꽁꽁 얼어붙은 스타트업 투자 시장, ‘다시 숫자의 시대’가 왔다
입력 2022-11-15 06:00:08
수정 2022-11-15 09:35:45
“유니콘 시대는 끝났다”, 이제는 성장보다 ‘수익’…컬리, 당근마켓 등 ‘적자 기업’에 쏟아지는 우려
[비즈니스 포커스]미국 벤처캐피털인 베세머벤처파트너스는 최근 “유니콘의 시대가 저물었다”고 선언했다. 성장성에 중심을 둔 ‘유니콘’ 대신 앞으로는 ‘켄타우로스형’ 스타트업에 적극적인 투자를 하겠다는 것이다. 켄타우로스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반인반마다. 쉽게 말해 현실적인 관점의 ‘수익성’과 미래의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성장성’을 동시에 충족시키는 기업을 찾겠다는 것이다. 요즘과 같은 위축된 경기 상황에서는 자생할 수 있는 현금 흐름이 무엇보다 중요하고 성장성과 함께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기업이 주가 하락기에 더 높은 투자 가치를 인정받을 것이라는 의미다.
10년 넘게 이어져 오던 ‘유동성 파티’가 끝나가면서 스타트업 투자가 빠르게 위축되고 있다. 이와 함께 스타트업 투자를 결정하는 기준 또한 깐깐해지고 있다. 지난 10년여간 스타트업들은 투자 자금이 쏟아지는 상황에서 적자를 내더라도 ‘성장성’을 바탕으로 높은 기업 가치를 인정받으며 거액의 투자를 유치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이와 같은 전략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내일의 성장성’보다는 ‘오늘 당장 수익성’을 증명해 낼 수 있는 능력이 스타트업들에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아마존'의 성공 방정식,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의도된 적자’는 아마존의 성공 방정식을 가장 잘 나타낸 한마디다. 1994년 온라인 서점으로 출발해 세계 최대 전자 상거래 업체로 성공한 아마존은 철저한 고객 중심주의에 기반을 두고 성장해 온 기업이다.
돈을 버는 족족 ‘고객에게 혜택을 주는 데’ 투자를 지속하다 보니 좀처럼 적자를 벗어나지 못했다. 1997년 아마존이 나스닥에 상장할 당시만 해도 1570억 달러의 매출에도 적자 규모만 580만 달러에 육박했을 정도다. 아마존은 2002년 첫 흑자를 기록하기까지 적자 규모가 늘어나기만 했고 2000년엔 그 규모가 14억 달러를 넘어서기도 했다. 시장의 우려는 높아졌지만 제프 베이조스 아마존 최고경영자(CEO)는 자신만만했다. 수익 창출 능력이 없어 내는 적자가 아니라 고객을 위해 투자를 확대하고 늘리는 과정에서 ‘계획된 적자’라는 것이 그의 설명이었다.
이후 ‘아마존의 성공 방정식’은 실리콘밸리를 비롯한 전 세계 스타트업 투자에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됐다. 2010년 테슬라, 2019년 우버 등 실리콘밸리를 대표하는 혁신 기업들이 막대한 적자 속에 나스닥 상장에 성공했다. 사용자를 확보하고 시장점유율을 높임으로써 ‘성장성’을 증명하면 내일의 수익은 자연히 뒤따라온다는 학습 효과 덕분이었다.
한국에서도 ‘아마존 모델’의 영향력은 막대했다. 한국 최대 온라인 쇼핑몰 쿠팡, 새벽 배송 바람을 일으킨 마켓컬리를 비롯한 상당수의 스타트업들이 ‘아마존식 성장 전략’을 택했다. 초창기 수익성에 집중하는 대신 성장을 위한 투자를 지속하며 ‘의도된 적자’임을 강조해 왔다.
