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스키 수입액 2008년 이후 최대…하이볼 인기가 ‘힙한 술’로 인식 바꿔
[비즈니스 포커스]“발베니나 맥캘란은 들어오자마자 다 나가요.”
1월 9일 찾은 서울 한남동의 한 주류 판매 전문점에서 한 직원은 이렇게 말했다. 각양각색의 와인, 위스키, 수입 맥주 등이 가게 안을 빼곡하게 채우고 있는 이곳에서 요즘 가장 사람들이 많이 찾는 술은 맥아(보리)를 원료로 만든 ‘싱글 몰트위스키’다.
그중에서도 싱글 몰트의 대명사로 떠오른 발베니·맥캘란·글렌피딕 등은 입고되는 즉시 동이 날 만큼 품귀 현상을 일으키고 있다고 했다.
발베니 12년산은 이 점포의 매장가가 11만9000원인데 중고 거래 시장에서 공병만 2만원에 판매될 정도로 인기다. 점포 직원은 “생산량(공급)이 한정돼 있는데 찾는 수요가 많다 보니 발베니를 구하는 일이 쉽지 않다”고 했다.
같은 날 서울 남대문 시장 주류 상가. 수많은 종류의 양주를 합리적인 가격에 판매해 ‘위스키의 성지’라고도 불리는 이곳은 평일 오전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로 붐볐다. 특히 수입 위스키를 판매하는 상점에서 가격을 흥정하는 사람들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다만 이곳에서도 인기 위스키를 구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앞서 방문한 주류 판매점에서 품절됐던 발베니나 맥캘란은 이미 재고가 소진된 가게가 대부분이었다. 간혹 이 제품들을 판매하는 가게를 찾을 수 있었는데 가격이 비싸 선뜻 구매하기가 꺼려졌다. 발베니 12년산은 앞선 주류 매장의 정가보다 2만원 정도 비싼 14만원을 내야 살 수 있었다.
한국에 위스키 열풍이 불고 있다. 관세청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의 위스키류 수입액은 2억4711만 달러(약 3084억원)로 2008년 이후 최대치를 기록했다.
‘아재(아저씨) 술’이라는 인식이 확산되며 근 10여 년간 위스키 수입량이 지속적으로 감소해 왔는데 2021년부터 급반등하기 시작해 현재에 이르렀다.
인기 있는 위스키를 구매하는 일이 ‘하늘의 별따기’에 비유되기도 할 만큼 위스키를 구매하려는 이들이 많아졌다.이마트 위스키 행사 20분 만에 완판위스키를 구매하기 위해 긴 줄을 서 대기하는 이들까지 등장할 정도로 위스키는 주류 시장의 ‘대세’로 거듭났다. 최근 이마트에서 발생한 ‘오픈런(매장 문이 열리자마자 뛰어가 구매하는 것)’ 사태는 이런 추세를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다. 이를 빗대 ‘위스키런’이라는 신조어도 생겨났다.
이마트는 1월 6일부터 7일까지 전국 주요 점포에서 발베니·맥캘란·히비키·야마자키 등 인기 위스키를 판매한다고 1월 5일 발표했는데 이 소식이 알려지자 다음 날 진풍경이 펼쳐졌다.
위스키를 사러 온 사람들로 인해 대부분의 이마트 점포가 문을 열기도 전에 인산인해를 이룬 것이다.
이마트에 따르면 이번 행사를 위해 준비한 총 1만 병의 위스키는 이틀 연속 판매 시작 약 20분 만에 전부 동이 났다. 위스키의 인기가 얼마나 높은지 직접 체감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마트가 이 같은 행사를 연 이유 역시 위스키의 폭발적인 인기 때문이었다. 이마트의 주류 매출 분석에 따르면 2022년 위스키 매출이 전년보다 30% 이상 성장한 것으로 집계됐다.
