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감하는 외환 보유액…떠오르는 외환 위기 트라우마

글로벌 소비 줄어 수출도 휘청…전문가들 “당분간 높은 변동성 지속될 것”

[비즈니스 포커스]

11월 8일 부산항 감만 부두에서 컨테이너 하역작업이 진행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외환 위기는 한국 사회에 깊은 트라우마를 남겼다. 외환 보유액은 순식간에 급감할 수 있고 이는 경제 위기로 이어져 수많은 실직자를 양산한다는 것을 경험했다. 이후 정부는 꾸준히 외환 보유액을 확충하고 2008년 금융 위기 때는 미국과 통화 스와프를 맺으며 안전판도 만들었다.

하지만 최근 외환 보유액 감소가 현실화되자 우려의 목소리가 곳곳에서 나오고 있다. 지난 9월 한국의 외환 보유액이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가장 큰 폭의 감소세를 나타냈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 외환을 확충할 수 있는 수출도 흔들리며 우려가 커지고 있다.

글로벌 통화 긴축 영향에 내년 경기 침체가 본격화되면 성장률이 1%대에 그칠 것이란 전망도 나오고 있다. 외환 보유액과 수출을 통해 한국 경제의 난제들을 짚어봤다.
‘자이언트 스텝’으로 벌어지는 한·미 간 금리 차 외환 보유액은 석 달 연속 감소 추세다. 한국은행이 11월 3일 발표한 외환 보유액 통계에 따르면 10월말 기준 외환 보유액은 4140억1000만 달러로 집계됐다. 9월 말 4167억7000만 달러보다 27억6000만 달러 줄었다. 외환 보유액은 3월 이후 4개월째 내리막길을 걷다가 7월 반등했지만 8·9·10월 석 달 연속 감소했다.

특히 지난 9월 금융 위기 이후 가장 큰 폭으로 줄었다. 9월 한 달 사이 외환 보유액은 196억6000만 달러 줄어들어 금융 위기 당시인 2008년 10월 274억 달러 이후 가장 큰 감소 폭을 기록했다.

9월과 10월 들어 환율은 1400원대를 오가면서 고공 행진했다. 이에 따라 외환 당국은 환율 방어를 위해 시장에 달러를 내다 파는 시장 개입 등을 단행했고 이로 인해 외환 보유액이 감소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은행은 10월 외환 보유액 상황에 대해 “금융기관 외화 예수금, 기타 통화 외화 자산의 미 달러 환산액은 증가했지만 외환 시장 변동성 완화 조치의 영향 등으로 감소했다”고 설명했다. 외환 시장 개입을 위해 보유하고 있는 달러를 썼다는 얘기다.

외환 보유액 감소에는 국민연금과의 외환 스와프 영향도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앞서 국민연금은 한국은행과 올해 말까지 100억 달러 한도 내에서 해외 투자에 필요한 달러를 조달하는 외환 스와프 계약을 체결했다. 국민연금이 외환 보유액에서 달러를 조달하고 나중에 만기가 되면 한국은행에 다시 달러로 갚는 형식이다.

한국은행 관계자는 “10월 중에는 9월과 비교해 외환 시장 쏠림 현상이 완화됨에 따라 변동성 완화 조치 규모가 큰 폭으로 감소했다”며 “국민연금과 외환 당국 간 외환 스와프, 수출 기업의 달러화 매도 등이 한국의 수급 여건 개선에 기여했다”고 평가했다.

설명은 납득할 수 있지만 외환 보유액을 주목하는 것은 한국이 약 25년 전 혹독한 외환 위기를 겪었기 때문이다. 정부는 외환 위기 이후 외환 보유액을 늘리는 것에 초점을 맞춰 왔다. 한국의 외환 보유액 규모는 9월 말 기준으로 세계 9위 수준이다. 중국이 3조290억 달러로 가장 많고 일본(1조2381억 달러)과 스위스(8921억 달러), 대만(5411억 달러), 러시아(5407억 달러) 순이다.

