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선책’ 소리 듣던 비메모리 반도체, ‘핵심 시장’ 되기까지

인텔, ‘포스트 D램’ 찾아 비메모리로 눈 돌려
1980년대 인텔 VS AMD의 싸움 거치며 급성장
TSMC, 삼성전자 등 후발주자 뛰어들며 시장 확대
현재, 전체 반도체 시장의 70% 차지

[스페셜 리포트] 역사는 반복된다…피 튀기는 50년 반도체 전쟁史
인텔은 비메모리 시장 1위 기업이다. (사진=인텔)
반도체 산업은 D램과 낸드플래시 같은 메모리를 중심으로 성장해 왔다. 삼성전자가 글로벌 반도체 시장에서 우위를 점한 것도 ‘세계 최초 **D램 개발’ 전략이 주효했다. ‘어떻게 경쟁사보다 빨리 앞선 메모리 기술력을 선보일까’는 산업 초기부터 최근까지 이어지는 반도체 기업들의 가장 큰 고민이기도 하다.

반면 비메모리에 대한 관심은 이보다 늦었다. 메모리는 대량 생산하면 그 수요처가 모든 곳에 있었지만 비메모리 반도체는 수요가 분산돼 있었기 때문이다. 이 시장의 선두 주자인 인텔조차 ‘포스트 D램’ 프로젝트의 하나로 주력 사업을 교체했다. 메모리 경쟁에서 밀리자 비메모리 산업으로 눈을 돌린 결과다. 비메모리는 전체 반도체 시장의 70%를 차지할 정도로 커졌다.

최근에는 반도체 집적도가 1년 6개월 주기로 2배 늘어난다는 무어의 법칙을 기반으로 성장해 온 메모리 반도체가 물리적 한계에 부딪치면서 성장 속도가 더뎌졌고 이에 따라 비메모리에 대한 관심이 더욱더 커지고 있다. ‘비메모리=인텔’…메모리에서 밀린 인텔의 결단비메모리 반도체 산업을 구성하는 기술은 로직(주문형 반도체)·마이크로프로세서(CPU·MCU 등)·아날로그(PMIC·터치컨트롤러 등)·광학·소자·센서 등 다양하다. 메모리 반도체가 정보를 저장하는 역할을 한다면 비메모리 반도체는 정보를 처리하는 역할로, 유사한 개념의 ‘시스템 반도체’라고도 불린다.

비메모리의 역사는 인텔의 역사이기도 하다. 비메모리 대표 기업으로 최근에는 대만의 파운드리 1위 기업 ‘TSMC’가 주로 언급되지만 TSMC 이전에 ‘인텔’이 있었다.

산업의 시작은 1970년대 초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메모리 반도체보다 약 20년 늦게 시작됐다. 인텔은 1971년 최초의 민간용 4비트 마이크로프로세서 ‘4004’를 선보이면서 시장을 열었다. 당시 인텔은 메모리뿐만 아니라 비메모리를 가리지 않고 사업을 펼쳤다.

1972년에는 세계 최초로 8비트 마이크로프로세서 ‘8008’을 발표했다. 인텔이 1970년대 내놓은 마이크로프로세서는 8비트 8080(1974년), 8비트 8085(1977년), 16비트 8086(1978년), 8비트 8088(1979년) 등이었다. 인텔은 이 칩으로 PC의 시대를 열었다.

1970년대 후반 IBM과 애플 등에서 마이크로프로세서 반도체인 중앙처리장치(CPU)를 탑재한 개인용 컴퓨터(PC)를 내놓으면서 PC에 대한 관심이 커졌고 1980년대에 관련 정보기술(IT) 기기 보급이 확산되며 비메모리 산업이 성장 궤도에 올랐다.

일본 업체에 밀려 1980년대 중반 메모리 반도체 사업을 포기한 인텔이 발견한 시장이기도 하다. 죽어 가는 인텔을 살린 앤디 그로브란 스타 최고경영자(CEO)가 변신을 이끌었다.

여기에 1982년 또 다른 페어차일드 출신들이 1969년 설립한 AMD가 인텔과 라이선스 계약을 하고 마이크로프로세서 시장에 진출(1982년)했다. 산업은 빠르게 성장하기 시작했다. AMD는 ‘인텔의 2차 벤더’ 형태로 사업을 하며 8086과 8088 등을 생산해 IBM에 납품했다. IBM PC가 흥행에 성공하고 스티브 잡스가 1984년 매킨토시를 출시하면서 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이 과정에서 날 선 공방전도 벌어졌다. 1980년대 비메모리 시장의 핵심 사건인 ‘인텔과 AMD 간 싸움’이다. AMD는 인텔의 라이선스를 기반으로 제품을 만들면서도 인텔 대비 가격을 낮추고 경쟁력을 강화하면서 인텔의 입지를 위협하기 시작했다.

이 같은 상황에 1980년대 후반 들어 PC를 포함해 전반적인 반도체 시장이 침체되면서 매출에 타격을 입자 인텔은 1986년 라이선스 계약을 파기하고 기술 공개를 거부했다. 이에 AMD는 법원에 중재를 요청했고 8년이 지난 1994년 법원은 숫자로 만들어진 제품명은 독점할 수 없다는 판결을 내리며 AMD의 손을 들어줬다. 이는 훗날 인텔이 CPU 라인업을 8088 같은 숫자로 만들지 않고 ‘펜티엄’으로 정한 이유이기도 하다. ‘TSMC의 등장’ 팹리스·파운드리 탄생…뒤처지는 일본1980년대까지 인텔을 중심으로 비메모리 산업이 구축됐다면 1990년대 이후는 TSMC를 포함해 다양한 기업들의 비메모리 시장에 진출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장이 확대된 시기다.

