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보험사 콜옵션 규모만 4조원…흥국생명은 신용도 재평가 받아야
[비즈니스 포커스]레고랜드에서 시작된 채권 시장의 위기가 흥국생명의 콜옵션 행사 연기 시사로 정점을 찍었다. 한국을 넘어 글로벌 금융 시장에서 한국 기업들의 신뢰성에 금이 갈 수 있다는 여론이 거세지자 흥국생명은 콜옵션 행사 연기를 철회했다.
하지만 한 번 균열이 시작된 것을 다시 원상 복구하는 것은 어렵기만 하다. ‘흥국생명 사태’가 향후 보험사들의 돈줄을 말라 버리게 하는 요인이 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DB생명보험도 콜옵션을 연기함으로써 보험사들의 신종자본증권 상환에 대한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 높아진 상황이다.
상환 의사 밝혔지만…파장 여전한 흥국생명 사태
흥국생명이 싱가포르거래소를 통해 2017년 발행한 5억 달러(발행 당시 약 5571억원) 규모의 신종자본증권 콜옵션 행사를 연기한다고 공시한 것은 11월 1일이다. 레고랜드 사태로 한국 채권 시장에 대한 불안감이 높아진 시기였다. 한국 금융회사의 신종자본증권 조기 상환이 연기된 것은 2009년 우리은행 후순위채 이후 13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신종자본증권은 주식과 채권의 성격을 동시에 지닌 일종의 ‘하이브리드 채권’이다. 발행 만기가 30년이고 연장하는 것도 가능해 영구채의 성격을 띤다. 하지만 채권의 성격도 동시에 가진 만큼 5년에 한 번씩 투자자들에게 조기 상환을 약속하는 ‘콜옵션’을 행사한다. 관행적으로는 첫째 콜 행사일에 권리를 행사하고 시장 가격 또한 실질 만기가 아닌 콜 행사일을 기준으로 형성된다.
투자는 심리라고 한다. 흥국생명이 콜옵션을 행사하지 않은 것은 법적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지만 시장은 이를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기업의 재정 건전성과 상환 능력이 악화됐다는 신호를 줬고 흥국생명의 신종자본증권 가격이 급락했다. 급기야는 타 은행과 보험사들이 발행한 외화표시채권에도 영향력이 이어져 가격이 하락했다. 글로벌 시장에서는 한국 채권에 대한 ‘투심’이 악화된 것은 불 보듯 뻔했다. 파장이 커지자 흥국생명은 ‘콜옵션 미행사’를 발표한 지 1주일이 채 되지 않은 11월 9일 신종자본증권을 정상적으로 상환하겠다고 밝혔다.
흥국생명 사태가 아직 진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DB생명보험도 콜옵션을 내년으로 연기할 것이라고 밝혔다. 11월 13일로 예정됐던 신종자본증권의 콜옵션 행사일을 사전에 투자자들과 협의해 내년 5월로 변경했다. DB생명은 2017년 발행한 300억원 규모의 신종자본증권의 콜옵션을 미루는 대신 이자율을 최초 10년간 5.6% 적용하고 이후 기존 이자율에 연 1%의 가산 신용 스프레드에 50%를 더한 이율 중 더 높은 금리를 적용하기로 했다.
금융위원회는 DB생명의 콜옵션 연기에 대해 “투자자와 사전 협의를 통해 계약을 변경한 사안으로 조기 상환권을 미행사 한 것은 아니다”면서 “투자자는 소수이고 시장에 유통되는 물량이 아니므로 채권 유통 시장에 미치는 영향도 없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잇단 보험사들의 콜옵션 연기에 대해 시장의 우려가
커져 가고 있다. 김준수 키움증권 애널리스트는 “조기 상환권 미행사 이슈는 글로벌 자본 시장에서 한국계 외화채에 대한 투심을 위축시킬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라며 “특히 시중은행과 보험사를 중심으로 한국 기관들의 외화 자본성 증권에 대해 해외 시장이 요구하는 리스크 프리미엄이 높아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타 보험사들의 신종자본증권 상환에도 그 어느 때보다 관심이 높아졌다. 한화생명은 11월 16일 내년 4월 10억 달러 규모 외화 신종자본증권의 콜옵션을 예정대로 행사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한화생명은 보도 참고 자료를 내고 “실적 발표회, 언론 매체 등 다양한 경로를 통해 예정대로 콜옵션 행사를 차질 없이 진행할 것”이라고 밝혔다. 최근 보험사들의 신종자본증권 콜옵션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자 재차 방침을 밝힌 것이다.
