 회화의 세 가지 요소인 화가·모델·관객이 모두 두 겹으로 그려져 있다며 이를 ‘고전주의식 재현의 재현’이라고 결론 내립니다. 프랑스 예술사가 다니엘 아라스는 이를 두고 “푸코가 아나크로니즘을 범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아나크로니즘은 이렇듯 작품을 더 지적으로 즐길 수 있게 해주는 기능도 있는 듯합니다.
아, 얘기가 너무 많이 나갔습니다. 시간이란 작품뿐만 아니라 제품에도 깃들어 있다는 생각을 하다 여기까지 왔다는 점을 이해해 주시길….
이번 주 한경비즈니스는 현대차 제네시스를 다뤘습니다. 제네시스는 한국 자동차 산업 역사에서 처음으로 수입차와 직접 경쟁하는 차종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BMW나 아우디를 살까 아니면 제네시스를 살까’ 고민하는 사람이 생겼다는 말입니다. 한 기업 오너의 말에서 기사는 시작됐습니다. 3년 년 전입니다. “그는 지금 아우디를 타고 있는데 다음 차는 제네시스로 바꾸려고 합니다.” 언뜻 보면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젊은 세대들이 글로벌 시장을 휩쓰는 K팝이나 아이폰과 경쟁하는 갤럭시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처럼….
그러나 제네시스까지 오는 과정은 파란만장했습니다. 현대그룹 창업자 정주영과 그의 동생 정세영은 1960년대 자동차 사업을 시작합니다. 포드를 찾아가 엔진 기술을 달라고 사정했지만 거부당했습니다. 할 수 없이 일본 미쓰비시를 찾아가 제휴를 성사시킵니다. 하지만 미쓰비시도 자동차의 핵심인 엔진 설계도를 내주지 않습니다. 기술을 배우러 간 현대차 직원들은 특유의 무식한 방법을 씁니다. 미쓰비시의 도면을 몰래 베껴 가져옵니다. 그렇게 출발한 제휴는 2000년대 중반에 막을 내립니다. 현대차가 자체 엔진 기술을 확보했기 때문이지요.
굴욕은 이뿐만이 아닙니다. 미국에 1980년대 후반 차량을 수출합니다. 하지만 고장이 잦았습니다. 이 상황에 애프터서비스(AS) 네트워크는 없었습니다. 철수했습니다. 다시 미국 수출 전선에 나선 것은 2000년대 초입니다. 세계 자동차 산업의 격랑기였습니다. 전 세계 자동차업계가 인수·합병(M&A) 폭풍에 빠져든 시기, 미국의 GM과 포드, 일본의 도요타, 독일의 벤츠·BMW· 폭스바겐 등만이 살아남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예상을 뒤집고 현대차는 독자 생존에 성공했습니다.
제네시스에는 다양한 시간이 섞여 있습니다. 무모하게 자동차 사업을 시작했던 정 씨 형제들의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직 품질밖에 몰랐던 정몽구 명예회장의 시간이 옵니다. 이 당시 블라인드 테스트를 하면 현대차는 도요타에 뒤지지 않았습니다. 다만 내구성이 떨어졌습니다. 그랜저의 한계였습니다. 정 회장은 이를 극복했습니다. 그리고 현재가 왔습니다. 품질이 확보되자 디자인으로 그 꽃을 피운 정의선 회장의 시간입니다. 물론 현대차 직원들의 헌신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제네시스에 들어 있는 다양한 시간과 함께 시발자동차에서 시작한 한국 자동차 브랜드의 히스토리를 돌아볼 시간입니다.
김용준 한경비즈니스 편집장 junyk@hankyung.com
아나크로니즘(anachronism). 가장 좋아하는 예술 용어입니다. 한글로 번역하면 ‘시대착오’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 번역에는 단점이 있습니다. 긍정적 함의가 없습니다. 개인적 해석은 ‘작품에 녹아 있는 시간들’ 정도가 아닐까 합니다. 위대한 작품 안에 여러 시간대가 뒤섞여 있다는 말입니다. 작품이 만들어진 과거, 우리 앞에 작품이 있는 현재, 그 사이를 이어 주는 긴 시간 등입니다.
전문가들이 가장 위대한 그림으로 꼽은 벨라스케스의 ‘시녀들(라스 메니나스)’을 예로 들어볼까요. 스페인 프라도 미술관에 있는 이 그림이 눈 앞에 있다고 상상해 보시죠. 보고 있는 이 시간은 현재입니다. 이 그림이 그려진 것은 1656년, 과거입니다. 이후 365년간 이뤄진 수많은 지적이고 감성적 해석이 이 작품에는 녹아 들어가 있습니다. 이 수수께끼 같은 그림에 논쟁을 불러일으킨 대표적 인물이 미셸 푸코입니다. 저서 ‘말과 사물’ 발문으로 시녀들을 끌어들입니다.
