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경제의 최대 숙제, 부의 유출·고령화를 막아라 [글로벌 현장]
입력 2023-01-13 06:00:20
수정 2023-01-13 06:00:20
미국과 금리 차 커지며 자산 유출로 곤혹스러워…일본 젊은이들 “주식 관심 있지만 돈이 없다”
[글로벌 현장]2021년 현재 일본의 개인 투자자는 약 1400만 명이다, 한국은 1374만 명이다. 일본의 인구는 한국의 2.5배지만 개인 투자자 수는 비슷하다.
한국의 개인 투자자는 지난 3년 새 2.5배 늘었다. 반대로 일본은 개미 투자자가 기록적으로 급감한 세계적으로 드문 나라다. 2021년 도쿄증권거래소 조사에서 개인 투자자들의 보유 비율은 16.6%(금액 기준)로 50년 전에 비해 반 토막 났다.
1990년대 버블 경제의 붕괴로 주가가 폭락한 것은 개인 투자자들이 주식 시장을 등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1989년 12월 29일 역대 최고치인 3만8915를 기록한 닛케이225지수는 1990년 한 해 동안 39% 떨어지며 2만3848까지 추락했다. 2008년에는 연간 기준 역대 최대 폭인 42.1% 급락해 8859까지 떨어졌다.
한때 미국을 넘어 세계 최대 주식 시장(상장사 시가 총액 기준)이었던 일본 증시는 오늘날 중국과 유럽에 밀려 5위까지 처졌다.
활력 잃고 늙어 가는 일본 주식 시장
미국과 일본의 금리 차가 커지면서 일본 정부는 부가 해외로 빠져나가는 ‘캐피털 플라이트(부의 유출)’로 곤혹스럽다. 부의 유출과 함께 일본을 고민에 빠뜨리는 또 하나의 현상은 ‘부의 고령화’다.
2000조 엔이 넘는 일본 가계 금융 자산의 60%는 60세 이상 고령자가 보유한 것으로 파악된다. 이들의 금융 자산은 대부분 예금과 현금 형태로 은행 통장과 장롱 속에서 늙어 가고 있다. 주식 시장도 마찬가지다. 일본 개인 투자자들이 보유한 주식의 67%를 60세 이상 고령자가 갖고 있다.
최근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일본 주식 시장의 고령화에 대한 분석 기사를 내놓았다. 1989년 개인 투자자들이 보유한 전체 주식(금액 기준) 가운데 70대 이상 고령자가 보유한 주식은 15%였다. 30년 뒤인 2019년에는 이 수치가 41%로 상승했다.
같은 기간 일본 성인 인구 가운데 70대 이상의 비율은 10%에서 26%로 높아졌다. 인구의 고령화보다 주식 시장의 고령화 속도가 두 배 빨랐다.
일본 증시의 주력인 70대의 최대 관심사는 상속이다. 일본의 고령자들은 상속할 때가 되면 주식을 팔아 부동산을 사는 사례가 많다. 상속 재산을 평가할 때 주식은 시가로 평가한다. 1억 엔어치를 보유하고 있으면 1억 엔이 몽땅 상속세 대상이다.
반면 부동산의 가치는 한국으로 치면 공시 지가라고 할 수 있는 노선가로 평가한다. 노선가는 실거래가의 80% 정도다. 1억 엔짜리 부동산이라면 8000만 엔만 상속세 대상이 된다. 이러다 보니 주식을 파는 증권사가 고령의 자산가에게 ‘절세를 위해 주식을 팔고 부동산을 사라’고 영업하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진다는게 최근 일본 증권가의 푸념이다.
일본 개미 투자자의 가장 큰손인 고령자들이 증시를 침체에 빠뜨리는 잠재적인 요인이 된 것이다. 주식 시장이 활력을 잃은 채 고스란히 늙어 가고 고령자들은 세상을 떠날 때가 되면 주식을 팔아 부동산을 사는 악순환을 끊으려면 젊은 세대를 끌어들여야 한다.
젊은 세대의 문제는 주식에 관심은 많은데 투자할 돈이 없다는 점이다. 개인 투자자들이 보유한 일본 주식의 67%가 60세 이상 고령자에게 집중된 반면 30대 미만 개인 투자자들이 보유한 주식은 1% 남짓으로 추산된다.
더 이상 투자 리스크를 떠안을 필요가 없는 고령자들은 투자금이 남아돌고 기꺼이 리스크를 떠안으려는 젊은 세대는 투자할 돈이 없는 괴리는 일본 증시의 미래를 어둡게 만드는 암초로 지적된다.
가뜩이나 자금이 부족한데 주식을 한 번에 100주 단위로 사도록 한 일본 증시의 최소 매입 기준은 젊은 세대의 투자 진입을 더욱 어렵게 만든다.
유니클로에 투자하려면 최소 8400만원이 필요하다. 유니클로 운영사 패스트리테일링의 주가는 8만4000엔 안팎이다. 100주를 사려면 840만 엔이 들기 때문이다.
