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용 성형, ‘세속 트랜스휴머니즘’의 전형 [몸의 정치경제학]

‘자연과 인공’ 이분법을 넘어서는 제3의 범주…그 사이에서 또 탄생하는 불평등

트랜스휴머니즘의 도래 3

키키 코겔닉(Kiki Kogelnik)의 ‘가위로 하면 아파요(It Hurts with a Scissor)'


성형 수술(시술 포함)은 크게 재건 성형과 미용 성형으로 나눠진다. 재건 성형(교정 복구 포함)은 태생·질병 혹은 사고로 발생한 신체 외형과 기능적 결함을 복원하는 의료 행위다. 반면 미용 성형은 외형적 미의 유지·회복 또는 개선을 목적으로 하는 비필수 의료 서비스다.

이 중 미용 성형은 자연 신체라는 운명을 거슬러 과학 기술의 힘으로 인체를 증강하려는 트랜스휴머니즘과 맞닿아 있다. 하지만 미용 성형은 생명 보수주의자들이 경계하는 신체 ‘향상’과는 거리가 있다. 성형 신체는 기계와의 융합도, 유전자 설계도 포함하지 않기 때문이다.

성형 전문의 패트릭 수(Patrick Hsu, MD)는 미용 수술을 “각 개인 체형에 어울리는 가장 자연스러운 결과를 만들기 위해 특정 신체 부위를 개선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즉, 미용 성형이 향상도 복구도 아닌 기술적 증강이고 따라서 자연과 인공, 진(眞)과 위(僞)의 이분법을 넘어서는 제3의 범주라는 생각이다. 이런 관점에서 미용 성형은 연재 첫 편에서 소개한 복원과 향상 틈새로 진격하고 있는 ‘세속 트랜스휴머니즘’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진격의 위세에 주눅 든 것일까. 최근에는 성형 미인과 자연 미인의 구별·차별이 종적을 감췄다. 성형을 반칙으로, 또 개선 결과를 일종의 부당 이득으로 여기던 분위기도 증발했다. 오히려 얼굴에 붕대를 친친 감고 박력 있게 활보하는 소신형 트랜스휴머니스트에게 박수와 선망을 보내는 경향이 선명해진다.

세계적 추세도 마찬가지다. 자연 신체와 인공 신체의 구별에 둔감해졌고 오히려 성형을 21세기 미의 전제 조건 또는 필수 조건으로 포용해 간다. 주지하다시피 베트남·중국·캐나다·미국 등의 국제 미인 대회에서도 성형은 규제 대상이 아니다.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미스 유니버스에는 미용 성형과 관련된 규정조차 없다.

2009년 개최된 헝가리 성형 미인 대회(Miss Plastic Hungary)는 아예 성형 신체를 위한 대회였다. 이보다 먼저 중국에서도 인조미인(人造佳人) 대회가 2004년 개최된 바 있다. 그러니 ‘성형 강국 코리아’라는 뉴스에 야릇한 자부심을 섞어 타는 언론의 관행도 크게 개탄할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성별 비대칭 논쟁과 신체 자본화
통계별 차이는 있지만 한국이 지난 10여 년간 인구 대비 성형 비율과 1인당 성형 횟수에서 수위권을 유지해 온 것은 사실이다. 특히 눈·코·입·이마·볼·턱 등을 포함한 안면 성형에서는 단연 최상위라고 한다. 체면과 외모를 중시하는 데다 관상의 문화적 뿌리가 작용한다는 해석이 설득력을 얻는 대목이다.

하지만 왜 여성 성형이 유독 강세인지, 극심한 성별 비대칭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는 여전히 미제로 남아 있다. 물론 남성 성형도 급속 팽창 중이기는 하다. 청년층은 물론이고 중년 남성들도 체면과 심리 장애를 넘어 전향적 태도를 보이고 있으니 말이다. 최근에는 가발·눈썹 문신·모발 이식 등의 방어형·은폐형에서 쌍꺼풀·양안검·복부 지방 제거·안면 거상에 이르는 공세형·개선형으로 전향 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20년 진행된 한 설문에 따르면 여성은 18%, 남성은 2%만 유경험자인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도 2001년부터 2018년 사이 여성들의 성형 비율이 전체 88%에서 92%로 높아졌고 남성 비율은 도리어 역주행했다.

여성이 원래 외모와 미에 더 집착한다는 식의 생물학적 결정론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많지 않다. 오히려 여성의 압도적 우위를 남성 중심적 질서에 대한 순응 혹은 저항의 징후로 상반되게 읽은 해석들 간 충돌이 더 흥미롭다. 전자는 여성 신체에 대한 남성적 욕망이 의료 기술의 약진과 함께 강화된 결과라는 주장이고 후자는 경제·사회적 차별을 겪는 여성 약자들의 신체 권력화라는 분석이다.

투항이 됐든 저항이 됐든 그것이 극심한 경쟁 사회에서 가속화된 신체 자본화의 우울한 단면이란 진단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외모 지상주의 문화를 등에 업은 미의 산업화가 신체 자본화라는 머니 게임으로 확대되고 그것은 다시 기존 불평등 관계를 심화한다는 지적이다.‘모두 다 하고 있다’는 성형의 신화
개인적으로는 미용 성형의 대중화를 거스를 수 없는 대세로 확정 수용하려는 사회적 분위기가 더 마음에 걸린다. 물론 성형의 점진적 대중화 경향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 대중성은 자발적 참여만이 아니라 문화적 압력 그리고 상대적 소외와 불리함을 면하려는 능동적 자기 강제도 포함한 것이란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대세성에 대한 과잉 평가는 자발적 함구령으로 이어진다. ‘미용 성형과 사회적 불평등의 상관관계 같은 골치 아픈 소리는 하지 말고 좋게 좋게 넘어가자’는 고의적 침묵 말이다.