한화생명은 2018년 4월 조달한 해외 신종자본증권은 발행 당시 금융 당국의 가이드에 따라 한국에 유입되지 않고 모두 해외 외화 자산에 매칭돼 운용 중이라고 밝혔다. 또 내년 1분기 외화 자산 현금화를 통해 해당 신종자본증권의 상환 재원으로 사용할 계획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자금을 추가 확보할 필요성이 없고 상환 재원 조달도 환율 변동에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매년 증가하는 보험사 콜옵션 규모
보험사들은 자본 확충을 위해 그동안 자본증권(후순위채권·신종자본증권) 발행을 통해 덩치를 키워 왔다. 지급 여력은 곧 보험사의 능력을 방증하기 때문이다. 11월 9일 나이스신용평가에 따르면 한국의 보험사가 발행한 자본증권의 연간 금융비용은 올해만 8200억원에 달한다.
보험사가 발행한 자본증권의 비용은 매년 늘어나는 추세였다. 자본증권은 저성장에 접어들면서 보험업계가 자본을 확충하는 가장 유용한 방법이었고 그간 지속된 저금리 기조에 따라 덜 부담스러운 방법이라는 인식도 있었다.
특히 생명보험업계는 자본증권 중에서도 신종자본증권을 선호하는 경향이 강했다. 김한울 나이스신평 선임연구원은 “신종자본증권은 후순위채권 대비 높은 조달 비용으로 보험사에 장래 수익성과 자본 적정성에 지속적인 부담 요인으로 작용하지만 만기까지 100% 자본으로 인정되면서 조기 상환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대규모 자본 확충이 필요한 생보사에는 현실적인 대안으로 선택 받아 왔다”고 설명했다.
올해와 내년은 보험사들이 5~6년 전 발행했던 신종자본증권의 콜옵션 행사일이 돌아오는 시기다. 하지만 최근 들어 금리가 급속히 오르면서 채권 발행도 어려워지고 있다. 고금리로 인해 콜옵션 행사에 부담이 더해지지만 흥국생명 사태처럼 영구채 시장에 미치는 파장을 고려하면 콜옵션 행사를 할 수밖에 없다. 보험사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다. 김한울 연구원은 “채권 시장이 위축되는 가운데 신용 등급이 낮은 보험사는 투자 수요 위축 등 외부 환경 불확실성에 따른 위험도가 높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신평에 따르면 보헙업권 자본성 증권 콜옵션 행사에 따른 조기 상환 규모는 올해 1조7891억원, 만기 상환 규모는 3300억원이다. 내년에는 이 규모가 각각 4조168억원, 6110억원으로 늘어난다. 보험사별로 살펴보면 지난 6월 말 기준 자산 총계 대비 신종자본증권과 후순위채 비율이 가장 높은 생보사는 KDB생명으로 3.5% 수준이다. 이어 흥국생명(2.6%), KB생명(2.4%), 한화생명(2.3%), NH농협생명(2.1%) 순으로 나타났다. 손해보험사 중에서는 메리츠손보가 5.5%로 가장 높았고 한화손보(5.3%), 흥국손보(3.8%), 코리안리(3.3%), 현대해상(3.0%)이 그 뒤를 이었다.
당장 보험사들의 신용도 또한 재평가를 받게 됐다. 한국신용평가(이하 한신평)는 11월 12일 흥국생명에 대한 신용도를 재검토하기로 했다. 김선영 한신평 선임 애널리스트는 “총 5571억원의 조기 상환 금액은 환매조건부채권(RP) 발행과 보험사 대출 등으로 마련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추후 일부 금액은 대주주의 유상 증자 등으로 대체된다. 또 한신평은 흥국생명이 신종자본증권 발행 없이 조기 상환되기 때문에 지급여력(RBC) 비율이 하락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RBC 비율은 흥국생명이 콜옵션 미행사를 최초에 결정했던 요인 중 하나다. 지난 6월 기준 흥국생명의 RBC 비율은 157.8%였는데 최근 미국발 금리 인상에 따라 150% 밑으로 내려간 것으로 추측된다. 보험업 규정에 따르면 자본성 증권의 콜옵션은 이를 상환한 뒤에도 RBC의 비율이 150%를 넘어설 때만 가능하게 돼 있다. 한신평은 이러한 사안 등을 고려해 흥국생명의 신용도를 재검토할 계획이다.
이명지 기자 mj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