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질적 예산 지각 심사 시스템, 확 뜯어고쳐야 [홍영식의 정치와 경제]
입력 2022-12-09 17:44:56
수정 2022-12-09 17:57:42
2010년 후 법정 기한 내 처리 두 번뿐…국감·정쟁에 밀려 수백조 심사 1주일 만에 ‘후다닥’
홍영식의 정치와 경제해마다 연말이면 되풀이되는 국회 고질병이 예산안 지각 심사, 늑장 처리다. 올해도 어김없다. 639조원 규모의 2023년도 예산안 세부 항목의 증·감액을 두고 여야가 첨예하게 갈등을 겪으면서 법적으로 정한 기한(12월 2일) 내 처리를 또 어긴 것이다. 국회법엔 새해 예산이 집행되는 30일 전인 12월 2일까지 예산안이 국회 본회를 통과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러기 위해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는 11월 30일까지 심사를 마치고 예산안을 본회의에 넘겨야 한다. 여야는 모두 지키지 못했다.
김진표 국회의장은 예산안 심사 기한인 12월 2일 예산안 처리가 어그러지자 “2014년 국회선진화법 시행 이후 예산안 법정 처리 시한을 지키지 못한 경우라도 모두 정기 국회 회기 내에 예산안을 처리했고 이번에도 정기 국회 내에 처리돼야 한다”며 12월 8일과 9일 본회의를 열어 처리하겠다고 했지만 여야 간 진통이 거듭됐다.
예산안 처리가 꼬이게 된 데는 무엇보다 더불어민주당 책임이 크다. 민주당은 예산 심사 막판 이태원 참사 책임을 묻겠다며 느닷없이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 해임 건의안을 꺼내 들었다. 이로 인해 해임안과 국정 조사, 예산안 처리 문제가 얽히고설키면서 협상 상황을 복잡하게 만들어 버렸다.
예산안 심사가 지지부진하게 된 또 다른 이유는 이른바 ‘윤석열표 예산’과 ‘이재명표 예산’을 두고 여야가 막판까지 치열하게 맞붙었기 때문이다. 민주당은 예산안 국회 심의 과정에서 대통령실 이전과 관련된 용산공원 조성 사업, 윤 대통령 공약인 공공 분양 주택, 대통령실 이전에 따른 외교부 장관 공관 리모델링 사업, 윤석열 정부의 주요 국정 과제인 신형 소형 모듈 원자로(SMR) 개발과 원전 수출 지원 등 예산을 감액했다. 이에 국민의힘은 “새 정부의 정책을 무력화하려는 의도”라며 반발했다.
반면 공공 임대 주택과 지역 화폐, 신재생에너지 사업 등 수조원 규모의 ‘이재명표 예산’은 끝까지 신설 또는 증액시키면서 집권당이 어느 쪽인지 헷갈릴 정도라는 소리도 들었다. 또 청년 내일 채움 공제 지원, 노인 일자리 및 사회 활동 지원 등 민주당의 주요 정책과 관련한 예산도 늘리면서 국민의힘과 충돌했다. 더욱이 예산 부수 법안인 법인세와 종합부동산세를 비롯해 정부 주요 법안들도 모조리 발목을 잡으면서 준예산 편성 전망까지 나오기도 했다.
9월 초 국회에 제출되지만 11월 중순 돼야 심사
예산안 심사가 지연된 것은 이렇게 여야 간 갈등도 있지만 보다 근본적으로 살펴봐야 할 게 있다. 매년 부실·졸속 심사, 지각 처리 되풀이 관행이다. 정부 예산안은 다음 회계연도 개시 100일 전까지인 8월 말 또는 9월 초 국회로 넘어온다. 하지만 여야는 국정 감사 등에 힘을 쏟느라 뒷전으로 미뤄 놓았다가 11월 중순이 돼야 들여다보기 시작한다. 그나마 예결특위 산하 예산안조정소위 위원장을 누가 맡을지 등을 놓고 옥신각신하다 보면 실제 심사 기간은 매년 10일 안팎에 불과한 실정이다.
올해 예결위는 11월 7~8일 종합 정책 질의에 이어 경제 부처와 비경제 심사가 6일간 진행됐다. 하지만 이태원 참사 책임 문제를 놓고 정부 측과 야당 간 지루한 공방으로 많은 시간을 허비하느라 예산안 심사는 수박 겉핥기에 불과했다. 11월 17일부터 예산안조정소위를 가동하고 본격 증액·감액을 논의했다. 하지만 ‘윤석열표 예산’과 ‘이재명표 예산’을 두고 옥신각신하면서 심사는 가다 서다를 반복했다. 그러는 바람에 실제 심사 기간은 1주일도 채 못 됐고 결국 법정 기한을 지키지 못했다.