하지만 거품 가득한 뉴스와 달리 미용 성형은 그다지 대세를 이루고 있지 않다. 한국 갤럽 조사에 따르면 1994년 기준 미용 성형 경험이 있는 여성은 4%에 지나지 않았다. 10년이 지난 2004년에 이르러 9%로, 다시 11년이 흐른 2015년에서야 14%로 늘어났다.

성형 최강국인 미국은 1949년 1만5000명에 지나지 않았고 20년 후 1969년에서야 비로소 50만 명으로 늘어난 정도다. 2014년 미용 성형 유경험자는 1000만 명을 돌파했지만 당시 여성 인구 대비 6.5%에 지나지 않는다.

미국의 사례에서 눈여겨볼 부분은 극심한 인종 편차다. 미국미용성형수술학회(ASAPS : American Society for Aesthetic Plastic Surgery) 자료에 따르면 2020년 집계된 1560만 건의 미용 성형 중 81%가 백인 고객이었다. 미국에서 인종 서열은 계급적 양상을 띤다. 따라서 미용 성형이 성별, 인종, 계급·소득 격차라는 기존 불평등 구조와 직결돼 있음이 명백하다.

그러니 ‘모두 다 하고 있다’는 대중적 인상은 사실과 다르다. 소문·광고·가십 (gossip)의 거울방에서 증폭된 신화일 뿐이다. 모두 다 하지도 않거니와 모두 다 할 수도 없다. 거기에는 돈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부자와 빈자가 공히 동등하게 참여할 수 있는 범주가 아니다. 돈에는 적은 돈과 큰돈의 차이가 있고 투여된 액수 차만큼 산출된 결과도 차이가 날 것이다.

혹자는 미용 성형의 확대를 미의 평등권 확장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하지만 평등권은 모두가 동일한 욕망을 가질 때가 아니라 그 욕망에 대한 접근과 실현이 동등하게 보장될 때 성립된다. 미용 성형은 공공 재화가 아닌 고가의 서비스이고 따라서 보편적 접근권이 아닌 재력에 따른 차등적 접근권만 허용된다는 것을 기억하자.신형 자본으로서의 몸과 외모
필자는 미용 성형의 급확산을 금세기 초반 현상으로 규정한다. 2001년과 2014년 사이 한·미 양국에서 성형 횟수가 각각 두 배씩 증가한다. 기술과 소재의 발달도 한몫했지만 암울한 정치·경제적 현실도 무시할 수 없는 요인이었다.

이 시기는 디지털 정보기술(IT)·바이오 테크의 약진과 함께 신자유주의 파고가 정점을 향할 때다. 외환·금융·자원 위기로 세계 경제는 휘청거렸고 각자도생에 내몰린 청년층은 경쟁력 향상과 자기 계발에 ‘몰빵’했다. 이런 배경에서 암호화폐가 등판했고 마찬가지로 신체와 외모가 21세기 신형 자본으로 소환됐다. ‘얼짱’, ‘몸짱’이란 용어들이 활개쳤고 짐(gym)과 성형외과가 폭증했다.

미디어 환경의 재편도 커다란 변수가 됐다. 디지털 기기와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 플랫폼은 몸과 외모에 특수 부가 가치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일약 스타가 되기도 하고 엄청난 팔로워(follower)가 붙기도 한다. 그렇게 셀피(selfie)의 시대가 왔고 유튜브와 인스타그램이 대세가 됐으며 각자의 모습과 일상생활 노출이 1인 미디어 콘텐츠의 주축으로 자리 잡았다.

다양한 연출과 편집을 거쳐 증강된 몸과 외모는 디지털 노출로 귀결된다. 역으로 일상화된 디지털 노출이 아날로그 신체와 외모의 증강을 유도하기도 한다. 어차피 신체와 외모라는 ‘콘텐츠’는 디지털 세계 밖에서도 가공할 레버리지를 발휘하니까. 그렇게 몸과 외모는 사업·연애·구직·여가·소비·인적 네트워크 전반에 걸쳐 영향력을 미치는 스펙이자 메타 자본(meta capital)이 됐다.

물론 ‘내 돈으로 내 몸을 바꾼다’는 선택적 소비주의 측면을 무시할 수 없다. 그런데 앞서 말한 대로 미용 성형은 여타 소비와 달리 신체라는 인프라에 대한 투자 성격이 짙다. 그 투자로 개선·증강된 신체는 갖가지 사회적 경쟁(운동·미·구애·취업)에 활용된다. 이 때문에 여성과 청년 ‘스펙 약자’들이 외모와 미용 성형이라는 신체 자산에 더 필사적일 수도 있다.

‘순수한 미의 유지와 개선’이라는 우아한 의료 소비 뒤에는 노출과 질투, 욕망과 자본, 경쟁과 차별의 난투극이 벌어지고 있다. 그래서 증강 신체라는 경쾌한 첨단 개념 주변에 불균등과 불평등이라는 어둡고 ‘재래적’인 이슈들이 배회하게 된다.

자연 인프라이자 신형 자본인 몸의 인위적 업그레이드가 가능하다면 그 가능성은 공정하게 열려 있어야 한다. 만약 그 가능성이 일부 계층·인종·집단에 더 크게 열려 차별적 수혜를 조장한다면 레온 카스(Leon Kass)가 말한 대로 차라리 운명이란 로또의 무작위 선택에 맡기는 편이 더 공평할 수도 있다.

최정봉 전 NYU 영화이론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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