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ITOR's LETTER]위기 앞에 떠올려 보는 업의 본질

[EDITOR's LETTER]

김용준 한경비즈니스 편집장


업의 본질. 이 단어를 쓰기 싫었습니다. 좋아하는 표현이지만 너무 흔해졌습니다. 하지만 또 쓸 수밖에 없을 듯합니다. 업의 본질을 망각한 행위들이 시장을 뒤흔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 주인공은 흥국생명입니다. 흥국생명 하면 뭐가 떠오르시나요. 배구라고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져 주기 시합으로 꼴찌를 해 김연경 선수를 지명하고 그를 데려와 우승도 여러 차례 했지요. 막판에는 기어이 김연경 선수를 놓아주지 않아 앞날을 막아 섰던 사건이 있었습니다. 학폭 자매 논란도 있었지요. 김치도 떠오릅니다. 흥국생명 직원들에게 보너스로 김치를 나눠준 사건은 엽기적이었습니다. 이 흥국생명이 요즘은 금융 시장을 뒤흔들고 있습니다.

몇 줄로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흥국생명이 2017년 외국에서 돈을 빌렸습니다. 계약서에는 30년 후에 갚겠다고 써 있지만 그 동네 관례는 5년 후 갚는 것이었습니다. 5년 후 갚지 않으면 이자를 더 낸다는 항목은 요식에 가까웠습니다. 빌려준 사람도 5년 후 받을 것을 계산하고 계획을 짜 놓았습니다. 그런데 흥국생명은 돈 갚을 날짜가 되자 “갚지 않고 이자 더 줄게”라고 통보해 버립니다. 돈을 빌려준 외국인들은 당황합니다. 그리고 소문을 냅니다. “얘들아 흥국생명이 돈 갚지 못하겠대. 한국 기업 얘네들 못 믿겠어.” 순식간에 다른 한국 기업들의 채권 금리도 급등합니다.

금융업의 본질을 묻게 하는 행태였습니다. 금융업의 본질은 ‘신뢰’라고 합니다. 화폐라는 실물이 오가는 게 아니고 실줄 날줄로 온갖 국내외 금융회사들이 얽혀 있기 때문에 신뢰 빼면 애초 산업 형성이 불가능합니다. 흥국생명은 이 신뢰를 깨버렸습니다. 대주주인 태광이 돈이 없었나, 그것도 아닙니다. 흥국생명은 태광그룹 계열사입니다. 최근 롯데건설이 어려워지자 롯데 계열사들이 구원투수로 나서 도와줘 위기를 수습했습니다. 태광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실리라는 명분으로 대주주가 몇 달 치 이자와 금융 시스템 훼손을 맞바꿨습니다.

이 사태에서 업의 본질을 되묻게 하는 또 하나의 집단이 등장합니다. 금융 당국입니다. 흥국생명은 사전에 정부와 협의했습니다. 당국의 허락을 받고 돈을 갚지 않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금융 당국이 무엇을 하는 집단인지 의심할 수밖에 없는 대목입니다. 금융 시장의 신뢰를 지탱하고 안정을 꾀하는 게 그들의 업입니다. 하지만 흥국생명이 하려는 짓이 가져올 파장은 생각하지 않고 그냥 허락해 버립니다. 한국 채권 시장이 발칵 뒤집어지고 해외에서는 한국 채권의 위험도가 높아졌습니다. 이 와중에 금융위원회는 사전에 조율해 문제가 없다는 보도 자료를 뿌리며 불이 더 커지라고 부채질을 했습니다. 당국이 한국의 자금 시장 경색을 막기 위해 금융회사와 공기업들은 해외에서 자금을 조달해 달라고 발표한 직후여서 황당함은 더 컸습니다. 이게 끝이 아닙니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아무 관계도 없는 은행들을 끌어들여 불을 끄라고 해서 겨우 빚을 갚았습니다. 레고랜드에 이은 2연타석 똥볼이었습니다.

지난 주 이헌재도 없고, 김석동도 없는 시장이 불안하다고 썼습니다. 이름 석자만으로도 금융 시장을 안정시킨 경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센 놈이 온다. 이제 시장은 안정되겠네”라는 믿음을 시장에 줄 수 있었지만 현 금융 당국의 행태는 “시장을 컨트롤할 능력이 없구나”란 인식을 심어 주기에 충분합니다. 감독 당국은 다시 한 번 자신들이 무슨 일을 해야하는 집단인지 고민했으면 합니다. 이번 주 한경비즈니스는 흥국생명 사태를 네 가지 키워드로 풀어 봤습니다.

이와 함께 커버스토리 내용도 소개합니다. 고용 시장의 게임체인저가 된 배달을 다뤘습니다. 한때 운전할 때 가장 짜증나게 했던 친구들이 오토바이 배달원들이었습니다. 하지만 배달을 하며 스스로 밥벌이를 하는 젊은이들의 처지를 생각하면서 마음을 고쳐 먹었습니다. 고등학생들도 많다고 합니다. 학교가 끝나고 많은 친구들이 투덜거리며 학원을 갈 때 그들은 오토바이 핸들을 잡는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좋지 않았습니다.

배달 인력이 공식 집계로 45만 명을 넘었다고 합니다. 코로나19 사태로 배달 수요가 늘어난 영향입니다. 교사보다 많아진 배달원. 이들의 직업은 불안정적이고 위험에 노출돼 있고 때로는 불공정한 계약에 시달리기도 합니다. 플랫폼의 원래 뜻인 정거장이란 말처럼 들렀다 가는 직업일 수도 있습니다. 동의합니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명과 암이 있습니다. 취업 준비생과 실직자에게는 일시적일지라도 생계의 위기를 넘을 수 있게 해 주는 브리지 역할도 하는 것 같습니다. 과장되게 얘기하면 보조적 사회 안전망 역할이라고 할 수 있을 듯합니다. 최소한 코로나19 위기 기간에는 그랬던 것 같습니다. 배달이 직업으로 자리 잡게 할 수 있는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 온 듯합니다. 겨울이 옵니다. 배달하시는 분들에게 따뜻한 메모라도 남겨 보면 어떨까 합니다.

김용준 한경비즈니스 편집장 junyk@hankyung.com
상단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