예산안 심사는 애초부터 이렇게 심도 있는 심사가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구조다. 막판 초읽기에 몰려 벼락치기 심사를 하다 보니 2010년 이후 지난해까지 법정 기한을 지켜 예산안을 처리한 것은 2015년과 2020년 두 번뿐이다. 이런 폐해를 없애기 위해 2014년 ‘국회선진화법’을 통해 ‘예산안 자동 부의(附議)제도’를 도입했지만 법 어기기는 예삿일이 됐다. 이 때문에 정부 예산안이 넘어오면 바로 심사에 들어가는 관행을 정착시킬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다. 미국·영국·프랑스·독일 등 주요 선진국 의회의 예산 심사 기간은 3~4개월에 달한다.
예산안 처리 시한에 몰리면 여야가 예산조정소위 내 법에도 없는 ‘소(小)소위’를 가동하는 것은 밀실·담합 심사 논란을 부른다. 2008년 공식 등장한 소소위 활동은 지금까지 관행처럼 이어 오고 있다. 심도 있는 논의를 통해 타협점을 찾아가는 순기능보다 부작용이 더 두드러졌다. 소소위 구성원은 예결위원장과 여야 간사 3명뿐이다. 국회법에 근거 조항이 없어 속기록도 남지 않는다. 회의가 비공개로 이뤄지다 보니 야합의 장, ‘쪽지 예산(지역구 민원 예산)’ 창구로 변질되기 일쑤다. 소소위 결과가 총선 성적표로 여겨지면서 쪽지 경쟁이 더 과열됐다.
심지어 2012년 말 소소위가 감시의 눈을 피해 호텔 방에서 비밀리에 열리기도 했다. 당시 소소위가 열린 호텔 방에는 쪽지 민원 수천 건이 쏟아져 들어왔다. 여야는 지역 민원성 예산 4조원을 증액해 여론의 호된 질타를 받았다. 이 때문에 이듬해 여야는 ‘호텔 방 심사’를 없앴다. 하지만 소소위 가동과 ‘닥치고 증액’은 끊이지 않았다. 2018년엔 소소위를 거치면서 381건의 예산이 늘어났고 지난해엔 100억원 증액된 사업만 80개 가까이에 달했다. 상당수가 쪽지 예산이었다.
올해도 ‘소소위’ 가동해 밀실에서 639조 벼락치기 심사
올해도 ‘소소위’가 어김없이 등장했다. 예결특위는 지난 11월 30일까지 예산안 심사를 마치지 못하자 소소위를 가동해 639조원에 달하는 예산안 벼락치기 심사를 벌였다. 굳이 소소위를 가동하려면 밀실 야합 논란을 피하기 위해 논의 내용을 회의록에 남겨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결산 심사의 폐단도 적지 않다. 국회가 전년도 나라 예산이 적정하게 사용됐는지 살펴보고 혈세가 한 푼이라도 낭비되지 않도록 한다는 취지에서 결산 심사 제도를 도입한 것은 2004년이다. 국회법 128조 2항엔 전년도 예산 결산 심사를 정기 국회 개회(9월 1일) 이전 완료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법정 기한 내 처리된 것은 2011년 한 번밖에 안 된다.
매번 결산 심사가 늦춰지는 것은 정쟁 때문이다. 올해도 국민의힘은 대표 징계 문제로 내홍을 겪느라, 더불어민주당은 지도부 선출 전당 대회에 매몰돼 결산 심사는 뒷방 신세였다. 그러다가 11월 10일에야 결산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법정 기한 두 달 더 넘게 지연된 것이다. 그러다 보니 결산 심사 때 지적된 내용들을 차기 연도 예산안을 편성할 때 반영하도록 한 법 제정 취지는 온데간데없다. 매년 그렇듯 올해도 결산 심사를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내년도 예산안 편성이 마무리돼 버렸기 때문이다.
심지어 차기 연도 예산안이 먼저 국회를 통과하고 결산안이 늦게 처리된 해도 있다. 앞뒤가 뒤바뀐 것이다. 의원들은 지역구 선심성 예산을 챙기는 데는 쌍심지를 켜면서도 국민 혈세가 제대로 집행됐는지에 대해선 아무런 관심이 없다. 국민 생색내기용으로 법을 만들어 놓고 지키지도 못하고 매번 수박 겉핥기 식으로 할 것이라면 차라리 법을 없애는 게 맞다. 아니면 하려면 제대로 해야 한다. 예산안 결산 심사와 새해 예산안 심사 제도 모두 대대적인 수술이 필요하다.
홍영식 한국경제신문 논설위원 및 한경비즈니스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