TSMC는 대만 반도체 산업 활성화 프로젝트로 1987년 설립됐다. 당시 대만공업기술연구원장인 모리스 창 박사는 메모리 반도체보다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시장 진출이 더 경쟁력 있다고 판단하고 대만 정부를 설득해 투자금을 받았다.모리스 창은 텍사스인스트루먼트(TI)에 엔지니어로 입사해 20년 넘게 근무하며 부사장에까지 오른 인물이다.

TSMC의 등장은 팹리스(반도체 설계 전문 회사) 시장과 파운드리 시장 활성화로 이어졌다. 팹리스는 별도의 생산 공장은 보유하지 않고 반도체 회로의 설계와 판매만 하는 회사다. 이를 가능하게 해주는 게 파운드리로, 회로 설계는 자체적으로 하지 않고 설계가 완료된 회로를 그대로 위탁 생산한다. 대표적인 팹리스 회사는 퀄컴·엔비디아·브로드컴 등이 있다. 이들이 설계해 주문한 반도체를 TSMC가 생산하는 것이다.

이 기업들이 나오면서 주문형 반도체인 ASSP·ASIC 등을 포함하는 로직 반도체 시장도 자연스럽게 활성화됐다. 주문형 반도체는 특정한 제품에만 사용할 수 있어 반도체 생산 업체가 기업의 요청에 맞춰 생산하는 제품이다.

이와 함께 이 시기 다양한 기업들이 비메모리에 뛰어들었다. 삼성전자가 본격적으로 비메모리 사업을 시작한 것도 이때다. 삼성전자는 1996년 비메모리 사업을 강화하기 위해 마이크로사업부를 시스템LSI사업부로 개편했다. 1998년 미국 오스틴 공장을 준공하고 2002년 CMOS 이미지센서(CIS) 대량 생산에 성공했다. 이후 2005년 3월, 처음으로 시스템LSI 전용 300mm 라인을 가동하면서 파운드리 사업이 본격화했다.

유럽 종합 반도체 회사(IDM) ST마이크로 역시 1990년대부터 마이크로프로세서 사업을 강화하기 시작했고 2000년대 들어서면서 미세 전자 기계 시스템(MEMS) 개발을 통해 비메모리 경쟁력을 강화해 왔다.

휴대전화 제조사로 유명한 모토로라도 이 시기에 반도체 사업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특히 1995년 세계 최초 폴더 휴대전화인 ‘스타택’ 시리즈에 자사 반도체를 탑재하면서 경쟁력을 강화했다.

NEC와 히타치 등 일본 기업들도 ‘제2의 메모리’를 찾기 위해 1990년대 후반에 비메모리 시장에 진출했다. NEC는 1998년부터 시스템 LSI에 투자를 확대하기로 결정하고 생산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3000억 엔 투자를 발표하는 등 비메모리 사업 확대에 힘썼다. 히타치 역시 1998년부터 시스템 LSI 생산에 나선 바 있다.

차세대 먹거리를 찾기 위해 비메모리에 진출한 기업이 있는 반면 생존을 위해 사업 방향을 바꾼 기업도 있다.

1970~1980년대 글로벌 메모리 시장을 이끈 TI는 메모리 사업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1998년 마이크론에 메모리 사업을 8억3000만 달러에 넘겼다. 이후 TI는 아날로그 반도체를 포함한 비메모리 사업에만 전념하고 있다.

2000년대 이후 일본 기업의 합종연횡이 발생했다. 2003년 일본 기업인 히타치와 미쓰비시가 비메모리 사업을 합쳐 르네사스 테크놀로지를 세우고 7년 뒤인 2010년 NEC의 비메모리 사업부문까지 흡수한다. 메모리뿐만 아니라 비메모리에서도 영향력이 약화하자 규모의 경제를 실현해 경쟁력을 끌어올릴 계획이었다.

당시 일본 업체들은 합병을 통해 시스템 LSI 부문에서 세계 1위로 도약하고 이를 기반으로 메모리 경쟁력도 되찾겠다고 밝혔지만 실패했다. 시장 조사 업체 옴디아에 따르면 전체 비메모리 시장에서 일본의 점유율은 6% 수준(2020년 기준)에 그친다. D램처럼 정부 주도의 구조 조정이 실패한 셈이다.

‘포스트 D램 찾기’로 시작된 비메모리 산업은 메모리를 넘어선 규모로 성장했다. 현재 반도체 시장 규모는 5500억~5600억 달러(약 682조~694조원)인데, 이 가운데 4000억 달러 이상이 비메모리에서 나온다. 현재 비메모리 시장의 주요 플레이어는 인텔·TSMC·퀄컴·브로드컴·삼성전자·TI 등이다. 특히 인텔과 TSMC는 비메모리 절대 강자로 꼽힌다.

최수진 기자 jinny0618@hankyung.com
상단 바로가기