하지만 최근 들어 수익성보다 성장성에 집중하던 스타트업 투자 시장의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고 있다. 투자 시장이 혹한기에 접어들자 스타트업 투자를 결정하는 기준이 보다 ‘깐깐해지고’ 있는 것이다.
스타트업 민·관 협력 네트워크인 스타트업얼라이언스에 따르면 지난 9월 기준 한국 스타트업의 투자 유치 금액은 3816억원으로, 전월 대비 4812억원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위축되고 있는 스타트업 투자 시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500억원대 이상의 거액 투자 건수다. 2021년 1000억원 규모의 투자를 유치한 두나무를 포함해 총 5건의 거액 투자가 진행된 반면 올해는 최대 투자 규모가 400억원을 채 넘기지 못할 정도로 투자 시장이 얼어붙었다. 벤처캐피털들은 과거 높은 성장성을 기준으로 기업 가치가 매겨졌던 스타트업들의 기업 가치를 검증하고 나서는 중이다. 성장성보다는 비즈니스 모델의 ‘수익성’을 판단하고 투자하겠다는 것이다.
실제 ‘수익성’을 증명해 내지 못할 경우 추가 투자에 어려움을 겪는 스타트업이 늘고 있다. 수산물 당일 배송 서비스인 ‘오늘회’를 운영하는 스타트업 ‘오늘식탁’은 지난 9월 서비스를 중단했다가 최근 일부 서비스를 재개했다. 오늘식탁은 2016년 설립 이후 누적 회원 수 75만 명을 넘어서며 빠르게 성장해 왔다. 하지만 냉동 물류센터 등의 인프라와 인건비에 막대한 자금이 투자될 수밖에 없는 신선식품 배송 서비스는 수익 구조에 취약했고 적자는 하루가 다르게 늘어갔다. 6월부터 300여 개 협력 업체에 총 40억원 규모의 대금을 지급하지 못하는 등 자금난이 심화됐다. 당초 오늘식탁은 100억원 정도의 신규 투자를 유치해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하지만 투자 시장의 혹한기와 맞물리며 결국 추가 투자 유치에 실패한 것이다.
이 밖에 6월에는 MZ세대(밀레니얼+Z세대)를 타깃으로 한 미디어 스타트업 닷페이스가, 8월에는 애플리케이션 사용자 분석 스타트업 유저해빗이 폐업을 결정했다. 2016년 창간한 닷페이스는 구독자 24만 명을 모으며 대안 미디어로 각광 받아 왔지만 추가 투자 유치에 어려움을 겪어 왔다. 2013년 설립한 유저해빗은 높은 데이터 기술력을 인정받으며 창업 3~7년 차에 찾아오는 데스밸리(죽음의 계곡)를 넘겼음에도 추가적인 투자를 받지 못한 채 아쉬운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적자 쌓이는 유니콘들, 수익성 강화 전략 통할까
바뀐 투자 환경에 따라 추가 투자 유치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기업공개(IPO)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지만 이 역시 상황이 녹록하지 않다. 8월 상장한 차량 공유 플랫폼 쏘카는 시가 총액 1조원을 노리며 입성했지만 기관투자가와 일반 투자자를 대상으로 한 수요 예측과 공모 청약에서 흥행 참패를 맛봤다. 쏘카는 유가증권시장 1호 유니콘 특례 상장 기업으로 상당한 관심을 모았지만 ‘적자 기업’에 대한 시장의 평가는 차가웠다.