이마트 관계자는 “위스키의 인기가 크게 높아진 만큼 모객을 위해 인기 위스키 1만 병을 공수해 특별 행사를 진행한 것”이라며 “전체 주류 판매에서 위스키가 차지하는 비율이 급격하게 높아지는 만큼 향후에도 매장 내 위스키 라인업을 늘려나가는 것은 물론 관련 행사를 꾸준히 개최할 것”이라고 밝혔다.
유통 채널 가운데 대형마트 외에도 편의점이 위스키 판매에 주력하며 매출 상승을 꾀하고 있다. CU·GS25·세븐일레븐·이마트24 등 매대 위를 다양한 종류의 위스키로 채운 점포들이 눈에 띄게 많아졌다.
아예 주류 전문점을 방불케 하는 ‘주류 특화 편의점’을 선보이기도 한다. 한 편의점업계 관계자는 “과거에는 윈저나 발렌타인 등 대중화된 위스키를 찾는 소비자들이 대부분이었는데 최근 들어 편의점에서 다양한 종류의 위스키를 찾는 일이 빈번해졌다”며 “이 같은 소비자의 니즈를 충족시키기 위해 편의점도 위스키 종류를 점차 늘려 나가는 추세”라고 말했다.
하이볼 인기로 진입 장벽 낮아져유통업계에서 나타나고 있는 위스키 열풍의 주인공은 단연 ‘MZ세대(밀레니얼+Z세대)’로 불리는 20·30이 꼽힌다. 중·장년층의 전유물이었던 위스키에 20~30대 젊은층이 신규 고객으로 유입되면서 위스키 수입량이 급격하게 늘어난 것으로 풀이된다. ‘아재술’로 여겨졌던 위스키가 힙한 술로 떠오른 것이다.
수치로도 확인할 수 있다. 이마트는 지난해 위스키를 구매한 고객 가운데 2030세대의 비율이 46.1%로 집계됐다고 밝혔다. 편의점은 GS25가 최근 3년간 주류 판매 데이터를 분석했는데 위스키 구매 소비층 가운데 20~30대 비율이 70%가 넘었다.
그렇다면 MZ세대들은 왜 갑자기 위스키에 빠지게 된 것일까. 주류업계 관계자와 전문가들은 여기에 코로나19 사태가 큰 영향을 미쳤다고 분석했다.
코로나19 사태로 외출을 꺼리면서 집에서 나 홀로 술을 마시는 ‘홈술’이 새로운 트렌드로 떠올랐다. 이는 술 마시는 문화의 변화까지 야기했다. 주점이나 유흥업소에서 취하기 위해 술을 마시는 대신 좋은 술 한잔을 음미하며 마시는 소비자들이 늘어나게 됐다는 분석이다.
명욱 세종사이버대 바리스타&소믈리에학과 겸임교수는 “집에서 혼자 술을 즐기다 보니 색다르면서 고급스러운 술을 찾는 소비자들이 자연히 많아졌다”며 “이것이 싱글 몰트위스키와 같은 독특한 맛과 향을 가진 위스키가 인기를 얻게 된 배경”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를 계기로 많은 사람들이 위스키의 세계에 빠지게 되면서 그 가치를 알게 된 것도 위스키 인기에 한몫했다고 분석했다.
“한정판이나 고급 위스키는 마시지 않고 갖고 있기만 해도 매년 그 가치가 높아진다는 것을 사람들이 자연히 알게 됐죠. 이에 따라 술을 마시지 않더라도 위스키를 소장하는 사람들이 늘면서 소장 가치가 있는 위스키는 품귀 현상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명욱 교수는 설명했다.
한편 위스키의 진입 장벽이 낮아진 것도 위스키의 열풍을 불러일으킨 원인으로 꼽힌다. 한 주류업계 관계자는 “소주와 맥주를 섞은 ‘소맥’처럼 탄산수 등과 위스키를 타 만드는 ‘하이볼’의 큰 인기는 위스키의 대중화 시대를 열게 했다”며 “이에 따라 값비싼 위스키뿐만 아니라 부담 없이 섞어 마실 수 있는 저가의 위스키도 불티나게 팔리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김정우 기자 enyou@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