물론 아직까지 외환 보유액은 안심해도 되는 수준이라는 게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한국은행은 “향후 원·달러 환율이 한국 경제의 펀더멘털, 주요 통화 움직임과 과도하게 괴리돼 쏠림 현상이 심화하면 적극적인 시장 안정화 조치를 할 계획”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지난 10월 국정 감사에서 “국제통화기금(IMF)에서 한국의 외환 보유액가 적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고 말했다.

허장 IMF 상임이사는 10월 12일 “IMF는 오히려 한국이 외환 보유액를 너무 많이 쌓는다고 지적하는 편이다. 과거와 달리 정부뿐만 아니라 민간이 가진 외환도 상당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 경제의 근간, 수출이 흔들린다 외환 보유액의 감소치가 아직은 걱정할 수준은 아니라지만 미국의 금리 인상과 원화 하락으로 감소세가 더욱 가팔라질 것이라는 것은 충분히 우려할 만한 점이다.

미국의 금리 인상이 또 한 번 이어지면서 한·미 간 금리 차는 1%포인트로 다시 한 번 벌어졌다. 미국 중앙은행(Fed)이 11월 3일(현지 시간) 4연속 자이언트 스텝(한 번에 기준금리 0.75%포인트 인상)을 단행했다. 이에 따라 미국의 기준금리는 3.00~3.25%에서 3.75%~4.00%로 인상됐다. 제롬 파월 Fed 의장은 “최종 금리 수준은 지난 번 예상보다 높아질 것”이라면서 당분간 금리 인상을 멈추지 않을 것을 암시했다.

한·미 간 금리 차가 더 벌어지면서 외국인 자금의 유출도 현실화되고 있다. 내년 초 환율이 달러당 1500원대를 돌파할 가능성도 높아졌다. 원화 약세 기조가 계속될 것은 당연하다.

고환율이 지속되는 상황에서 수출이 흔들린다는 점은 한국 경제에 위기감을 더하고 있다. 수출 부진이 지속된다면 외환 보유액은 감소할 수밖에 없다. 9월 외환 보유액이 2008년 이후 가장 큰 폭으로 감소한 것에도 무역 적자의 영향이 컸다.

수출이 둔화되면서 당장 경상수지(재화나 서비스를 외국과 사고파는 거래, 즉 경상 거래의 결과로 나타나는 수지)에는 빨간불이 켜졌다. 한국은행 조사국 국제무역팀에 따르면 조업 일수 효과를 제거한 하루 평균 수출을 살펴보면 올해 2분기는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3.9% 증가했지만 8월에는 2.2%만 증가했고 9월에는 0.4% 늘어난 것에 그쳤다. 반면 수입은 증가세가 다소 약화됐지만 에너지를 중심으로 여전히 높은 지수를 지속하고 있다. 수출의 둔화 모습이 뚜렷한 것이다.

9월 경상 수지는 한 달 만에 16억1000만 달러 흑자 전환됐다. 하지만 흑자 폭은 계속 줄고 있다. 올 1~9월 누적 경상 수지 흑자 규모는 241억4000만 달러로 지난해 같은 기간(674억1000만 달러) 대비 432억7000만 달러 줄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한국의 재화를 사 줄 시장의 상황이 좋지 않다. 한국의 주요 수출 대상국인 미국·중국·유럽연합(EU)의 경기가 동시에 위축되고 있다. 미국과 EU는 2000년대 이후 가장 가파른 물가 상승과 이에 대응한 금리 인상으로 동반 하강하고 있다. 중국은 ‘제로 코비드’ 정책과 부동산 경기 부진 등 내부 문제로 성장세가 크게 둔화되고 있다.
한국은행은 “과거 금융 위기나 팬데믹(감염병의 세계적 유행) 등 주요국들의 경기가 동시에 부진했던 기간에 한국의 수출이 둔화된 경험에 비춰 보면 향후 한국의 수출은 지속적으로 부진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윤용준 한국은행 조사국 국제무역팀 차장은 “최근 경상 수지는 에너지 수입이 높은 수준을 지속하는 데다 팬데믹으로 위축됐던 해외여행 등 서비스 소비가 회복 조짐을 보이면서 흑자 규모가 축소됐다”며 “앞으로도 대외 불확실성이 높은 가운데 수출이 부진하면서 당분간은 높은 변동성이 지속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이명지 기자 mjlee@hankyung.com
상단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