대략 이런 내용입니다. 이 그림은 누구를 위해 그렸을까. 왕의 서재에 걸리기 위해 그려진 그림입니다. 궁중화였지요. 하지만 푸코는 말과 사물에서 오늘날처럼 미술관에 걸려 있어 많은 관람자가 보는 상황으로 해석했습니다. 궁정화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무시한 겁니다. 그 작품이 그려진 시대의 관점에서 해석하지 않고 사람들 앞에 전시된 시점을 기준으로 해석했다는 얘기입니다. 푸코는 이를 근거로 이 그림에는 회화의 세 가지 요소인 화가·모델·관객이 모두 두 겹으로 그려져 있다며 이를 ‘고전주의식 재현의 재현’이라고 결론 내립니다. 프랑스 예술사가 다니엘 아라스는 이를 두고 “푸코가 아나크로니즘을 범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아나크로니즘은 이렇듯 작품을 더 지적으로 즐길 수 있게 해주는 기능도 있는 듯합니다.
아, 얘기가 너무 많이 나갔습니다. 시간이란 작품뿐만 아니라 제품에도 깃들어 있다는 생각을 하다 여기까지 왔다는 점을 이해해 주시길….
이번 주 한경비즈니스는 현대차 제네시스를 다뤘습니다. 제네시스는 한국 자동차 산업 역사에서 처음으로 수입차와 직접 경쟁하는 차종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BMW나 아우디를 살까 아니면 제네시스를 살까’ 고민하는 사람이 생겼다는 말입니다. 한 기업 오너의 말에서 기사는 시작됐습니다. 3년 년 전입니다. “그는 지금 아우디를 타고 있는데 다음 차는 제네시스로 바꾸려고 합니다.” 언뜻 보면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젊은 세대들이 글로벌 시장을 휩쓰는 K팝이나 아이폰과 경쟁하는 갤럭시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처럼….
그러나 제네시스까지 오는 과정은 파란만장했습니다. 현대그룹 창업자 정주영과 그의 동생 정세영은 1960년대 자동차 사업을 시작합니다. 포드를 찾아가 엔진 기술을 달라고 사정했지만 거부당했습니다. 할 수 없이 일본 미쓰비시를 찾아가 제휴를 성사시킵니다. 하지만 미쓰비시도 자동차의 핵심인 엔진 설계도를 내주지 않습니다. 기술을 배우러 간 현대차 직원들은 특유의 무식한 방법을 씁니다. 미쓰비시의 도면을 몰래 베껴 가져옵니다. 그렇게 출발한 제휴는 2000년대 중반에 막을 내립니다. 현대차가 자체 엔진 기술을 확보했기 때문이지요.
굴욕은 이뿐만이 아닙니다. 미국에 1980년대 후반 차량을 수출합니다. 하지만 고장이 잦았습니다. 이 상황에 애프터서비스(AS) 네트워크는 없었습니다. 철수했습니다. 다시 미국 수출 전선에 나선 것은 2000년대 초입니다. 세계 자동차 산업의 격랑기였습니다. 전 세계 자동차업계가 인수·합병(M&A) 폭풍에 빠져든 시기, 미국의 GM과 포드, 일본의 도요타, 독일의 벤츠·BMW· 폭스바겐 등만이 살아남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예상을 뒤집고 현대차는 독자 생존에 성공했습니다.
제네시스에는 다양한 시간이 섞여 있습니다. 무모하게 자동차 사업을 시작했던 정 씨 형제들의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직 품질밖에 몰랐던 정몽구 명예회장의 시간이 옵니다. 이 당시 블라인드 테스트를 하면 현대차는 도요타에 뒤지지 않았습니다. 다만 내구성이 떨어졌습니다. 그랜저의 한계였습니다. 정 회장은 이를 극복했습니다. 그리고 현재가 왔습니다. 품질이 확보되자 디자인으로 그 꽃을 피운 정의선 회장의 시간입니다. 물론 현대차 직원들의 헌신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제네시스에 들어 있는 다양한 시간과 함께 시발자동차에서 시작한 한국 자동차 브랜드의 히스토리를 돌아볼 시간입니다.
김용준 한경비즈니스 편집장 juny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