분산 투자는 자금력이 탄탄한 부유층의 전유물일 뿐 투자금이 넉넉지 않은 젊은 투자자들은 ‘몰빵 투자’를 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애플의 주가는 140달러 안팎이다. 미국 증시는 1주씩 주식을 살 수 있기 때문에 약 20만원이면 애플의 주주가 될 수 있다.
일본의 젊은 세대가 자국 시장을 외면하고 미국 증시를 향하는 데는 이런 이유도 있다. 유니클로는 최근 주식 분할을 결정했다.
멈춰 버린 성장 엔진, 다시 돌려야
부의 유출과 고령화에 대응해 일본 정부는 ‘부의 회춘’과 ‘부의 이전’을 추진하고 있다. 한마디로 고령 자산가들의 재산을 젊은 중산층으로 이전시키는 것이다. 고령자에 편중된 자산을 젊은 세대에게 넘겨 소비 진작과 경제 활성화를 유도한다는 것이다.
고령자들은 돈이 남고 젊은 세대는 투자할 돈이 없는 괴리를 해소하고 돈 쓸 데가 상대적으로 적은 고령자의 재산을 돈 들어갈 데가 많은 육아 세대로 이전시켜야 소비가 늘어난다는 논리다.
대표적인 대책이 생전 증여 제도의 확대다. 일본은 부모가 자식에게 재산을 물려준다면 매년 110만 엔까지 증여세가 면제된다. 이런 식으로 증여세를 전부 면제받으면 부익부 빈익빈 해소라는 상속세의 취지가 훼손된다. 이 때문에 부모가 사망하면 사망일로부터 3년 이내에 받은 증여는 사망 후 물려받은 재산과 합쳐 상속세의 대상이 된다.
일본 정부는 이 기간을 7년으로 늘리기로 했다. 2027년부터 단계적으로 늘려 2031년 최종적으로 시행된다. 한때 10년까지 늘리는 방안을 검토했지만 자산가들의 반발을 의식해 기간을 다소 줄였다. 참고로 독일은 10년, 프랑스는 15년까지 소급해 상속세를 매긴다.
상속세와 증여세를 한꺼번에 얻어맞지 않고 미리 조금씩 재산을 물려주려면 적어도 죽기 7년 전에는 증여를 완료해야 한다는 얘기다. 자신이 죽을 날을 미리 아는 사람은 없으니 실제로는 고령의 자산가들이 훨씬 더 일찌감치 증여를 시작할 것으로 일본 정부는 기대하고 있다. 기왕 물려줄 재산, 자녀들이 한창 돈이 필요할 때 미리미리 물려주라는 뜻이다.
60세 이상의 부모가 주택 구입 등으로 부채가 많은 40대 이하 자녀에게 손자의 교육비는 1500만 엔까지, 육아 비용은 1000만 엔까지 비과세로 증여할 수 있는 특례 제도도 연장하기로 했다. 원래는 내년 3월 종료될 예정이었지만 3년 더 운영할 방침이다.
부유층의 세금을 더 많이 걷어 분배에 활용하는 대책도 등장했다. 부의 이전 정책이다. 금융 소득 과세를 개선해 ‘1억 엔의 벽’을 부수는 작업도 밀어붙이고 나섰다. 일본 정부는 연소득이 30억 엔이 넘는 초부유층을 대상으로 3억3000만 엔을 공제한 금액에 대해 22.5%의 세율을 적용할 방침이다. 200~300명 정도가 적용 대상이 될 것으로 추정된다.
1억 엔의 벽은 세금 부담이 소득 1억 엔까지는 점점 높아지다가 1억 엔이 넘으면 오히려 줄어드는 현상을 말한다. 월급쟁이들이 내는 급여 소득세는 누진세 방식이어서 연봉이 높을수록 세율이 최대 55%까지 오른다.
반면 주식의 매각 차익이나 배당에 붙는 금융 소득의 세율은 일률적으로 20%(소득세 15%+주민세 5%)이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1년에 10억원 이상을 버는 사람들 정도면 급여보다 금융 소득의 비율이 더 높기 때문이다.
재무성에 따르면 소득이 5000만~1억 엔 이하인 사람의 세금 부담률은 27.9%다. 50억~100억 엔 소득자의 부담률은 16.1%로 5000만~1억 엔 이하인 사람들보다 10%포인트 이상 낮았다. 소득이 100만~1500만 엔인 사람의 평균 세율(15.5%)과 비슷했다.
일본은 상속세와 증여세 최고 세율이 55%로 매우 높은 나라다. 그 덕분에 주요국 가운데 빈부 격차가 가장 덜하다. 그런 일본이 부의 이전과 부의 회춘에 이처럼 공을 들이는 것은 멈춰 버린 성장 엔진을 어떻게든 다시 돌리기 위해서다.
경제가 이미 성숙화 단계에 접어들었고 고령화가 일본 못지않은 수준으로 진행된 한국도 머지않아 고민할 문제라는 지적이다.
도쿄(일본)=정영효 한국경제 특파원 hug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