11월 9일에는 전자책 플랫폼인 밀리의서재 IPO 철회 소식이 전해졌다. 9월 29일 코스닥시장 상장 계획을 발표한 지 1개월여 만이다. 밀리의서재는 최근 연평균 61%의 매출 성장률을 보이며 지난 상반기 흑자 전환에 성공했지만 지난해까지 줄곧 적자를 기록해 왔다. 전자책 플랫폼 내에서 제공할 수 있는 출판물 판권 확보에 막대한 비용이 투입된 데다 2018년 이후 배우 이병헌·변요한 씨 등을 광고 모델로 선정하며 마케팅 비용이 증가한 때문이었다. 밀리의서재 측은 “최근 거시 경제의 불확실성과 금리 인상 등으로 위축된 IPO 시장 상황이 플랫폼 기업 투자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며 “현재 금융 시장 상황을 고려하면 밀리의서재의 기업 가치가 제대로 평가받기 어려운 환경”이라고 설명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IPO를 앞둔 컬리에 관심이 쏟아지고 있다. 컬리는 지난해 말 프리 IPO(상장 전 투자 유치) 당시만 해도 기업 가치를 4조원으로 평가받았다. 하지만 기업 가치 고평가 논란 속에 현재 1조~1조5000억원대의 기업 가치로 평가되고 있다. 1조원을 밑돌 것이란 예측까지 나온다. 컬리의 ‘의도된 적자’ 전략에 대한 시장의 우려가 반영된 결과다. ‘적자 유니콘’에 보수적으로 변해 가는 분위기가 강화되며 실제 지난 10월 컬리가 IPO를 철회한다는 소식이 전해지며 한 차례 소동을 빚기도 했다. 하지만 이에 대해 컬리 측이 “기한 내 상장하기 위해 시장 상황을 예의 주시하고 있다”며 즉시 반박에 나서며 소동이 일단락됐다. 컬리는 지난 3월 유가증권시장 상장 예비 심사를 청구해 8월 22일 심사를 통과한 상태로 내년 2월 안에 상장을 마쳐야 한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성공적인 IPO를 위한 컬리의 가장 큰 과제는 ‘비즈니스 모델의 수익성’을 증명해 보이는 것이다. 컬리는 11월 2일 7년 만에 사명을 ‘마켓컬리’에서 ‘컬리’로 변경했다. ‘컬리’라는 상위 브랜드 아래 식품을 중심으로 한 ‘마켓컬리’와 뷰티 제품을 판매하는 ‘뷰티컬리’를 투 트랙 방식으로 운영할 방침이다. 컬리가 뷰티 카테고리를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점찍은 데는 이유가 있다. 화장품은 매출 원가가 낮아 수익성 개선에 도움이 된다. 더 이상 ‘의도된 적자’라는 전략이 통하지 않는 상황에서 이제는 ‘숫자로 성과를 증명하기’ 위한 선택인 셈이다.
“당장 IPO는 계획하고 있지 않다”고 밝혔지만 한국의 대표적 유니콘 기업인 ‘당근마켓’도 서비스 다각화를 통한 수익성 개선에 고삐를 당기고 있다. 당근마켓은 월간 사용자 수 1800만 명을 확보하며 ‘국민 일상 플랫폼’으로 자리 잡았고 지난해 8월 3조원의 기업 가치를 인정받았다. 하지만 수년째 적자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며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사용자 확보를 위한 적극적인 마케팅 활동, 플랫폼 이용자 수 증가에 따른 인프라 확충, 회사의 규모에 따라 늘어나는 인건비 등이 적자의 주 원인이다. 실제 당근마켓의 매출은 2019년 31억원, 2020년 118억원, 2021년 257억원으로 크게 증가했지만 같은 기간 영업 손실 또한 72억원에서 134억원 그리고 352억원으로 크게 늘었다. 당근마켓은 지난 6월 프랜차이즈 기업을 대상으로 ‘브랜드 프로필’ 서비스를 시작했다. 수익원 확보를 위해 기존 기업 광고는 받지 않겠다던 방침을 깼다.
한 벤처캐피털 관계자는 “미래가 아니라 현재 살아남을 수 있는 곳에 투자하겠다는 분위기가 점점 강해지고 있다”며 “스타트업들에는 가혹한 현실이 될 수 있지만 수익성을 확보하며 내실 있는 성장을 이뤄 온 스타트업들에는 오히려 기회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이정흔 기자 vivaj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